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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많은 지자체들이 지역의 특성을 살려 축제와 문화행사를 개최하곤 한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가 위치한 충남 부여군도 마찬가지다. 이곳엔 상설 문화행사인 '백제 대왕행차'가 있다. 왕과 왕비는 물론이고 장군과 궁녀, 신하, 병사 등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 맡은 역할에 맞는 옷을 차려입고 행차를 하는 것이다. 이 행차는 정림사지에서 부소산성 정문까지 이어진다.

이 백제대왕 행차에 참여하는 이들 대부분이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이다. 이 학교가 부여에 있는 유일한 대학교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래도 20대니 이런 일을 하기엔 '딱'이다. 부여군 입장에선 대학생들을 '알바생'으로 고용하는 게 편하고, 대학생 입장에서도 빈곤한 주머니를 채우기엔 괜찮은 알바기 때문에 서로 '윈윈'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은 매년 이 행사에 '알바'로 참여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입학하기 전부터 선배들에게 백제대왕행차에 대해 들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알바기에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알바시간은 일요일 오후. 일주일 중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황금 시간대지만, 불과 3~4시간만 투자하면 넉넉한 돈이 들어오는 상황에 마음에 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가 부여에서도 외진 곳에 있고 학사일정 상 웬만한 각오 없인 알바 하기 힘든 가난한 대학생에게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2시간 만에 동 난 백제대왕행차 알바 신청서

학생들에게 워낙 인기가 많은 백제대왕 행차 알바인지라 이 신청경쟁 또한 치열하다. 신청 방법은 매년 바뀌지만 주로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방법이 사용된다. 부여군은 거의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는 학교 특성에 맞춰 신청서 100부를 기숙사 사감실 앞에 놔둔다. 학생들은 이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어 보이는 신청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일단 기숙사 사감실 앞에 신청서가 놓이면 이를 본 학생들은 자신의 선후배들이나 학우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그럼 너나 할 것 없이 기숙사로 달려가 신청서를 가져간다. 몇몇 학생들은 한 움큼 집어 주변 학우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전교생은 약 500여명. 미니대학교지만 알바 신청자 100명을 채우기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두 시간 정도면 되려나? 늦게 온 이들은 신청서가 동났다는 사실에 놀라고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는 하필 그날 수업에 답사가 있어 외부에 나갔다 온 상황이었다. 학우들에게 백제대왕 행차 알바 신청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가서 보니 이미 신청서는 꽉 찬 상황…. '낭패다'란 표정으로 사감실 앞에서 굳어있는 내 앞으로 한 친구가 뭐 별거냐란 표정으로 지나간다. 분명 나와 같이 답사를 간 녀석인데… 혹시 알바 신청했냐는 물음에 여유 있는 친구의 대답.

"당연히 신청 했지."
"어떻게 신청했는데?"
내 물음에 그 친구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약간 한적한 곳으로 간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쌓여 있는 신청서 중에서 하나 빼내서 복사했지. 그래서 그 복사한 걸 수정액으로 지우고 다시 복사해. 그래서 나온 거에다가 다시 내 신상정보 넣고. 그래서 그 둘을 중간쯤에 끼워 놓음 누가 알겠어?"

친구의 기지에 놀란 나. 결국 나도 친구와 함께 공범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온갖 꼼수가 다 나오는 것은 그만큼 이 백제대왕 행차 알바가 참을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병졸은 3만원, 장군은 3만 5천원!

백제문화제 백제대왕행차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구드래에 모였다.
▲ 백제대왕행차를 준비하는 학생들. 백제문화제 백제대왕행차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구드래에 모였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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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제대왕 행차를 한번 뛰면 적게는 3만원, 그리고 많게는 3만5천원이라는 돈이 들어온다. 백제대왕 행차에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한두 시간, 그리고 그 전에 예행연습이나 대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두 시간이다. 그러니까 투자하는 시간에 비해 알바비가 많다는 것이 매력이다.

그럼 3만원과 3만 5천원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수염을 붙이고 분장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다르다. 수염이나 분장을 하지 않고 단순히 옷만 입을 경우 3만원이다. 상대적으로 다수가 동원되는 병졸·기수 역할을 맡을 경우 그런데, 이들은 한손에 창이나 칼, 활 같은 무기를 들거나 형형색색의 깃발들을 들고 행차에 참여하게 된다.

3만5천원을 받는 이들은 수염을 붙이고 분장을 한 이들이다. 그곳에서는 이들을 '분장팀'이라고 부른다. 분장팀은 일반팀에 비해 1시간 더 일찍 행차 장소로 출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염을 붙이거나 분장을 한다.

백제대왕 행차 알바에서 나는 후자에 속해다. 체형이나 외모의 면에서 소위 장군감이었고,  알바비를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은 마음에서 분장팀을 자원하였다. 분장팀도 여러 종류로 나뉘는데, 왕이나 왕비로 분장하는 이가 있는 한편, 계백장군과 4명의 장군, 북장군, 그리고 궁녀와 부장으로 분장하는 이들로 나뉜다. 계백장군은 소위 '짬'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는 행차에서 유일하게 말을 타고 가기 때문이다.

"아앗, 왜 이리 수염이 까끌까끌해!"

백제대왕행차를 하기 위해 장군갑옷을 입은 모습. 까끌까끌한 수염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 장군갑옷 입은 나 백제대왕행차를 하기 위해 장군갑옷을 입은 모습. 까끌까끌한 수염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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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해서 장군역을 맡았지만, 막상 장군복을 갈아입고 수염을 붙일 때는 괜히 신청했다 싶었다. 그때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마치 플라스틱 빗자루에서 빗살을 뽑아내어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입 주위에 붙이는 기분이랄까…. 그냥 붙일 수도 없기 때문에 접착제 또한 입 주위에 바르는데, 이 또한 곤욕이다. 행차가 끝난 뒤 비누나 물비누를 이용해 떼어내도 접착제가 말끔하게 없어지지도 않고 입 주변이 하얗게 트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5천원 더 받는다는 게 또 어디야….

옷을 갈아입을 때도 탈의실에서 겉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알바가 끝날 때 재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겉옷에 분장복을 그대로 껴입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할 경우 그날 날씨가 어떤지가 중요하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더울 때가 있는데, 그때의 고통을 정말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껄끄러운 수염에 갑갑한 투구, 옷을 겹겹이 껴입고 땡볕 아래 부동자세로 서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찔하다.

백제대왕행차는 공연을 동반한다. 전통무예나 풍물놀이, 전통춤 등을 보여주는데, 이를 대하는 관광객들과 알바생들의 반응은 당연히 엇갈린다. 관광객들은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느라 정신이 없고 알바생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한다. 이러한 알바생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공연할 때 스태프들이 주는 시원한 생수. 알바생들은 생수로 목을 축이고 다시 부동자세로 돌아간다. 물론 머릿속은 알바 후에 뭘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행차알바의 백미인 백제문화제

백제대왕 행차 알바의 백미는 백제문화제다. 백제문화제는 매년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에서 열리는 축제로, 이 축제에서도 당연히 백제대왕 행차는 빠질 수 없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 때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 대부분 학생들이 수업을 빼먹더라도 알바를 하겠다는 기세다. 그 이유는 이 축제 기간에는 여러 번의 행차가 있고, 추석 전에 하기 때문에 집에 갈 차비를 벌 수도 있다. 축제 내내 있는 행차에 다 참여하면 손에 쥐어지는 것은 십 몇 만원.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기 때문에, 축제를 즐기면서 돈도 버는 일석이조를 누릴 수 있다.

나도 이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이 백제문화제에 참여하기로 하고 버스에 올라 축제 장소로 갔다. 주최측에서 이미 버스까지 대절하여 학교로 보냈고, 우린 그 버스를 타고 구드래로 향하였다. 구드래는 백제시대의 나루였던 곳으로 지금은 백마강 옆의 넓은 평지로, 이곳에선 수많은 행사가 벌어진다. 이곳 탈의실에서 각자 옷을 분배받아 입고 예행연습을 했다.

하지만 일이 꼬이는 모양이었다. 행차 알바에 참여하는 전원이 구드래로 도착하였지만 본래 목적지는 구드래가 아닌 부소산성이었던 것이다. 주최 측의 혼선으로 인하여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몇 시간 후. 예정대로 행차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부소산성으로 가야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분장옷을 입고 창과 방패 등을 들고 부소산성으로 걸어갔다.

행차에 앞서 예행연습 등을 하고 한쪽에서는 휴식을 취한다.
 행차에 앞서 예행연습 등을 하고 한쪽에서는 휴식을 취한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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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 행차알바를 하면 점심은 제공된다. 김밥에 음료수가 전부였지만, 그것도 먹다보면 배가 부르기 때문에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참여했을 때는 하필 그런 점심도 없었다. 자연스레 몇 시간동안 구드래에서 대기했고, 그 중엔 밥도 못 먹은 이들이 많았다. 예행 연습한다고 서 있던 학생들은 피로와 배고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부소산성으로 간 우리는 다시 그곳에서 쉬면서 행차를 기다렸다. 식사를 제공해 주면 좋으련만, 하필 이 또한 주최 측의 혼선으로 구드래로 가버렸다. 행차는 곧 시작한다고 하고, 주머니가 없는 분장옷 때문에 귀중품은 구드래의 관계자들에게 맡겨놓은 상태라 근처 매점에서 무엇을 사먹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난 친구들과 함께 계단에 앉아 '차라리 빨리 행차를 했으면' 했다.

그 당시 내 옆에는 여자 동기 한명이 같이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그녀는 귀엽고 예쁘장한 외모 때문에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식탐이 조금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도 점심을 먹지 않아 배고파했고 주최측에서 마련한 도시락이 구드래에 있다는 말에 풀이 죽어있는 상태였다.

색다른 알바,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주다

이때 마침 주최측 스태프 한분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고 그 속에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는데, 그 스태프가 우리를 향해 소리 질렀다.

"여기 혹시 발 아픈 사람 있나요?"

오늘따라 유난히 알바생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든 그는 소염제나 간단한 파스 등을 들고 우리에게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스태프의 말을 들으니 난 순간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배고파 하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여기 혹시 배고픈 사람 있나요?"

이 말을 들은 그녀는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갑자기 팍 세우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앞서 스태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그녀…. 그녀는 자신 있게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여기 배고픈 사람 있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스태프는 3초간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때 우리 주위에는 평소 알고 지내던 학우들보다는 외부에서 온 일반인들과 같이 쉬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 또한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고 난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쿡쿡대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반응에 대해서는 길게 말 할 것도 없다.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에게 이 행차알바는 통과의례라고도 할 수 있다. 짧은 시간, 짭짤한 알바비의 유혹에 누구나 한 번씩 해본다. 기존에 하던 알바에 비하면, 수염 붙이고 걸어가는 게 뭐 얼마나 힘들겠냐만, 경험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다른 알바와는 다르다. 그리고 학우들과 같이 즐기면서 하는 알바라는 점에 묘한 매력이 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을 때가 있다. 나중에 복학하면, 다시 알바를 신청할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글입니다.



태그:#백제대왕행차, #백제, #아르바이트, #부여, #백제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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