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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눈부신 속살에 들면

편백나무 서늘한 그늘 어디쯤에

정처 없는 것들의 거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생각이 무사하기를 빌며

그대 앞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대 안에 드는 일이 두렵기도 하나

단지, 때가 되어 어미의 자궁 밖을 나왔던 것처럼

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 것뿐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렇게 또 날이 저물었을 뿐이다

 

그대의 어디쯤에

달빛에 빛나는 지붕 하나가 있기를 바란다.

그곳에 들어 내 눈부신 맨몸을 볼 수 있다면

사랑한 사람들이 이승을 떠난 것도

잠 못 이루는 짐승들의 매일 밤 울음소리도

그대에 이르기 위한 육탈(肉脫)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리

 

-'숲에 들다' 몇 토막

 

1989년 <전교조> 창립과 함께 15년 동안 교육현장에서 조직 실무를 맡아 남모르게 구슬땀을 쏟은 시인. 전남 순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2005년부터 <생명평화결사> 기획위원장을 거쳐 지금은 교육위원장을 맡아 생명평화운동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시인. 그가 1985년부터 <남민시>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 박두규다.

 

박두규는 가시밭길 같은 세상을 이끌고 가는 시인이다. 그는 요즈음 젊은 시인들처럼 설익은 감정 나부랭이 따위로 섣부른 시를 쓰거나, 물질만능주의로 흘러가는 이 세상과 적당한 선에서 악수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이 아무리 자본의 바늘로 온몸을 콕콕 찔러도 끄떡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 고삐를 쥐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는 그가 지금도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인 <지리산 사람들> 대표를 맡고 있고, '여순사건 순천시민연대' 사무총장, <광주전남작가회의> 부회장 등을 맡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 세상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놓고 지리산 숲에 들려고 한다.

 

이 세상과 좀 떨어진 저만치 숲에 들어 그동안 살아온 삶을 차분히 되짚어보면서 명상에 젖어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 세상과 아예 담을 쌓고 저 혼자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10여 년쯤 이 세상과 자신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스승이 되기 위해서다. 그렇게 다시 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다.

 

불일불이,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다

 

"오십 수에 발을 디디던 어느 날 / 끌고 다니던 절망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것은 內臟(내장)의 각 부위를 고르게 칼질하는 일이었고 / 켜켜이 쌓인 세월과 감정의 퇴적을 도려내는 일이었다. / 하지만 스스로를 도려낼수록 세상이 먼저 야위어 갔다." -'시인의 말' 모두 

 

시인 박두규(52)가 세 번째 시집 <숲에 들다>(애지)를 펴냈다. 2001년 7월, 두 번째 시집 <당몰샘>(실천문학사)을 펴낸 지 7년 만이다. 당몰샘은 전국 최장수 마을 가운데 하나인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에 있는 샘으로 '지리산 약초 뿌리 녹는 물이 다 흘러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맛 좋기로 이름 높은 샘이다.

 

이번 시집에는 모두 4부에 60편의 숲에 대한 시가 때로는 고사목으로, 때로는 때죽나무꽃이나 눈부신 길, 산벚꽃 등으로 피어 있다. '어느 저녁' '바다가 푸른 이유' '이파리 하나만 달고' '헛꽃' '어둠의 산' '까마귀' '이 가을에' '서울에 가고 싶다' '달이 뜨니 달이 뜬다고 할 뿐이다' '어느 날, 게으른 놈이' '계속을 타다' '구상나무에 눈이 가득 내리면' 등이 그것.

 

시인 박두규는 이번 시집에서 '어느 날 세속의 한 스승'이 말한 '시나 예술의 경지도 결국은 不一不二(불일불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의 숲에 이르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말한다. "그 순간, 이 길을 다 걸어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번 세상에서도 나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라고.

 

삶은 안과 밖 경계를 사는 문풍지 같은 것

 

폭풍한설에 풍경소리마저 얼어붙은 겨울 산사에서

온밤을 통째로 우는 건 문풍지뿐이다

문의 틈새를 살고 있으나

사실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솜이불이 깔린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

바람 타는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22쪽, '문풍지' 몇 토막

 

시인 박두규는 땡겨울 밤 지리산에 있는 어느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온밤을 통째로 우는 문풍지'를 바라본다. 그 문풍지가 마치 자신이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는 바람 타는 삶처럼 여겨진다. 세상 속으로 아예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걸 접고 세상 밖으로 떠날 수도 없는 어정쩡한 문풍지의 삶, 그 삶이 자화상으로 겹쳐진다.   

 

사실, 시인도 거친 세상과 맨몸으로 싸우는 투사가 되기보다는 남들처럼 "솜이불이 깔린 따뜻한 아랫목" 같은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싶다. "하지만 바람이 멈추고 울음을 그쳐도 / 문풍지는 문풍지"(문풍지)일뿐이다. 아무리 앞에 놓인 현실을 나 몰라라 하고 혼자만이 아늑하게 즐길 수 있는 "아랫목"에 지친 몸을 뉘고 싶지만 타고난 천성은 속일 수 없다.

 

"차라리 바람"에 문풍지처럼 "온몸을 치떠는 것이", 이 무서운 세상을 끌고 가며 "몸부림치며 우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니겠는가. "안이어도 안 되고 밖이어서도 안 되는 / 안과 밖의 경계를 살아야 하는 문풍지" 같은 삶이 올곧은 세상살이 아니겠는가. 한 스승이 말한 불일불이(不一不二)도 문풍지 같은 시인의 삶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지렁이처럼 1m 세상을 기어가고 싶다

 

어느 날, 아무런 뜻 없이 본질적으로 잡아도 잡히지 않는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뜬구름 같은 생각만으로도 사는 일이 벅차올라 한동안 나름대로 허겁지겁 살기도 했지요... 아, 나도 배추밭의 지렁이가 되어 아무런 뜻 없이 종일토록 1m의 세상을 기어가고 싶습니다-24~25쪽, '1m의 세상' 몇 토막

 

시인이 오십 평생 걸어온 길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으면 "본질적으로 잡아도 잡히지 않는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이 되고 싶었을까. 시인은 그 한 생각만으로도 "눈부신 봄날, 마른 가지를 비집고 올라오는 초록빛 새잎의 현실을 보니 눈물"이 난다. 그 한 생각만으로도 "이 비루한 몸뚱어리가 숨 쉬고 있는 세상"이 고맙다.

 

그 한 생각만으로도 "푸르릉 날아오르는 저 새 한 마리의 존재가 서럽도록" 고맙다. 시인은 생각한다. "이 고마움도 어쩌다 제 감정에 겨워 세상이 만만해지니 그러겠지요. 일상 속에 일상을 보는 일이 항상 그렇지요"라고. 하지만 시인은 그 일상을 건너고 싶다. 그리하여    아무런 뜻도 없이 그저 종일토록 1m 세상을 기어가는 지렁이가 되고 싶다.

 

그래. 시인은 이제 쉬고 싶은가 보다. 그동안 이 세상살이에 마구 휘둘리다 보니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스스로 끌고 가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다닌 것만 같다. 시인이 이제는 숲에 들어 이 세상과 스스로를 되짚어보고 싶다고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루종일 숲을 탐색하는 시인

 

언젠가 나는 반드시

잔가지 다 잘라내고

몸통 하나로만 남겠다

뿌리도 한 가닥만 땅에 박고

이파리도 달랑 하나만 달고

그렇게 단정한 아침을 맞으리

가장 가벼운 몸을 이루어

수직으로 홀로 깊어지면

그 어둠 속

맑은 물줄기 소리도 들으리

 

-32쪽, '이파리 하나만 달고' 모두

 

시인은 숲에 들어 그동안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여기저기 뻗어 나온 잔가지를 몽땅 잘라내려 한다. 여기저기 내걸었던 이름도 버리고, 여기저기서 주웠던 지식마저 몽땅 내버리려 한다. 그리하여 오로지 몸뚱이 하나 이파리 하나로 자신과 이 세상을 다시 굽어 살펴보고자 한다.

 

시인이 숲에 들어 자신과 이 세상을 되짚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존재의 뿌리만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인은 숲에 들어 그동안 이 세상과 싸우며 상처투성이가 된 나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나아가 이 세상까지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어둠의 심연에 이르러"야 비로소 "지상의 눈부신 길 하나" 건널 수 있기에.  

 

윤재철 시인은 "그는 늘 숲을 탐색한다. 때로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두려움도 없이 길을 잃기 위해서 그는 숲에 든다"고 말한다. 윤 시인은 "거기에 정처 없는 것들의 거처가 있으리라고 믿고 숲의 내밀한 속살에 드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두려움이 그의 시를 겸손이나 자성에 있게 만들기도 한다"고 평했다.

 

다음은 8일(수) 오후 2시, 박두규 시인과 전화를 통한 일문일답이다. 

 

 

-왜 시를 쓰며,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가?

"저는 깊은 성찰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시는 깊은 성찰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는 쓰는 사람이든 읽는 사람이든 간에 삶의 뿌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그런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고 여긴다. "

 

-박시인은 그동안 전교조를 비롯한 NGO활동과 문학활동 등을 많이 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시집을 읽어보면 당분간 사회활동에서 비껴나 숲에 들어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지려 하는 것 같다.    

"인도 경전을 읽다 보니까 25세까지는 학습기, 25세부터 50세까지는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사회활동기, 50세는 숲에 들어 모든 것을 되돌아보는 명상기, 그리고 60세부터 죽을 때까지는 다시 세상에 나와 진정한 스승으로 활동하는 시기라고 씌어져 있었다.

 

제가 숲에 들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너무 바빴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때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저도 이제는 숲에 들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NGO활동이나 사회활동을 접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은 것뿐이다."

 

-지금 <생명평화결사> 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안다. 생명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가.

"2004년 <생명평화결사>가 창립될 때부터 생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저는 지상에 있는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 세상은 결코 혼자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저는 사람들이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자신과 동등한 존재 가치를 가진 것들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 "

 

-요즈음 젊은 시인들의 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젊은 시인들을 알기 위해 그들이 쓴 시를 열심히 읽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이 자기중심적인데다 자의식도 아주 강하고, 개별화된 존재처럼 여기고 있는 듯하다. 젊은 시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이들도 그러한 것 같다.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물질최고주의와 인터넷의 확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보편화 된 생각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편향된 생각들이 더 많이 담겨 있어 시의 사회적 기능, 대중적 기능이 약한 듯하다. 한 마디로 시가 설익었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시는 김치나 된장처럼 발효가 잘 되어야 그 향기가 오래 가고 맛도 깊어진다고 여긴다."

 

-지리산에는 이원규 시인과 박남준 시인이 살고 있다. 지리산과의 인연은?

"30대 초반 구례에서 교사로 일할 때부터 지리산을 자주 찾았다. 이원규 시인과 박남준 시인과도 가끔 만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생활을 접고 구례 쪽으로 다시 들어간다. 살 집은 이미 지어 놨다. 교직이 구례 쪽으로 옮겨지면 곧바로 이사할 생각이다."

 

시인 박두규는 1956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85년 <南民詩> 창립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사과꽃 편지> <당몰샘>이 있으며, 포토포엠에세이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를 펴냈다.


숲에 들다

박두규 지음, 애지(2008)


태그:#박두규, #숲에 들다,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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