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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지시각으로 9월 3일 저녁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열린 미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세라 페일린의 부통령 수락 연설은 말그대로 전당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뒤로 넘어가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굳이 공화당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페일린의 연설은 대단했다.

물론, 이 연설을 쓴 사람은 전 백악관 연설 작성자인 멧 스컬리로, 현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의 연설을 작성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어디서 많이 듣던 분위기와 패턴이 느껴지긴 했으나, 분명한 것은 페일린의 전달 능력이 매우 탁월했다는 것이다.

연설 시작 전만 해도 '불안한' 후보

3일(미국 현지 시각)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열린 미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부통령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3일(미국 현지 시각)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열린 미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부통령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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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린의 연설이 시작되기 직전만 해도 페일린에 대해 미국 언론은, 변방 알래스카의 1년 반짜리 주지사, 7000명 인구의 도시 시장 출신, 국가 안보·외교 부문의 전무한 경력, 10대 딸의 혼전 임신 등으로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것'을 내세울 만한 점으로 꼽고 있는 형편이었다.

9월 3일 오전까지만 해도 그녀에 대한 주요 뉴스는 메케인의 부통령 후보 선정 과정이 얼마나 허점투성이고 성급했는지였다. 가령, 2일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는 메케인의 부통령 선정 과정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페일린이 부통령 후보로 선택된 지 3일만에 그녀에 대한 '새로운' 소식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며, 과연 부통령 후보 선정과정에서 이 모든 것들이 미리 고려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다뤘다.

9월 1일 하루 동안에만 페일린의 17살짜리 딸아이가 혼전 임신했다는 것, 페일린이 알래스카 의회 윤리위원회의 조사에 대비해 개인 변호사를 고용했다는 것, 그녀가 90년대에 2년간 알래스카독립당 당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남편 토드 페일린이 음주운전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는 것 등이 뉴스로 터져나왔다. 
 
<뉴욕타임즈>는 메케인 진영의 부통령 선정팀이 페일린 부통령 후보를 발표하기 하루 전인 목요일을 빼고는 그 전에 알래스카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메케인 진영과 가까운 한 공화당 인사를 통해 밝혔다.

또 페일린 선정에 대한 궁금증과 의혹을 처리하기 위해서 지난달 31일 일요일 밤까지도 알래스카로 직접 파견될 수 있는 공화당 인사들을 전화로 수소문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알래스카에 있는 페일린의 동료 정치인들은 메케인 진영으로부터 그녀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며, 메케인의 러닝 메이트 선정 과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금요일, 오하이오 데이튼에서 페일린을 러닝 메이트로 소개하기 48~72시간 전까지 메케인이 부통령 후보자로 점찍어 둔 것은 그의 오랜 '소울 메이트'이자 2000년 앨 고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까지 나왔던 조 리버만이었고, 차선책으로는 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인 톰 리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프로 초이스(Pro-Choice, Pro-Life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낙태를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인정함)'이기 때문에 기독교 우파들의 지지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공화당 여건상 모두 탈락되었다고 <뉴욕 타임즈>는 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페일린이 수요일 저녁에 가서야 메케인의 최측근 참모들과 면접을 했으며, 다음날 아침에 메케인으로부터 부통령 제안을 받게 되었다고 전했다. 페일린의 딸이 혼전 임신했다는 사실은 수요일 저녁 참모들과의 면접을 통해서 처음 밝혀졌고, 이들은 메케인에게 그같은 임신 사실이 부통령이 되는데 부적격 사유가 될 수 없다면서 그녀를 강력히 추천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수요일 저녁까지 페일린과 더불어 강력한 부통령 후보로 고려되었던 인물은 미네소타 주지사인 팀 폴렌티로 전해지며, 그는 목요일 저녁까지도 최종 후보로 고려되었다고 한다.  

메케인의 러닝 메이트 선정과정은 봄부터 시작되었고, 페일린을 포함한 최초의 후보군 20명은 이후에 6명으로, 또 최종 2명으로 좁혀졌다고 메케인 선거참모는 밝혔다.

조 리버맨, 톰 리지, 밋 럼니(전 메사추세츠 주지사), 팀 폴렌티 그리고 바비 진달(현 루이지애나 주지사) 등이 포함된 6명의 후보군은 70여개의 문항이든 설문지를 받았는데, 간통, 매춘, 마약, 알콜 중독 등의 여부를 확인하는 질문이 들어있다고 전해졌다.

또, 오사마 빈 라덴의 위치를 파악했으나 그를 죽이는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CIA가 보고를 한다면, 부통령으로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와 같은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페일린, 공화당 우파의 중심 가치 삶으로 보여줘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인 존 매케인(좌)과 세라 페일린(우)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인 존 매케인(좌)과 세라 페일린(우)
ⓒ johnmcca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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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보도를 종합해 보면, 비록 페일린이 최종 6명의 후보군에는 포함되었으나 리버맨, 리지, 폴렌티 만큼 철저한 검증을 받지는 않았고, 성황리에 끝난 민주당 전당 대회 여파와 공화당 내 역학관계에 의해 페일린 카드가 갑자기 떠오른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여전히 페일린은 '낯선' 존재고, 그녀에 대한 탐색은 계속되는 상황이지만, 36분의 연설로 페일린은 비록 남이 써준 연설일 망정 탁월한 전달 능력을 보여주었고, 메케인에 불만을 갖고 있던 공화당 우파와 보수 기독교인들을 확실하게 대변해줌으로써 공화당의 지지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총기 소유권 지지, 낙태 반대(페일린은 근친 상간과 성폭력에 의한 임신 중절도 반대하고 있다), 동성애 결혼 반대 등은 공화당 우파를 분류하는 데 중심적인 가치들인데, 페일린은 그녀의 삶으로 이 가치들을 실현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페일린 효과' 덕분에 직접적인 혜택을 보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메케인이다. 올 초 시작된 각 당 경선에서 오바마와 메케인이 공통으로 의지한 표심은 민주, 공화 어느 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무당파들이었다.

골수 민주당원들은 힐러리를, 골수 공화당원들은 마이크 허카비와 밋 럼니, 프레드 톰슨 등을 지지했다. 오바마는 당파색이 옅은 젊은 유권자들과 무당파 또는 아예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대거 끌어들였고, 메케인 역시 무당파와 중도 보수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각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메케인의 경우 다른 세 명의 후보가 공화당의 기본 지지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반사이익도 얻었다.)

따라서 오바마와 메케인은 공통적으로 자당의 전통적인 지지계층을 사로잡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오바마는 바이든을, 메케인은 페일린을 러닝 메이트로 삼은 것이다. 즉, 바이든은 '원조' 민주당 지지계층인 소도시, 저학력, 저임금 노동자 계층을 공략하기 위해서, 페일린은 기독교 우파들을 결집시키기 위해서 선택되었다.

특히 메케인은 2004년 존 케리의 러닝 메이트로 고려되었을 만큼 공화당 우파들이 받아들이기엔 매우 껄끄러운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메케인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된 이후 우파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민주당으로부터는 '말을 바꾼다'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기대 밖의 능력을 보여준 페일린 덕분에 메케인은 적어도 불편한 관계였던 공화당 기독교 우파에 대해 한 짐 덜게 되었으며, 원래 자신의 '특기'인 개혁가로서의 이미지를 더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시종 일관 오바마 비꼬아... 자칫 정치혐오감 확산할 수도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로 페일린이 입증한 또 다른 능력은 미국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들이 전통적으로 맡아오던 '저격수' 역할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녀는 비록 연설을 통해서 새로운 정책이나 대안 제시를 하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효과적으로 오바마를 공격할 수 있을지는 잘 보여주었다.

페일린은 "소도시이기 때문에 나의 시장 경력을 마치 실질적 책임이 면제된 커뮤니티 오거나이저(community organizer / 대학 졸업 후 오바마는 첫 직업으로 가난 퇴치를 위해 일을 했다)와 동급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소개한 뒤 "그러나 나는 소도시에 와서는 노동자들을 찬양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 가서는 이들이 총과 종교에 매달리는 각박한 사람들이라고 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다"라며 오바마를 비꼬았다.

또한 페일린은 "오바마가 두 권의 자서전을 쓰기는 했지만 주 상원으로 있을 때조차 중요한 법안을 쓴 적은 없다"고 비꼰 뒤 "오바마는 자신의 경력을 키우기 위해 '변화'를 이용하지만 메케인은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경력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페일린은 "미국의 대통령직은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여정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며 자전적 스토리로 많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오바마를 비꼬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제 지적과 정책 대안 없이 냉소적인 인신 공격에만 치중하는 페일린의 방식은 골수 공화당 유권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있으나, 자칫 정치에 대한 혐오감만 늘려 모처럼 미국에 불어온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기를 식힐 우려가 있다.

특히 현재 미국이 경제가 어렵고,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으며, 고유가와 환경 문제에 시달리며, 의료보험 붕괴와 허약한 사회보장 제도로 유례없는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일반 국민들의 삶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원인의 진단과 해결책 제시없이 상대 후보만을 물고 뜯는 것은 최초의 여성 부통령을 기대해보는 많은 여성 유권자들에게도 큰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당찬 연설과 그 부수 효과로 페일린은 데뷔에는 성공했지만, 그 효과를 11월 대선까지 이어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태그:#미국 대선, #세라 페일린, #메케인,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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