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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인 1983년 1월 초. 당시 나는 대학 1학년을 마친 학생신분이었다. 겨울이었고 서울거리는 날선 바람이 불었다. 그날 나는 친구와 함께 종로거리에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잠자리를 구해야 할 것인데…."
"아무 곳이나 들어가 일 좀 하게 해달라고 할까?"
"이렇게 건강한 몸인데…. 이렇게 갈 곳이 없다냐?"

그날 친구와 나는 일자리와 잠자리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공장 생활을 해보겠다며 무작정 집을 나온 것은 하루 전날이었다.

학력 속이고 취업한 곳은 천호동에 있는 '가방공장'

전날 밤은 명륜동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었다. 그러나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없었고 우리는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그의 빈 하숙방에서 커튼을 이불로 가방을 베개 삼아 하룻밤을 보냈다. 밤새 얼었던 몸은 한낮이 되어도 녹을 줄을 몰랐다.

"공장이 많은 영등포나 구로쪽으로 가볼까?"
"거긴 위험해. 벌써 몇이나 잡혀 갔어."

그랬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학생수 만큼이나 사복경찰이 상주하던 시절 대학생이 공장에 취업하는 것은 '위장취업'이었고, 위장취업을 한 사실만으로도 공안사범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보통의 친구들은 음악다방에서 디제이를 하거나 경양식집 혹은 맥주집에서 서빙을 하며 용돈을 벌었다.

"그럼 아무 데나 찾자."

친구와 나는 전봇대에 붙어 있는 구인광고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술집 웨이터를 구하는 곳도 있었고, 숙식제공에다 선불까지 준다는 <여종업원 구함> 광고도 있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은 구인광고들. 아무런 내용없이 전화번호만 적혀 있는 광고지도 많았다. 그 중 한 곳에다 전화를 걸었다.

"거기가 어디죠?"
"대지극장 앞입니다."
"뭐하는 곳인가요?"
"가방공장입니다."

딱히 원하는 곳은 없었지만 공장이라는 말에 일단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인 대지극장 앞으로 가니 두툼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우리를 책상 하나가 달랑 놓인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사무실엔 그 흔한 액자 하나 없었고, 전화기만 두어 대 놓여 있었다. 

"여기가 공장인가요?"
"아뇨, 공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여자는 우리에게 취직을 하겠냐고 물어왔다. 우리는 숙식제공이 되면 하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그런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최종학력은요?"
"국졸입니다."

여자가 그렇게 물었고 우리는 '국졸'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여자는 우리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서류에다 국졸을 표기한 후 신분증을 요구했다.

"주민증록증은 퇴사할 때 돌려드릴 겁니다."

입사 서류는 예상보다 간단했다. 여자는 우리를 잠시 기다리라고 했고, 잠시 후엔 세 사람이 더 사무실로 왔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는 따로 왔으며 우리와 같이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입사 서류를 썼다.

"기다리면 공장에서 사람이 나올 겁니다."

좁은 사무실에서 기다리기를 두어 시간. 그러는 중에도 사무실 전화기는 쉼없이 울었다. 그러나 전화를 걸었던 그들은 사무실을 찾아 오지는 않았다. 공장에서 사람이 온 건 한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공장에서 온 여자는 사무실에서 건넨 서류를 챙기더니 따라오라 했다.

한 달 월급 3만6천원 "하루 닭다리 하나인 인생이네?"

그녀를 따라 탄 좌석버스는 어린이대공원을 지나 광진교를 건넜다.

"공장이 어디요?"

친구가 물었다.

"천호동 구사거리에 있습니다."

그제야 처음 찾아간 사무실이 공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았고, 그곳은 사람을 모아 이곳 저곳의 공장에다 사람을 공급해주고 소개비를 받는 일종의 인력공급업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천호동 구 사거리를 지나 미나리꽝이라는 곳에 내렸다. 가방공장은 주택가에 있는 2층 건물의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입사 동기인 다섯 사람은 사장실에 들어가 다시 면접을 보았다. 면접이라 해보았자 국졸이 분명하냐는 것과 가방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냐 없느냐 정도를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우연찮게도 그런 곳은 다들 처음었던지 모두 '시다'로 발령(?)이 났다.

"저…. 월급은 얼마나 주시나요?"
"아, 먹고 자고 월 3만 6천원입니다."

자장면 한 그릇이 2500원 하던 시절이었고, 사립대학 등록금이 70만원 가까이 하던 때였다. 서울의 하숙비가 15만원이 넘었고, 당시 내 주머니에 있는 돈만 해도 3만원이 넘었다. 동네 닭집에서 튀긴 통닭 한 마리가 5천원이었고, 솔 담배 한 값이 500원 하던 시절이었다.  

"하루 일당 1200원 짜리 인생이네?"
"통닭 일곱 개 값이니 하루 닭다리 하나인 인생이다."

친구와 나는 그렇게 계산하며 낄낄 웃었다. 그러면서 임금이 헐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세상 살이에 있어 하나의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견뎌 보기로 했다.

가방공장에서 일하는 공원들은 우리를 합해도 30여명이 되지 않았다. 일하는 공원들의 나이가 공장장이 스물 다섯이었으니 우리 보다 어린 사람들이 더 많았다. 30평쯤 되는 공장엔 미싱이 열 개 정도 되었고, 가죽을 재단하는 재단사도 두엇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선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은 '쪽가위'. 우리의 임무는 쪽가위로 미싱사들이 만들어 놓은 가방의 실밥을 뜯는 일이었다.

첫날 저녁 식사 시간, 식사는 공장과 붙어있는 가정집에서 했다. 숙소로도 사용하는 집이라 했다. 반찬은 정어리 찌개와 깍두기가 전부였다. 큰 솥에 끓인 찌개를 밥상 중간에 올려 놓고 각자 알아서 퍼 먹는 방식이었다. 밥 또한 오래된 쌀과 보리가 절반씩 섞여 있어 좀체로 넘어 가지 않았다.  

"아무리 후하게 쳐도 한 끼에 백원도 치이지 않았겠다."

식사를 끝낸 친구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 가장 싼 생선이 정어리였고 한 끼 반찬으로 끓인 정어리 값은 천원어치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밥을 먹으면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는 가방공장 사람들. 가난이 싫어 집을 나온 사람들이고, 주는대로 먹으며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했던 시절인 것이다.

하루 13시간 넘는 노동, 식사는 한끼에 백원도 치이지 않아

저녁을 먹고도 일은 또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어진 하루 일과는 밤 9시가 되어서 끝났다. 몇 시간을 일하냐고 물으니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13시간이나 일을 한다고 했다. 계산해보니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한다 해도 그 값이 100원도 되지 않았다.

작업 시간인 9시를 넘기면 자유시간이었다. 공장장이 첫날이라며 입사동기들을 데리고 통닭집으로 갔다.

"열심히 일해봐요. 나중에 기술만 익히면 월급도 오르고…. 그 후엔 이런 공장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공장장은 통닭과 맥주를 사며 사람은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고 했다. 그 역시 15살 때부터 공장 일을 시작해 10년만인 지금 공장장 자리에 올랐다며 자신의 자랑을 늘어 놓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잠 잘 방은 두 개. 하나는 여자들 방이고 또 하나는 남자들이 자는 방이었다. 남자들의 인원은 모두 17명.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잠은 자야했기에 모두 칼 잠을 자기로 했다. 어깨를 방바닥에 붙이기조차 힘든 공간. 온 방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잠을 잤던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아침 기상은 새벽 6시. 오전 7시에 식사를 하고, 8시부터는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문제는 세면장이 따로 없는데다 온수가 없어 씻기도 힘들다는 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얼음 깬 물로 눈곱만 떼고 일을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다. 1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세 명의 아이들이 더 들어왔다. 이젠 칼 잠으로도 부족했다. 한 방에 앉을 수도 없었다. 모두 서서 잠을 자야 할 상황이었다. 친구와 나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식당(밤이면 빈 방)으로 쓰는 옆방으로 가겠다며 가방을 들고 나섰다.

도망친 아이들 잡는 건 동네 폭력배, 사주에겐 '사람이 돈'

그 다음 날 두 명의 아이가 도망쳤다. 스스로 공장이 싫어 떠난 것인데도 사람들은 '도망쳤다'라고 말했다. 공장에선 아이들을 찾기 위해 폭력배들을 풀었다. 작은 공장이 많았던 당시만 해도 어느 공장을 막론하고 사람이 귀하던 시절이라 사주들은 '사람은 곧 돈'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은 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는 공장으로 이리저리 몰려 다녔고, 어느 순간엔 공장 라인이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도망친 아이들을 잡아 오는 것은 동네의 폭력배들이었다. 그들은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청량리역 또는 버스터미널으로 퍼져 집으로 돌아가려는 아이들을 잡아 오거나 다른 공장으로 간 아이들을 빼내 오기도 했다. 도망쳤다 잡혀온 아이들은 폭력배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후 두 번 다시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친구와 나는 밤 시간 틈만 나면 그 아이들을 방으로 불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전두환이 광주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 것도 사실이라고 일러 주었다. 더불어 '공돌이'가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가야할 길과 전태일 열사에 관한 얘기도 해주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듣고 많이 놀랐으며, 시간이 지나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더 흘렀고, 그 사이 우리는 '쌍문동파'가 되어 있었다. 누가 만들어낸 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을 친구와 나를 '쌍문동에서 놀던 사람'이라고 규정해 놓고 있었다. 지명이야 들어서 알고 있지만 한 번도 걸음해 보지 않았던 쌍문동. 그 쌍문동으로 인해 우리는 공장 생활을 하면서 흔히 있을 수 있는 텃세조차 받지 않았고, 무엇보다 '쌍문동파'라는 호칭은 우리가 목적한 일을 하기엔 더 없이 좋은 방패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작업 시간. 공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팔팔한 나이인 20대 초반에 의자에 앉아 쪽가위로 실밥이나 뜯고 있으니 엉덩이에 뿔이 날 지경이었다. 미싱사들은 발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쪽가위질조차 서툰 시다를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구정 명절을 앞둔 시점이라 공장장의 일 독촉도 갈수록 늘어 그 무렵부터는 밤 10시를 넘기는 날도 다반사였다.

3주일 일했지만 한 푼도 못 받고 공장문 나서다

단벌로 집을 나온 탓에 갈아 입을 옷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세탁기는커녕 짤순이 조차 없는 공장에서는 빨래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찬물에 어찌어찌 빨래를 한다 해도 며칠은 말려야 될 정도로 날도 추웠다.

친구와 나는 하는 수 없어 날을 잡아 옷을 빨아 입기 위해 공장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간 적도 있었다. 욕조에 빤 옷을 이불 밑에 깔아 놓아도 온기가 약해서인지 옷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아침 시간 축축한 옷을 입고 공장으로 돌아오면 몸이 덜덜 떨렸다.

한 달을 채우리라 작심을 했지만 친구와 나는 입사 3주일 만에 공장을 나왔다. 언제 경찰이 들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학교에도 볼 일이 많았던 때문이었다. 맡긴 주민등록증을 찾으며 "그동안 일한 보수를…" 했지만 우리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한 달을 채우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친구와 나는 싸울 일도 아니고 해서 그냥 공장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동력 착취에다 임금 착취까지 당했지만 당시의 추억은 내게 큰 양분이 되었다. 돈을 목적으로 선택한 일이 아니었기에 후회도 없었다. 당시 가방공장에 있던 사람들 또한 지금쯤은 어엿한 사장님이나 엄마가 되었을 것이니 거리에서 만난다 해도 알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되면 영화 <박하사탕>의 첫 장면이나 마지막처럼 노래방 기계 틀며 <나 어떡해>를 부르게 될까 싶어 그 일도 꿈꾸지 않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태그:#가방공장, #일당1200원,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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