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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8일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프로그램 - 중국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연수에는 30여명의 문화예술인과 문화산업업체 임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산둥성과 상하이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정에 따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 <기자 주>

잠을 잘 수 없었다. 설친 잠을 비행기에서 보충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비행기는 오전 9시 정각에 날아올랐다. 신문을 뒤적이다가 눈을 붙이려는데 기내식이 나오고, 식사를 마친 뒤 또 눈을 붙이려는데 곧 착륙 예정이라는 기내방송이 들렸다.

중국 웨이하이(威海) 공항에는 현지 시각으로 오전 9시 7분에 도착했다. 한국과의 시차가 1시간이니 그 시간만큼 날아온 셈이었다. 인천공항으로부터 498km, 제주도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비행시간은 집에서 공항까지 주행시간보다 짧았다. 황해 건너 중국 산둥(山東) 반도 북쪽 끝에 있는 웨이하이는, 중국은, 그렇듯 가까웠다.

웨이하이공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文明相伴人生, 和諧遍及威海!'란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웨이하이공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文明相伴人生, 和諧遍及威海!'란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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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시각에 시계 바늘을 맞추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짐을 찾고 입국 심사를 받는데, 공항 내 거의 모든 안내문이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한글로 적혀 있다. 웨이하이공항 이용 고객의 90% 가량이 한국인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오자 가장 먼저 빨간 천에 흰 글씨의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文明相伴人生, 和諧遍及威海'. '문명과 함께하는 인생, 조화의 기운이 웨이하이에 두루 미치기를!' 정도의 뜻이 아닐까. 문명과 함께하는 인생? 그 건너편의 '○○ 미용 성형수술 전문의'라는 한글광고판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공항 로비에 줄지어 놓인 탁자 위의 한글 문구는 더욱 이채로웠다. '합법적인 미수금 완전 해결해 드립니다.' 전화번호와 팩스·휴대폰번호까지 적혀 있다. 그 위에 웨이하이의 '위(威)'자가 겹쳐지면서 엉뚱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이번 중국여행이 심상치 않을 것 같다.

'합법적인 미수금 완전 해결해 드립니다.' 이곳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합법적인 미수금 완전 해결해 드립니다.' 이곳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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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위해구'에 도착하다

"판을 새로 짜자."

이번 연수의 프로그램을 기획한 유중하 연세대 교수(중문학)는 여행을 앞두고 반도에 갇힌 시선에서 벗어나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을 아우르는 21세기의 새 판을 짤 것을 주문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중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고, 살아 있는 텍스트로 산둥성(山東省)과 상하이(上海)를 선택했다.

산둥성은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고장으로 5천년 역사를 간직해온 곳이고, 상하이는 2010년 엑스포 개최를 통해 새 중국의 비약을 준비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문화산업과 관련 산둥성은 콘텐츠의 보고이며, 상하이는 그 콘텐츠를 유통시킬 시장이었다.

그 가운데 먼저 산둥성을 찾은 것이다. 산둥성은 면적 15만3000㎢, 인구 9500만 명으로 한국(남한)에 비해 면적은 1.5배, 인구는 2배를 넘는 큰 성이다. 성도(省都)는 지난(濟南).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와 제(齊)나라 등의 영토로 지금도 약칭으로 '루(魯)'라고 부르고 있다. '산둥(山東)'은 타히항(太行)산맥의 동쪽 지역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둥성은 우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지역이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까닭에 한국기업들의 투자가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하고, 그만큼 교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칭다오(靑島)와 웨이하이 등 주요 도시엔 코리아타운이 조성돼 있고, '인천시 청도구' '인천시 위해구' 등으로 불릴 정도다. 한국 내 화교의 90% 넘는 숫자가 산둥성 출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으로 산둥인들은 인천을 '산둥성 인천시'로 부른다고 한다.

장보고 기념관 앞에 청동 솥이 놓여 있는 까닭

한국과 중국의 우호를 상징하는 '장보고 기념탑'
 한국과 중국의 우호를 상징하는 '장보고 기념탑'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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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박5일 동안 산둥성에서 2000km가 넘는 거리를 돌아다니게 될 우리 일행이 처음 찾을 곳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었다. 적산법화원은 롱청(榮成)시 스다오진(石道鎭) 치산(赤山)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846)가 건립한 사찰이다.

당나라 당시 연간 500석의 장전(莊田)을 소유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며, 재당 신라인들의 신앙의 중심이자 마음의 고향이며 정보의 교환처이기도 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스다오(石道) 거리를 달렸다. 조선족 가이드가 "스다오는 선창 유흥가가 발달해 '작은 홍콩'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차창 밖으로 '○○수산' 등 한글로 간판을 적은 수산물 가공공장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아마도 한국기업이 투자한 곳인 듯싶었다.

법화원에 도착해선 일정 탓에 사찰은 둘러보지 못하고 '장보고 기념관'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당나라 당시 일본 승려 엔닌(圓仁) 일행이 법화원에 머물다 돌아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썼기에 한때 '일본의 절'로 알려졌었으나 한중수교 이후 이를 바로잡고 경내에 장보고기념관을 세웠다고 한다.

작은 숲길을 올라가자 두 기둥으로 이뤄진 거대한 탑이 나타났다. '장보고 대사의 위적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영구히 한중수교의 증진을 위하여' 세운 '장보고기념탑'이었다. 받침대를 포함해 16.8m의 높이로 두 기둥은 한국과 중국을, 연결된 윗부분은 두 나라의 우호를 상징하고 있다.

기념탑 앞에는 장보고의 당과 신라에서의 공적이 검은 돌판에 새겨져 있다. 당에 있던 시절 '재당 신라인 자치구 거류민단장' '신라인의 정신적 지도자'란 문구와 귀국 이후 '신라 청해진 대사' '해상왕' '국제평화 질서유지, 국제친선 물자교역, 문화교류 공헌자'란 표현이 특히 도드라져 눈에 들어왔다.

당나라와 신라에서의 장보고 위적을 새겨놓은 기념비
 당나라와 신라에서의 장보고 위적을 새겨놓은 기념비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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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오르자 장보고의 활약상을 새긴 부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조의 가운데는 장군 갑옷을 입은 장보고가 앉아 있고, 그 양 옆에 '大使締交三邦'와 '明神福佑四海'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삼방(三邦)'이란 한·중·일 세 나라를 가리킨다. 장보고(大使)로 인해 한·중·일이 서로 교제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장보고의 활약상을 새긴 부조 앞에 청동 솥이 놓여 있다.
 장보고의 활약상을 새긴 부조 앞에 청동 솥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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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는 장보고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철)에서 '법화우의보정(法華友誼寶鼎)'이란 청동 솥을 놓아두었다. 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솥은 무(武)가 아니라 문(文)을 상징하고 평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무(武)'자를 파자(破字)하면 그칠 지(止)와 창 과(戈)가 된다. 창, 즉 전쟁을 그친다는 뜻이다. 전쟁을 끝내고 창을 녹여 솥을 만들어 평화롭게 밥을 지어 먹자는 것이다."

고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세계인

장보고 기념관 안의 장보고 동상.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장보고 기념관 안의 장보고 동상.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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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기념관으로 들어섰다. 무게 6톤, 높이 8m(기단포함 10.75m)의 장보고 청동상이 우리를 압도했다. 총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기념관은 장보고의 어린 시절부터 당나라로 건너와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해 이사도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법화원을 건립하고, 신라로 돌아가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고 해상왕으로 활약하다가 염장(閻長)에 의해 암살당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림과 인형과 유물 등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보고의 암살 그림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계략에 빠져 술에 취해 잠자고 있는 장보고를 염장이 칼로 살해하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림 아래에는 '청해진의 멸망'이란 제목으로 당시의 사정이 한문과 한글로 기록돼 있었다.

"신무왕이 즉위한 지 6년 만에 병사하자 그의 아들 문성왕은 장보고의 여식을 왕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귀족들이 장보고의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장보고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문성왕과 귀족들은 '반란을 도모한다'는 죄명으로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모계(謀計)하여 살해하고, 그의 부하들 또한 모두 죽였다. 마침내 851년에는 청해진을 폐하였다."

염장이 술에 취해 잠든 장보고를 암살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염장이 술에 취해 잠든 장보고를 암살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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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무역에 시달리는 동포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당의 관직을 버린 채 고향으로 되돌아온 장보고. 만당(晩唐) 최고의 시인 두목(杜牧)과 일본 고승 엔닌 등이 모두 그의 인품과 식견을 칭송했으나, 신라의 왕실과 귀족은 그렇지 않았다.

사졸(士卒) 1만 명으로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탁월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강력한 통솔력으로 나-당-일 3국의 무역을 독점하며 해상제국을 건설했던 그는 결국 고국 땅에서 문성왕(文聖王․839~856)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삼국유사>는 그를 '미천한 해도인(海島人)'으로, <삼국사기>는 '모반을 획책한 반역자'로 기록했다.

장보고의 사망과 청해진의 폐진(閉鎭)으로 신라는 동아시아 해상의 주도권을 잃게 됐다. 최근 발간된 <108가지 결정>이란 책자에는 '장보고 암살'이 '한국인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선택'의 하나로 다뤄져 있다.

황금상의 장보고를 중국 병사가 호위하고 있다.
 황금상의 장보고를 중국 병사가 호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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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하이시 선전부에서 발간한 책자 <위해명인(名人)>은 첫 번째 자리에 장보고를 올려놓고, '중한우호 길의 개척자(中韓友好之路的改拓者)'로서 그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 유 교수는 최인호의 소설 <해신>과 그에 바탕한 드라마가 장보고에게서 '모반자'의 낙인을 벗기긴 했으나, 무려 1200년 전 좁은 땅을 벗어나 바다로 나아갔던 '세계인'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반도에만 갇혀 있지 말고 중국을 보고, 나아가 일본까지 동아시아를 범주로 사고하자. 그런 의미에서 장보고는 21세기의 비전이 될 수 있다. 한·중·일 세 나라 국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서 장보고는 새롭게 그려져야 한다."

식당에서 만난 소동파와 마오쩌둥

법화원을 빠져 나와 부근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식탁 뒤편 벽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초서로 내려쓴 액자가 걸려 있었다. 서예에 대해 아는 건 없으나 문외한이 보기에도 활달함이 느껴지는 글씨였다.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니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시라고 한다.

점심을 먹은 식당 벽면에 마오쩌둥이 쓴 소동파 시 액자가 걸려 있다.
 점심을 먹은 식당 벽면에 마오쩌둥이 쓴 소동파 시 액자가 걸려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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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는 황주(黃州) 유배 시절 값 싼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고, 새로운 돼지고기 요리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삶은 돼지고기를 네모꼴로 잘라 생강·간장·설탕·대파 등을 함께 넣고 조리는 요리법이었다. '동파육(東坡肉)'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중국 인민이 즐겨먹는 찜요리의 하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황주의 맛좋은 돼지고기/ 값이 똥값이라네// 부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네// 적은 물에 넣고/ 약한 불로 충분히 삶으니/ 그 맛 비길 데 없어// 아침마다 배불리 먹으니/ 그 누가 이 맛을 알리오.'

또한 소동파는 어느 고을을 다스릴 때 그의 치세에 감사하는 주민들이 돼지고기를 보내오자 이를 삶아서 다시 주민들에게 되돌려 함께 배불리 먹게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의 마음에 더욱 감사하며 그 고기를 회증육(回增肉, 되돌아 더해진 고기)이라고 불렀다.

마오쩌둥 역시 대장정 시절 돼지고기를 즐겼는데, 오래 보관하기 위해 '동파육'처럼 간장에 절여 먹었다고 한다. 액자의 내용을 미처 묻지는 못했으나, 돼지고기에 얽힌 소동파와 마오쩌둥의 그런 내력으로 식당에 걸려 있는 액자마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청의 북양해군제독서가 있던 리우공따오

점심을 마치고는 웨이하이의 리우공따오(劉公島)를 찾았다. 리우공따오는 청나라의 북양해군(北洋海軍) 제독서(提督署, 사령부)가 있던 섬이다. 웨이하이는 리우공따오가 해안을 가로막는 천혜의 방패 역할을 하는 지형으로 명나라 때부터 수군기지였다. 당시 수군이 사용했다는 '위진해강(威震海强)'이란 구호의 준말이 지역 이름이 됐다.

리우공따오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에 도착하기 전 가이드가 "배 운행시각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인원이 차면 떠나고, 사람이 없으면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들이 없다니 중국인의 '만만디(慢慢地) 정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주말을 맞아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리우공다오(유공도)를 찾았다.
 주말을 맞아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리우공다오(유공도)를 찾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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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말을 맞아 리우공따오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 배는 출발했다. 선착장에는 한자로 '문명승선(文明乘船)'이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그 밑에는 작은 한글로 '문명승성('성'은 오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배는 20분이 채 안 돼 리우공따오에 도착했다. 1894년 우리가 청일전쟁으로 부르는 갑오전쟁 때 그 앞바다에서 청과 일의 해군이 맞붙어 청의 해군이 패배했다. 중국 정부는 당시 목숨을 잃은 북양해군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1985년 북양해군 제독서 자리에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을 세우고, 이어 1988년 일대를 '유공도갑오전쟁기념지'로 지정했다.

갑오전쟁박물관에 청일전쟁 당시의 어뢰와 대포를 전시해놓았다.
 갑오전쟁박물관에 청일전쟁 당시의 어뢰와 대포를 전시해놓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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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전쟁박물관은 바다와 인접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엔 이홍장(李鴻章)이 쓴 '해군공부(海軍公府)'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밑 계단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번갈아가며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옆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장쩌민(江澤民)이 쓴 '전국청소년교육기지'를 시작으로 '애국주의교육기지' 등등의 석판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갑오전쟁박물관에는 북양해군 및 갑오전쟁과 관련된 그림과 사진 1000여 점과 당시 군기, 군복 등 각종 문물자료 200여 건이 전시돼 있다. 언덕 맨 위에는 붉게 녹이 슨 북양해군의 대포와 어뢰 등이 놓여 있다. 중국인에겐 '애국심'을 고취하는 유물일지 모르나 내겐 그저 전쟁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흉물로 여겨졌다.

'애국장령(愛國將令)' 정여창과 등세창, 그리고 서태후

갑오전쟁 당시 북양해군 제독은 정여창(丁汝昌․?-1895)이었다. 그는 이곳에 머무르며 직접 작전을 총지휘했다. 갑오전쟁이 일어나자 군함 12척을 거느리고 황해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혹시 그는 개전을 앞두고,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함선을 물리쳤던 이순신 장군의 '기적'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함대는 참패했고, 1895년 2월 일본군의 점령을 앞둔 새벽, 그는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부하들은 투항했다. 그 때문에 적에게 투항했다고 해서 그의 주검은 15년 동안 고향 땅에 묻히지도 못했다.

갑오전쟁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북양해군 정여창 제독(위)과 등세창 함장(아래)의 사진
 갑오전쟁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북양해군 정여창 제독(위)과 등세창 함장(아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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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 사진 바로 아래엔 또 한 명의 갑오전쟁 '애국장령(愛國將令)' 등세창(鄧世昌)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북양해군 치원호(致遠號)의 함장으로 일본 해군의 어뢰에 맞아 배가 침몰할 때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인물이다. 그의 애견도 주인을 곁을 지켰다고 한다. 비록 패장이지만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웨이하이 중심가 도로에 '세창대로'란 이름을 붙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의 길을 걸었던 일본과 1840년과 1856년의 1, 2차 아편전쟁 이후에도 개혁의 발걸음을 주춤거렸던 청나라 간 전쟁의 승패는 이미 예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1894년 환갑을 맞은 서태후(西太后․1835-1908)는 자신의 회갑잔치와 이화원 공사에 북양해군의 예산까지 끌어다 썼다. 회갑연 비용만도 1000만 냥으로 당시 국가예산의 6분의 1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북양해군의 근대화를 위해 유럽까지 직접 가 최신 군함을 들여왔던 정여창.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 전쟁을 앞두고 군 예산까지 끌어다 쓰는 황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북양해군의 패전으로 갑오전쟁의 승패는 판가름 났다. 전쟁 후 청은 강화 전권대사로 이홍장을 일본에 파견해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遼東) 반도 등의 할양, 배상금 2억 냥 지불 등을 약속하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다. '잠자는 사자'는 '종이 호랑이'였음이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서구 열강들도 더욱 본격적으로 늙은 대국으로 몰려들었다. 독일이 칭다오를, 러시아가 뤼순(旅順)과 따리엔(大蓮)를 차지했고, 영국은 리우공따오를 포함 웨이하이를 조차해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로 삼았다.

유중하 교수는 "청일전쟁은 한·중·일이 묶여 움직인 가장 큰 역사적 사건으로 동아시아의 판을 새로 짠 전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21세기 한·중·일의 운명은? 그는 다시 한 번, 창을 녹여 솥을 만들기 위해선 "새 판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조 자장면'을 맛보다

버스는 '세창대로'를 지나 옌타이(烟台)시 푸샨(福山)구로 달렸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고장답게 길 양옆으로 수수밭 평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옌타이시는 왕복 10차선 도로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선 꽤 큰 도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도 깨끗했다.

옌타이시의 푸샨을 찾은 까닭은 '자장면' 때문이었다. 개항 이후 인천의 청국 조계지에 있던 공화춘(共和春)에서 개발해 퍼져나갔다는 자장면(炸醬面)의 고향이 바로 푸샨이다. 하루 평균 800만 그릇이 소비되고,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한국 100대 상징의 하나이기도 하며, '블랙데이'라는 기념일까지 만들어낸 자장면. 그 '원조'의 맛은 어떨까.

푸샨의 화교빈관(華僑賓館)에 도착하자 '열렬환영(熱烈還迎)'으로 시작하는 현수막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지역 언론사의 취재기자들도 나와 있었다. 푸샨 부구청장은 "옌타이시에만 3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며 "문화·경제 교류를 통해 양국이 파트너로서 함께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환영사를 했다.

푸샨의 한 요리사가 면발 뽑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푸샨의 한 요리사가 면발 뽑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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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을 대표해 유중하 교수는 답사로 "20세기 산둥 화교는 한국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 21세기 화교는 중국과 한국을 잇는 가교가 되기를, 화교(華僑)의 '교'자가 교량(橋)의 역할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화답했다.

이어 푸샨요리협회 고문이 푸샨 요리에 대해 설명했다. 노채(魯菜, 노나라 요리)로 일컫는 푸샨요리는 광동, 사천, 강소·절강 요리와 함께 중국 4대 요리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그는 "중국 황실 요리사의 7-8할이 푸샨 출신이었고, 현재도 전 세계에서 푸샨 요리사들이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재료, 칼질, 조미료, 불의 세기 등 요리의 여러 기법들을 설명하면서 이에 따라 음식의 색, 향, 맛, 형태가 달라진다고 했다. 우선 재료에서 산둥 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지대이기에 해산물이 다양하고 채소류도 풍부하다. 음식 맛은 기름기가 적어 담백하고 국물이 산뜻하다고 한다. 특히 센 불에서 금방 볶아내는 음식이 발달했다. 자장면(炸醬面)이란 이름도 장을 센 불에 볶는다(터질 작(炸))는 데서 유래했다.

산둥인이 친구를 사귀는 법

공식적인 환영행사가 끝나자 한 젊은 요리사가 면발 뽑는 기술을 선보였다. TV에서 즐겨 보던 장면이지만 직접 보니 역시 또 신기했다. 몇 번의 손놀림으로 면발은 어느새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졌다. 푸샨 요리에서는 면 종류만 1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푸샨요리협회장(왼쪽 두번째)은 호탕하게 웃고 떠들며 끊임없이 술과 음식을 권했다. 그밖에 왼쪽부터 일행 중 도성희 영화감독, 이희재·박재동 화백.
 푸샨요리협회장(왼쪽 두번째)은 호탕하게 웃고 떠들며 끊임없이 술과 음식을 권했다. 그밖에 왼쪽부터 일행 중 도성희 영화감독, 이희재·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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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식사 시간. 요리협회 관계자들이 테이블마다 섞여 앉았다. 그리고는 포도주잔에 고량주를 가득 담아 건배를 제안했다. 그들은 식사 내내 호탕하게 떠들며 쉴 틈 없이 술을 권했다. 그것이 산둥인이 친구를 사귀는 방식이었다. 거칠고 직설적이며 술을 즐겨한다는 산둥인다웠다.

해삼과 상어뱃살로 만든 스프. 이어 전복으로 만든 전가복, 자라 요리, 소라 튀김 등이 차례차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장면이 나왔다. 우리가 먹는 자장면과는 달랐다. 면에 자장이 덮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숙주, 오이, 마늘 등 8가지 정도의 채소와 자장을 면에 비벼 먹는 방식이었다. 면은 조금 가늘고 검었고, 짰다.

자장면을 함께 먹다 보니 묘하게도 처음 만나는 그들이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일행 중 박재동 화백은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甛蜜蜜)'를 불러 그들의 환대에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술잔이 거듭 비워지고, 산둥인의 호기에 맞서 대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기 위해 맞상대하던 일행 몇 명은 만취했다. 호텔에 들어 작은 소동을 겪은 뒤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7박8일간의 중국연수, 그 첫 날이었다.


태그:#중국연수, #적산법화원, #장보고, #유공도, #자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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