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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8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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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1509~1564)은 루터와 함께 16세기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루터가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면, 칼뱅은 조직자로서 종교개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기 전에 그것을 붙잡아 세운 인물이었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칼뱅을 계승한 장로교가 최대 교파인 것을 보아도 그의 영향력은 짐작할 수 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획일적 교조주의에 반발한 종교개혁은 성경 해석 등 종교문제에 대한 '개인적 판단'(private judgement)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들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빌미로 과격한 주장들이 싹터 나오자 칼뱅은 개혁파의 자기 분열에 맞서 새로운 교리의 핵심을 하나의 도식으로 집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기독교강요>(1535)를 출간해 개신교 교리의 기반을 닦았다.

1536년 9월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설교자로 초빙된 칼뱅은 석 달 만에 개신교의 기본원칙들을 요약한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하고,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칼뱅의 요구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아무리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 계속 살 수 없었다. 민주적인 공화국은 신정적(神政的) 독재국가가 되고 말았다.

신학의 돈키호테 세르베투스

에스파냐 출신의 세르베투스(1511~1553)는 신학의 돈키호테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종교적으로 과열된 시대에 살면서 감히 삼위일체설을 부인했으니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르침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도망자 신세가 된 그는 프랑스에서 본명을 숨기고 살았다. 누구와도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는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편지로나마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이 눈먼 사람이 신뢰를 바친 사람은 칼뱅이었다.

1546년 그는 저서 <그리스도교 회복>의 원고를 칼뱅에게 우편으로 보내면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가 원고와 함께 보낸 편지에는 "교황 이론의 일부인 삼위일체와 유아세례가 악마의 교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둘 사이에 편지가 몇 번 오간 뒤, 칼뱅은 그와 절연하고 그가 보낸 원고를 보관했다. 이때 칼뱅은 '이단자' 세르베투스를 죽일 것을 결심한다.

1553년 칼뱅은 보관해오던 세르베투스의 편지들을 대리인을 통해 가톨릭 종교재판소 측에 넘겼다.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의 스파이 노릇을 한 셈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은 채 원수인 가톨릭을 이용해 '이단자'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손 안 대고 코 풀려던 칼뱅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세르베투스가 감옥에서 도망친 것이다.

몇 달 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세르베투스가 돈키호테처럼 하필이면 제네바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칼뱅의 명령으로 즉각 체포되어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만장일치로 산 채로 불태워지는 형벌을 선고 받았다. 그것은 모든 형벌 중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잔인성으로 이름 높은 중세에도 대개 사형수들은 화형대에 묶이기 전에 미리 목이 졸려 있거나 아니면 마취된 상태였다. 그런데 개신교 최초의 이단자 처형에 가장 끔찍한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쳤다.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칼뱅의 세르베투스 처형은 볼테르의 말대로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다. 그것은 개신교 본래의 이념을 부정한 사건이었다. '이단자'란 개념 자체가 개신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개신교는 모든 사람에게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했다. 실제로 루터, 츠빙글리 등은 종교개혁 운동의 아웃사이더나 극단론자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폭력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분명한 거부감을 보였던 것이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불태워 죽임으로써 개신교가 쟁취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단번에 없애버렸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그는 가톨릭교회를 능가해버렸다. 가톨릭교회는 독자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울 때까지 천 년 이상을 망설였다. 그러나 칼뱅은 통치한 지 겨우 몇십 년 만에 개신교의 명예를 더럽혔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의 행위는 에스파냐의 종교재판 창시자 토르케마다의 모든 비행보다도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칼뱅을 꾸짖은 카스텔리오

카스텔리오는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 지대에서 칼뱅보다 6년 늦은 1515년에 태어났다. 탁월한 신학자였던 그는 24세 나이에 칼뱅의 승인으로 제네바 개신교학교 교장에 초빙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칼뱅은 카스텔리오의 성경번역에 대해 검열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칼뱅을 학자 대 학자의 대등한 관계로 여겼던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권위주의적 태도에 모욕감을 느꼈다. 한편 칼뱅은 무조건적 복종이 아닌 '개인적 판단'을 하는 '독립적 학자' 카스텔리오에 대해 불쾌감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제네바를 떠나게 된 카스텔리오의 삶은 비참했다. 스위스 도시들은 칼뱅에게 정치적으로 속박되어 있었으므로 제네바 독재자의 눈 밖에 난 인물을 공식적으로 채용할 수 없었다. 카스텔리오는 일정한 직업도 얻지 못한 채 집집마다 구걸하며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간신히 바젤의 한 출판사에서 교정 보는 일을 얻어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추방된 카스텔리오가 칼뱅과의 싸움에 뛰어든 것은 세르베투스가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진 다음부터다. 카스텔리오는 침묵을 깨고 <이단자에 관하여>, <칼뱅의 글에 반박함> 등의 저서를 쓴다. 카스텔리오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서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칼뱅을 꾸짖는다. 만일 카스텔리오의 글이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면 칼뱅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살인죄를 저지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글은 칼뱅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칼뱅의 명령에 따라 행해진 검열에 의해 카스텔리오의 글들은 인쇄조차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카스텔리오 자신이 이단자들과 어울렸다는 혐의로 화형에 처해질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카스텔리오는 쇠약해진 몸 때문에 격렬한 위경련을 일으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런 불행한 사태만은 모면할 수 있었다.

종교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불교와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몰입도가 높을수록 다른 종교 또한 더 좋아하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 몰입도가 높아질수록 자신의 종교를 편애하는 반면 타 종교에 대한 관용도가 낮은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장로교가 다수를 점하는 한국 개신교는 칼뱅을 위대한 종교개혁가요 장로교의 창시자로서 일방적으로 우상시해왔다. 말끝마다 '칼뱅주의'를 내세우며 '정통'을 들먹이는 한국 개신교의 독선적인 모습에서, 카스텔리오와 대비되며 드러나는 칼뱅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쓰고나서 확인해 보니 이 책은 이미 절판되어 구해볼 수 없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역작이 다시 우리 독자들의 손에 들어오기를 기대해본다.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자작나무(1998)


태그:#칼뱅, #세르베투스, #종교개혁, #개신교, #카스텔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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