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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김치'가 브랜드 김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가족 맛'은 '외식 맛'으로 바뀌고 있다. 그만큼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손맛 가짓수는 줄어드는 추세다. 상대적으로 인간미(人間味)에 대한 그리움도 커지고 있다. 꺼벙이, 고인돌, 맹꽁이 서당 등 추억의 만화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은 현상도 그 중 한 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만화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나타난 인간미의 소중함을 재확인하고, '맛'의 현재적 의미를 모색하는 기획시리즈 '만화미(味)담 오미공감'을 마련했다.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말]
신문수 선생이 로봇 찌빠 초창기 원고를 보여주고 있다
 신문수 선생이 로봇 찌빠 초창기 원고를 보여주고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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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찌빠'는 중장년층은 물론 요즘 청년들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 <소년중앙>에 20년 동안이나 연재된 만큼,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들까지를 독자로 아우를 수 있는 캐릭터가 바로 '로봇 찌빠'다. 전통에 인색한 우리 사회에 흔치 않은 문화 자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찌빠를 잊고 살았다. 살아남기도 너무 바빴다. IMF라는 격랑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 갈수록 높아만 가는 '뉴타운'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오늘도 꾸역꾸역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이들이 바로 '로봇 찌빠'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잊고 살았던, 이제는 생김새조차 가물가물한 '로봇 찌빠'가 돌아온단다.

'로봇 찌빠'는 내년 하반기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을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될 예정이다. 아빠·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캐릭터의 귀환, 일단 반가운 뉴스임이 틀림없다. 잃어버릴 뻔한 토종 캐릭터의 부활이란 점에서도 뜻깊은 소식이다.

그래서 새삼 '잃어버린 15년'이 궁금해졌다. 1994년 연재 중단 이후 '로봇 찌빠'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을까 말이다.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렇다. '로봇 찌빠'는 만화 잡지와 함께 실종됐고, 그 새 일본만화가 출판만화시장을 장악했다. 만화산업을 노다지인 양 떠드는 오늘을 냉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도 찌빠의 '잃어버린 15년'이 필요했다.

원래의 로봇 찌빠(위)와 작년 모 회사 반도체 교육 만화에 나타난 로봇 찌빠(아래). 세월의 변화 때문인지 찌빠 몸통이 무척 홀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원래의 로봇 찌빠(위)와 작년 모 회사 반도체 교육 만화에 나타난 로봇 찌빠(아래). 세월의 변화 때문인지 찌빠 몸통이 무척 홀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신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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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작 찌빠, 그게 더 재미있다"


우선 신문수 선생(69)은 찌빠는 죽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1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오프라인에서 작품을 접할 기회가 드물어서 은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레저잡지나 사보 등을 통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찌빠도 사보나 교육용 만화에 계속 등장시키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그 말이 안타까웠다. 마징가 제트나 로봇태권브이 같은 '싸움 로봇'이 주름잡고, 사람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로봇이 흔치 않은 시절에 탄생한 만화가 '로봇 찌빠'다. 찌빠가 사보나 전전한다는 사실에, 이 노작가도 "슬프다"고 속을 털어놨다.

선생은 찌빠의 처지를, 우리 만화의 현실을 '옥류관 냉면'에 비유했다. 조미료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옥류관 냉면을 맛없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선생은 "아이들이 한국적 만화를 보면서 '이게 무슨 만화냐' 할 정도로 일본풍에 익어버렸다"고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선생은 "만화산업을 키우려면, 출판만화부터 살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는 "'자동차 몇십만대 효과' 말만 하지 말고 소프트웨어를 꽉꽉 채울 수 있는 지원을 해야 한다"면서 "작가들이 활동하고 발표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좋은 만화가 나오고, 애니메이션 산업의 성공 확률도 더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로봇 찌빠의 신문수 선생
 로봇 찌빠의 신문수 선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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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클로버문고를 복간하려는 '클로버 문고의 향수' 회원들과 만났다.
"'로봇 찌빠' '도깨비 감투' 골수팬들 40명 정도가 왔더라.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로봇 찌빠'가 그려진 케이크도 받았다. 공을 많이 들였더라. '선생님, 사랑합니다'는 말, 참 기분 좋더라고. 인사동에서 사인하는 종이를 따로 사서 회원들에게 사인을 모두 해줬다. 정말 좋아하더라. 오래된 만화를 아직 보물처럼 여겨줘서 정말 고마웠다. 옛날 만화책들 어떻게 다 구해서 사인해 달라는지… 그 나이들 먹어서 옛날 만화책 좋아하는 걸 보면 마누라가 웃지(웃음). 이제 40대 언저리 아닌가. 그런데도 굉장히 순수한 사람들 같더라."

- 회원들이 편지에 어떤 이야기가 많던가.
"이제 나이도 있고, 몇십 년 지나지 않았나. 오프라인에서 내 작품을 접할 기회가 드무니까 요즘도 일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 그렇지 않아도 근황이 궁금하다. 평소 하루 일과는?
"낚시나 골프 등 레저잡지나 사보 등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보통 집에서 새벽 6시에 나온다. 작업실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하는데, 장편 작업은 아니라서 낮 12시가 되면 마감이 거의 끝난다. 나이 먹어서도 심심찮게 매일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

- 요즘 작품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캐릭터는 무엇인가. 로봇 찌빠도 아직 등장하나.
"사보에는 30대 초반 직장인 '오동추'를 주인공으로 많이 쓴다. 로봇 찌빠도 쓸 때가 있지만, 아무래도 교육용 만화에 적합한 캐릭터다. 작년에는 반도체 제조 공정을 소개하는 만화를 그렸는데, 마침 로봇이다 보니까 딱 맞는 캐릭터더라. 찌빠는 여전히 살아있다."

"만화만 그린 나, 아쉽고 슬프다"

- 로봇 찌빠가 탄생한 것이 1974년이다. 로봇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시절 아니었나. 어떻게 구상했는지 궁금하다.
"'마징가 제트' 같은 거대 로봇이 로켓·광선 등을 쏘면서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이야기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덩치가 어마어마하니 어린이들과 방에서 함께 놀 수 없다. 또 주인공 생각대로 로켓을 발사하는 것이지, 로봇 스스로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

싸우는 것만 로봇 능력이냐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어린이만한 덩치에 인간과 가까운 지능을 갖고 있는 로봇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화 속에서 팔팔이(로봇 찌빠에 등장하는 인간 주인공)는 형제가 없다. 외로워하는 팔팔이의 친구로 등장시키자고 생각했다."

-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캐릭터라 더욱 친근감이 느껴진다.
"로봇 찌빠는 완벽하지 않다. 미국 전자회사의 실패작으로 실수도 하고 엉뚱한 짓을 한다. 그게 더 재미있는 것이다. 팔팔이보다 찌빠가 훨씬 머리가 좋으면 독자도 기분 나쁘지 않겠나(웃음)."

- 로봇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로봇태권브이만큼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산업적인 면으로 키웠으면 찌빠도 둘리나 태권브이만큼 많이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만화만 그렸지, 그런 산업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론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로봇 찌빠가 사보나 교육만화에만 등장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가장 아끼는 작품도 로봇 찌빠로 알고 있는데.
"사실 슬프다. 만화 주인공이라면 지면에서 독자들과 만나야 하는데…. 지금 만화잡지 다 없어지지 않았나. 마음이 아프다. 정부는 무슨 '자동차 몇십만 대 효과' 운운하며 만화산업이 굉장히 비전 있다는 식으로 말만 하지 말고, 만화적 소프트웨어를 꽉꽉 채울 수 있는 지원을 해야 한다. 작가들이 활동하고 발표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좋은 만화가 나오지 않겠나. 좋은 만화가 나와야 그걸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산업도 활발해질 수 있다.

요즘 애니메이션을 통해 갑자기 탄생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 쭉 연재되지 않고, 갑자기 하나 만들어진다. 그것도 성공할 수 있지만, 만화를 통해 독자를 확실히 확보해놓은 캐릭터, 역사 있는 캐릭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때, 성공 확률이 더 높다. 만화 산업을 키우려면, 출판만화부터 살려야 한다."

"된장·간장 같은 만화를 그려야 한다"

작품을 그리고 있는 신문수 선생
 작품을 그리고 있는 신문수 선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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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만화 시장이 죽으면서 일본 만화가 판 친다.
"우리 아이들이 보는 TV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들 대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일본풍에 눈이 익어버렸다. 한국적 만화를 보면, '이런 만화도 있나, 이게 무슨 만화냐'는 식이다. 평양 옥류관 냉면 맛없다는 한국 사람들 많지 않나. 그만큼 조미료 입맛에 딱 길들여졌다는 얘기다. 어느새 우리 만화가 옥류관 냉면처럼 돼버렸다.

조미료 많이 뿌리면 맛있는 것 같지만, 실제 맛이 있는 것은 아니다. 된장·간장, 이런 소재 갖고 만들어야 한국적 맛이 난다. 한국에서나 통하는 캐릭터지 외국에 나가면 안 되니까, 그 사람들 입맛에 맞게 변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한국적인 것만 고집해서 세계화가 되겠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 맛을 그 사람들이 좋아하게끔 특성을 살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그래서 찌빠 애니메이션 작업에 거는 기대가 더욱 클 것 같은데.
"그 동안 찌빠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자는 제의도 여러 차례 있었다. 헌데 몇십 년 흘렀다고 내용을 원작과 전혀 다르게 하면 안 된다고, 찌빠에게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가 가장 중요하다. 원작 줄거리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구미 프로덕션과 함께 하게 된 것은, 그리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지만 한국적 로봇 캐릭터를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자는 열정이 굉장했기 때문이었다. 로봇 찌빠 애니메이션의 성공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토종 캐릭터로 성공해야 토종 후속타들이 또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신장암 수술 신문수 선생 "하나 남은 신장 쌩쌩하게 잘 돌아가"

세 친구의 '이별 여행'. 왼쪽부터 신문수, 고(故) 고우영, 이정문 선생. 심술통 이정문 선생의 '사진 메모'가 인상적이다.
 세 친구의 '이별 여행'. 왼쪽부터 신문수, 고(故) 고우영, 이정문 선생. 심술통 이정문 선생의 '사진 메모'가 인상적이다.
ⓒ 신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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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일지매'가 SBS에 이어 MB에서도 드라마로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름은 '일지매' 원작자인 고우영. '삼국지''수호지''초한지''임꺽정' 등 작품을 통해 "만화를 국민오락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고인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실감나지 않을 시간일 것이다. 신문수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친구로 지내면서 "가난했던 친구가 삼국지부터 형편이 좀 펴서 집도 사고 자리를 잡는" 과정을 지켜봤고, 대장암이 발병하고 나서는 또 다른 친구 이정문 선생과 함께 '이별여행'으로 우정을 '갈무리'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사이다.

최근 서울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렸던 고우영 회고전 '고우영 만화 - 네버엔딩 스토리'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신문수 선생은 먼저 고인과의 인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1970년 쯤 고우영과 인연을 맺었다. 80년대에는 나, 고우영, 윤승운, 이렇게 3명이 3년 동안 같은 작업실을 썼고, 심수회(만화가들의 낚시 동호회) 활동을 할 때는 나와 고우영 그리고 이정문 등이 특히 각별한 사이였다. 술값 계산할 때 서로 내겠다고 하도 다퉈서 별도로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이름 순서대로 술값을 내서 '가나다회'라고 불렀다. 하여튼 셋이 무지하게 어울려 다녔다."

그러면서 선생은 "고우영씨가 노래방만 가면 즐겨 불렀던 노래가 '해운대 엘레지'"라면서 "언제까지 헤어지지 말자고 다짐했던 너와 내가 아닌가"라는 가사 내용을 소개하는 한편, "지금도 노래방만 가면 그 사람의 이 노래가 절실하게 생각난다. 지금도 타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항상 옆에 있는 것 같다"는 말로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암의 고통도 '공유'했다. 2002년에 고우영 선생이 대장암이 발병해 먼저 수술을 받았고, 같은 해 신문수 선생도 신장암 진단을 받았던 것. 그리고 "신장 하나를 떼어내는 큰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수술 선배랍시고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이 바로 고우영 선생이었다고 한다.

"'까딱없으니까, 나도 멀쩡하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라. 그리고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돈을 넣고 갔는데 생각보다 금액이 컸다. 그래서 '나 빨리 가라는 얘기냐, 노잣돈 하란 얘기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퇴원 후에 사우나에 같이 가서는 누구 수술 상처가 더 긴지 재보자고 하기도 했다."

먼저 떠난 친구가 꿈에 나타난 적도 있다고 한다. 선생은 "저승에 가서 판관들이 쭉 서 있는데,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판관 한 명이 바로 고우영이었다. 맨 뒤에 가서 서라고 하더라"면서 "아마도 오래 살 것 같다(웃음)"고 말했다.

한편 선생은 17일 인터뷰를 통해 최근 건강 상태에 대해 "일정 간격으로 병원에 가서 계속 검진을 받고 있는데, 다행히 하나 남은 신장이 쌩쌩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면서 "6년이 넘은 지금까지 전이된 적도 없고, 건강한 상태"라고 밝혔다.

신문수 선생과의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선생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오마이뉴스를 잘 알고 있다"면서 독자들을 위한 사인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신문수 선생과의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선생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오마이뉴스를 잘 알고 있다"면서 독자들을 위한 사인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 신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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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문수, #찌빠, #도깨비, #애니, #고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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