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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1941년 진주만 공습. 하지만 한 해 뒤 벌어진 미드웨이해전에서 패배로 일본과 미국의 위치는 역전된다.
 일본군의 1941년 진주만 공습. 하지만 한 해 뒤 벌어진 미드웨이해전에서 패배로 일본과 미국의 위치는 역전된다.
ⓒ 영화 <진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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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츠의 야망

미드웨이해전의 승리자 니미츠 제독에게는 젊은 시절의 일화가 있었다. 그가 해군 소위 시절의 일이었다. 해군 대장이 그의 함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진급된 지 얼마 안 되었던 해군 대장은 제복을 입으려다 낙심하고 말았다. 마누라가 예전의 중장 계급장을 달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함대 시찰에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휘하 전 함대에 전문을 쳐 보라고 명령했다.

"대장 계급장 급구. 혹시 소지하고 있는 자는 신고할 것."

그는 수평선에 떠오르는 마누라의 얼굴을 외면하며 투덜거렸다.

"마누라는 언제나 내 계급보다는 연봉에 관심이 높았지."

뜻밖에도 어떤 작은 함대에서 연락이 왔다. 놀랍게도 대장 계급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해군 대장은 작은 함대에서 급히 가져온 계급장으로 고쳐 달고 무사히 행사를 치렀다.

행사가 끝난 후 해군 대장은 그 작은 함대에 웬 일로 대장 계급장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알아보니 니미츠라는 햇병아리 소위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니미츠 소위를 불렀다.

"나에게 연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제가 임관할 때 제 여자 친구가 선물로 준 것입니다."

해군 대장은 조금 우울해졌다. 남편이 대장이 된 것도 모르는 마누라를 둔 자신에 비해 젊은 소위가 더 잘났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질투심 때문인지 그는 니미츠의 애인을 칭찬해 주는 데 인색했다.

"연봉보다 계급에 관심이 많은 애인이군. 니미츠 소위, 아무튼 꼭 대장이 되기를 바라네."

니미츠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 계급이 해군 대장이었다. 그리고 니미츠의 애인은 해군 대장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정보전, 물량전으로 변화한 태평양전쟁

미국의 미드웨이 승전은 니미츠의 말대로 정보전의 승리였다. 미국은 진작부터 일본의 암호를 거의 해독하고 있었다. 미국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이 'AF'를 목적지로 삼아 대공격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AF는 미드웨이 섬일 확률이 높은 것으로 계산되었다. 미국은 이를 확인해 보려고, '미드웨이에 식수가 부족하다'는 내용을 무전으로 하와이 기지에 보냈다. 그러자 이를 청취한 일본군은 48시간 후'에이에프는 식수 부족 상태'라는 암호 전문을 띄웠다. 당연히 미군 지휘부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미군은 대부분의 일본군 작전을 소상히 파악해 놓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 기동부대의 병력, 지휘관, 항진 경로 등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총 공격을 6월 3일쯤으로 계산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미드웨이해전 이후에도 정보전에서 일본을 단연 앞서 나갔다. 솔로몬 제도의 한 작은 섬 근방에서 일본군의 수송선이 운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정찰기 한 대가 나타나더니 낮은 비행으로 수송선 위를 지나간다. 뒤이어 일본 수송선은 미군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일본군은 운이 나빠 미군 정찰기에 포착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군은 암호 해독으로 일본 수송선의 항로와 운행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다. 미군이 정찰기를 띄운 것은 물론 암호 해독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는 위장술이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보급 차단에 주안점을 두어 공격했지만, 일본군은 집요할 정도로 군함 공격에만 주력했다. 미국은 군함과 항공모함을 본토에서 쉴 새 없이 만들고 있었지만, 한 번 차단된 일본의 보급은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해군은 일선 전투를 육군과 해병대에게 이양하고 본토로 돌아가 7개월 간 병력을 재편성·재훈련했다.

여기에다 미국 정부는 군수 물자의 생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해군을 전폭 지원했다. 그리하여 1943년 가을, 함재기 1천여 대와 호위 전함 12척, 순양함 14척 그리고 항공모함이 19척이나 되는 초유의 미국 함대가 태평양 전선에 위용을 드러내며 복귀할 수 있었다. 이제 전쟁은 물량전이 되었고, 미국은 물론 일본조차 일본의 승리를 예측하지 않는 상황으로 급변한다.

태평양의 허무한 불꽃, 야마모토 이소로쿠

야마모토 이소로쿠, 멀리 러일전쟁 때의 일이었다. 그는 토고 제독 휘하의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함대를 격멸시키는 현해탄의 그 현장에 있었다. 야마모토는 대 러시아 해전에서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하지만 당시 사관후보생이었던 야마모토의 가슴에는 승리 지휘관 토고 제독이 이상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예정대로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고 미국 하버드에 가 3년 동안 수학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운다. 그는 미국의 산업 시설들을 둘러보면서 부러움과 경외감을 느꼈다. 그는 많은 미국인 친구와 교제하기도 했다.

1927년 미국의 린드버그가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너는 장면을 보게 된 야마모토는, 이제 해군에도 항공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는 다른 해군 장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항공모함 건조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는 일본 해군 항공기의 현대화에 진력했다. 야마모토는 미국을 잘 알았기에, 일·독·이 삼국동맹에 난색을 표시했고,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는 확고히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곧 배반이고 매국이었다. 그는 일본 우익 청년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군국주의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인물들이 테러나 왕따를 당하는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었다.

야마모토에게는 좀 특이한 행동 양식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안건에 반대하다가도 자기가 반대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 반대를 철회하고 다수파에 가담하는 유연한 처신이었다.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면 해군이 선봉에 서겠다."

그는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라고 말했다.

"미국의 막대한 산업 시설이 전시 체제로 본격 가동하기 전에 미국에 치유 불능의 타격을 입혀야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는 해군 연합사령관이 되었다. 해군제독이 되겠다는 사관후보생 시절의 꿈을 성취한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일부 반대를 물리치고 진주만 기습을 입안한다. 이것은 군부의 주도권이 중일전쟁을 도맡았던 육군으로부터 태평양전쟁의 해군으로 넘어오게 된 것을 의미했다. 요컨대 그는 해군은 물론 대일본제국 군부 전체의 실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의 성공으로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신문들은 함상에서 진두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매일 큰 사진으로 실었다. 본토로 와 있을 때도 그는 상륙하지 않고 연합 함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함대에는 일본 청년들은 물론 명문대 여대생들에게서도 수많은 엽서와 선물들이 답지했다. 선물은 손수건에서부터 파자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심지어는 사르마다(팬티)를 보내는 일본 아줌마도 있었다.

진주만 이후 6개월 동안 그는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에게는 새로운 말 습관이 하나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어떤 전쟁 영웅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었다.

"나의 함대에 불가능은 없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해전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패전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본 국민들에게 그는 여전히 최고의 영웅이었다. 그가 항공기를 직접 타고 전선을 시찰하는 돌출 행동을 보인 것은 이즈음이었다. 그러자 일본의 신문들은 헬멧을 쓰고 전투기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으로 지면을 장식하기에 바빠졌다.

야마모토의 지휘 방식은 러일전쟁의 영웅 토고 이래 일본 해군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과거와 같은 함대 결전 방식에는 적절했지만 항공모함끼리의 해전이나 항공 편대의 전투에서는 비효율적이었다. 왜냐하면 지휘관을 호위하기 위해 다수의 전함이 따라다녀야 했으며, 통신 기기가 온전치 못한 군함에서 군함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도 전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장병의 사기 진작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방식이었다.

반면에 미 해군의 지휘관은 육상 사령부를 떠나지 않았다. 전투는 단위 지휘관에게 일임했다. 따라서 최고 지휘관이 함정에 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하물며 전투기에 탑승하는 것은 비상시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사령관 일행은 부갱빌 섬의 해 공군을 시찰하기 위해 오전 9시 20분 지포엠 육상공격기를 타고 6대의 호위 전투기와 함께 리바울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4일 전 미국이 해독해 낸 일본군의 암호 전문이었다.

부갱빌 섬이 핸더슨 공군 기지의 항속거리 내에 있음을 확인한 미 공군은 야마모토 살해 작전을 검토했다. 처음 미군은 섣불리 야마모토를 죽였다가 일본이 암호 해독 사실을 눈치 채게 되면 득보다 실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마모토가 일본에서 천황 다음으로 추앙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에는 그만한 조치가 달리 있을 성싶지 않았다.

미군은 정교하게 시간을 맞춰 부갱빌 상공에 16대의 P-38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미군의 전투기들은 일본의 호위기 6대 사이를 다짜고짜 뚫고 들어가 야마모토가 탑승한 지포엠을 찾아냈다. 집요한 추격과 공격 끝에 지포엠은 연기에 휩싸인다. 그러고는 팔랑개비처럼 흔들리며 추락을 시작했다. 이윽고 지포엠은 정글 한 가운데로 처박혔다, 폭발과 함께 불꽃이 일었다. 이렇게 대일본제국의 영웅 야마모토는 광막한 태평양에서 순간적으로 지펴진 작은 불꽃과 함께 허무히 전사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야마모토이소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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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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