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구려밴드'의 음악을 처음 접한 건 젊은이들이 가득한 작년 2007년 여름 홍대 앞 록 공연장에서였다. 화려한 퍼포먼스 가득한 몇몇 밴드의 무대가 연이어 계속되고 공연장을 찾은 청춘들의 열기는 이미 사하라 사막의 오후 2시와 맞먹을 만큼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산중에 무력일하여 철가는 줄 몰랐더니 꽃피어 춘절이요 잎 돋아 하절이라 오동낙엽이 추절이요 저 건너 창송녹죽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니 이 아니 동절이냐."

정선의 '아라리'가 '록'과 만나다

머리를 흔들어대던 청춘들은 흠칫, 갑작스러운 "우리 가락 좋을시고"에 무대 위로 시선을 빼앗겼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이 뭥미?"라는 듯한 표정의 청춘들. 무대 위의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질펀한 가락과 기타 산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말로만 듣던 아라리 록 밴드, 고구려 밴드였다.

 고구려밴드 - 주색만찬 (酒色晩餐 ) (음악을 들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술과 안주 가득실어 달맞이 하고 사랑하는 임도 보고 뽕도 따고서."

그들의 음악은 팀명만큼이나 신선함, 그리고 일말의 이질감마저 안겨주었다. 록은 록인데 귀에 착착 감겨 붙는 뭔가 색다른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결코 낯설진 않지만, 지금껏 익숙했던 음악들과는 사뭇 다른 음악. 가볍게 흘려 버리기엔 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감성을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역시나, 이미 공연장은 '황진이 춤'을 휘둘러대는 청춘들로 갑작스레 동네 잔치 분위기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게 바로 정서예요. 아무리 세련되고 매끄러운 음악에 빠져 살아도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몸에 흐르는 우리 가락의 피는 무시할 수 없지요."

11일 만난 강원도 사투리의 보컬 이길영씨는 그것을 한민족의 정서라 했다. 우리의 정서는 어린아이나 노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긴, 처음 듣는 민요 가락에 어깨가 덩실거리고 '얼쑤'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건 보고 배운 게 아니지 않던가. 말이 나와 말이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만큼 가무에 능한 민족이 몇이나 될까. 한도 많고 흥도 많은 민족 아니던가.

2008년 5월 11일에 있었던 고구려밴드 2집 광부(光夫) 기념 콘서트 현장
▲ 상상마당 공연 2008년 5월 11일에 있었던 고구려밴드 2집 광부(光夫) 기념 콘서트 현장
ⓒ 박봄이

관련사진보기


강원도 정선에 뿌리를 두고 한민족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아라리와 젊음의 열기가 후끈 뿜어지는 록.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소리를 접목시켜 '아라리 록'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 낸 고구려 밴드. 그들은 이미 창작국악경연대회의 수상과 국악 한마당의 출연 등 수많은 경력이 있었고 벌써 10여 년 동안 고집스럽게 아라리만을 지켜온 팀이다.

"내가 정선 놈이고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게 아라리니까 고구려밴드의 뿌리도 정선 아라리가 되겠지요. 또 아라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 좋은 소재들을 그냥 묵힌다는 게 아까웠어요. 소리꾼들이 만들어 낸 소리가 아닌 민초들이 제 삶에서 만들어낸 가락과 가사로 이루어진 음악입니다. 세상에 이만큼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 수 있는 가락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단순히 아라리를 오래된 소리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 후대의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그 아이들도 잊지 말아야 할 우리 핏줄의 소리라는 걸 알려야지요."

 고구려 밴드 - 아라리 (2004년 창작국악경연대회 가요부문 금상 수상곡)

대중에 다가가는 '우리의 소리'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는 명년(明年)이면 피지만
한번 가신 우리님은 언제나 오나.

나비없는 강산(江山)에 꽃은피어 무엇을 하며
님이 없는 이 강산에 돈 벌어 무엇허나.

명사십리(明沙十里)해당화야 꽃진다고 슬퍼말아라
공동묘지(共同墓地) 가신 낭군은 명년(明年)에도 못온다.

부령청진(富嶺淸津) 가신 낭군은 돈이나 벌면 오잔소
공동(共同) 산천(山川)에 가신 낭군은 언제나 오나.

- 정선 아리랑 무상편(미망) 중에서 (정선 아리랑 전수회)

우리 민족의 한과 해학, 그리고 삶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아라리는 약 600여 년 전, 조선 초기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며 힘겨울 때에나 흥겨울 때에나 언제나 민초들의 곁에서 숨 쉬며 그 생명력을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아라리는 구시대의 타령 혹은 라디오 방송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와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들을 법한 낡은 소리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소리꾼들이나 소수 문화예술인들이나 부르는 소리라 여겨지며 공중파나 대중들 앞에선 꽁꽁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다만, 몇몇 대중음악인들이 현대음악과 접목을 시도하고는 있으나 이 또한 '일회성 시도'에 그치고 마는 실정이다. 이는 음악인들이 실험성이나 예술성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대중성은 간과한 까닭이 아닐까.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고구려 밴드와 함께하는 뮤지컬 '아리·달이·별이'(출처 :고구려밴드 공식 팬카페(http://cafe.daum.net/koguryoband))
▲ 뮤지컬 '아리·달이·별이'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고구려 밴드와 함께하는 뮤지컬 '아리·달이·별이'(출처 :고구려밴드 공식 팬카페(http://cafe.daum.net/koguryoband))

고구려밴드는 이러한 한계성을 뛰어넘기 위해 작은 클럽 공연에서부터 문화행사 그리고 뮤지컬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아라리를 전파중이다.

특히 극단 무연시와 함께 하는 뮤지컬 통일총체극 '아리랑고개 너머'(극본·연출 김도후)의 음악감독과 출연을 겸하고 있다. 이 작품은 아리·달이·별이 세 자매가 부르는 아리랑을 통해 우리 민족이 고난과 분단을 넘어 통일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내용으로 고구려 밴드가 추구하는 평화 그리고 백성들의 해방과 그 의미가 맞닿아 있다.

MB 선거 유세 곡 거절, 민초들을 위한 소리가 아니라면...

 고구려 밴드 - 조국찬가

이길영씨가 편곡한 2006년 독일 월드컵 붉은닭 서포터즈 공식 응원가 <조국찬가>. 우리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곡이다.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측에서 조국찬가를 선거 유세곡으로 사용하고자 연락이 왔고 이를 단칼에 거절한 사연이 알려지기도 했다.

흔치 않은 장르의 음악을 하면서 쫓기는 생활에 만만치 않은 금액이 걸린 제의를 거절하기 쉽진 않았을 텐데 라며 운을 띄우자 현재 고구려밴드와 '안치환과 자유'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는 서민석씨가 목이 탄 듯 탁배기 한 잔을 냉큼 들이붓고 이렇게 말한다.

"사실 조금… (웃음) 돈이 적어서 거절한 거면 더 준다고 하기도 하더라만… 그 돈 받았으면 하고 싶은 음악도 편히 하고 공연도 부담 없이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말이지, 우리 음악은 아라리고 아라리는 소박한 꿈의 상징인데 그런 아라리 록을 하는 우리가 정치하고 연관된 색을 갖는다는 게 싫었던 거지요. 서민들 시름 달래는 잔치판이나 차라리 굿판이라면 몰라, 선거나 정치는 아니지. 안 그래요?"

이들은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바보'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몇 푼 안 되는 '눈먼 돈'일 뿐일 텐데 모른 척 받으면 좋지 않으냐고. 이길영씨는 특유의 걸쭉한 강원도 사투리로 대답한다.

"이래 살아도 가랑이 찢어지고 저래 살아도 가랑이 찢어지는 건 마찬가진데 기왕이면 뱃속은 편한 게 낫잖아요. 고구려 밴드의 음악 자체가 서민들, 노동자들, 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음악인데 거 꼴랑 몇 푼 받아 먹겠다고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봐, 그게 얼마나 웃겨.'

고구려밴드는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며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진실을 외면하는 그들에게 2집 수록곡 중에 '엄마야 누나야'라는 곡을 들려주고 싶다고 한다. 그들도 어린 시절엔 권력과 황금 따위보단 엄마, 누나와 손잡고 뛰어놀던 고향의 꽃밭이 더 소중했을 것이라며….

 고구려 밴드 - 엄마야 누나야

그리고 이들은 진흙탕 속에서 함께 뒹구는 내 이웃, 내 친구들이 가장 소중한 이들이라 말한다. 그래서인지 고구려 밴드의 곡들 중엔 오늘 날 우리의 현실을 그려낸 음악들이 많다. 목줄이 타는 막막한 현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 뿌리쳐야 할 유혹도 많아 두눈 질끈 감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현실에서 함께 살지만 결코 땅 위에 발 디디지 않는 천상계 사람들에 대한 풍자.

"저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퍼덕퍼덕 날개 짓하는 분들이 우리 소리나 한번 들을라나 몰라. 그 양반들한테 대놓고 욕을 하면 싸우자는 것 밖에 안 되고, 음악 하는 사람들은 음악으로 얘기해야지요. 엿 먹을 짓을 하면 예끼 분들, 엿 잡수소~ 하고 천한 소리 지껄이면 개소리는 천하구나~ 하면서 우리끼리 알아듣고 웃는 거지 뭐."

☞ 고구려 밴드 - 개소리는 천하다

그들이 아라리를 놓지 않는 까닭은 비단 전통문화 계승의 거창한 사명감만은 아닐 것이다. 고구려 밴드는 아라리로 우리 이웃의 삶에 깊은 애정을 갖고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시름을 나누고 싶다고 한다. 2집 앨범 광부의 타이틀처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광부(鑛夫)가 아닌 광부(光夫)가 되는 그날을 위해 눈앞에 보이는 빛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말이다.

"영웅이 없는 시대, 희망이 없는 시대의 우리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채로 살아갑니다. 매캐한 매연이 가득한 2008년의 대한민국은 막막한 어둠에 놓인 탄광의 모습과 닮아있고 우리는 위태위태한 탄광촌의 광부와 다르지 않지요. 멀리 보이는 희미한 빛을 향해 쉼 없이 걷는 이 시대의 광부들 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 어둠이 끝나는 날 만나게 될 찬란한 빛을 알기에 또 이 고단한 걸음을 멈출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고구려 밴드 - 광부(光夫)

'고구려 밴드'를 말하다
- 음악평론가 임진모 <토종 리듬과 언어의 실험- 국악 록의 진화> 중에서
고구려 밴드 프로필
▲ 고구려 밴드 프로필 고구려 밴드 프로필
ⓒ 고구려 밴드

관련사진보기


▲ 아우라지 뱃사공 고구려 밴드의 2집 수록곡 '아우라지 뱃사공' 뮤직비디오
ⓒ 고구려 밴드

관련영상보기


'아라리 록'이라 스스로 이름붙인 이들의 음악은 국악을 바탕으로 한 그야말로 토종이다.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에 록의 응축된 에너지를 장착하여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소리들을 뽑아낸다. 메탈과 하드록의 포맷에 국악 사운드를 결합한 1집 '주색만찬'을 업그레이드 하여 신보 '광부'는 국악의 숨결을 보다 더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밴드 사운드에 중점을 두고 물리적 크로스오버의 요소는 줄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해금이나 가야금, 태평소 같은 국악기를 굳이 쓰지 않고서도 양약기로 우리의 리듬과 박자를 구현해냄으로써 관습적인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이러한 도약은 기타로 거문고나 가야금 소리를 모방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기타의 서스테인을 메워주는 키보드의 사용으로 가능해졌다. 기타의 거친 연주에 더해진 키보드의 비중 제고로 훨씬 입체적인 소리를 구현한 곡 '아우라지 뱃사공'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지향은 순수하나 그 접근방식은 영리한 셈이다.

보컬 이길영의 판소리 창법과 메탈의 속도감 있는 진행이 만나 신선한 청취경험을 선사했던 처녀작 '주색만찬'은 분명 좋은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최신 사운드를 부지런히 쫓아가도 시선이 차가운 대중음악 시장에서 이들의 투박한 사운드가 자칫 일회성 기획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들 음악에 대한 자부와 긍정적 에너지로 그런 척박한 음악계 현실을 돌파한다. 두 번째 앨범을 우리에게 툭 던진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승점을 올린다. 고리타분한 수식일지는 몰라도 진정성이란 어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노래는 '진실로' 진실하다. 토해내는 단어들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또한 한없이 따스한 애정으로 범벅되어 있다. '훈음'이다.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은 욕쟁이 할머니의 욕처럼 이들의 호통에는 풀뿌리 같이 질긴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는 저질 호통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빛을 내는 광부(光夫)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타이틀곡 '광부'가 말해준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어찌됐든 삶을 이어나가는 보통사람들에게 끝까지 희망을 전하는 끈기야말로 진정한 휴머니티가 아닐까.

- 고구려 밴드의 2집 앨범에 실린 임진모씨의 평론입니다.  

덧붙이는 글 | 취재에 협조해주신 고구려밴드 공식 팬카페(http://cafe.daum.net/koguryoband) 회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태그:#고구려밴드, #아라리, #정선아리랑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