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대한민국과 <인디아나 존스>

 

 2008년 6월 1일 새벽 대한민국 서울

2008년 6월 1일 새벽 대한민국 서울 ⓒ 이희동

 

내가 개봉과 함께 봤던 영화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5월22일 개봉)을 다시 떠올린 것은 생뚱맞게도 지난 1일 새벽 경복궁 옆 동십자각 거리에서였다.

 

주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낄낄거리며 작은 촛불을 들고 어두운 밤을 밝히고 있던 그날 밤. 갑자기 전방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수압의 물대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설마설마 하고 있던 나 역시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맞닥뜨린 경찰의 물대포. 충격이었다. 그 퇴행적인 행태 앞에서 나는 도대체 내가 몇 년도를 살아가고 있는지 되묻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지나간 유행가 가사마냥 80년대를 기억해 내었다. 비록 내가 직접 뛰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기록을 통해 보고 들었던 바로 그 엄중한 시대가 퍼뜩 떠오른 것이다. 2008년도에 다시 보는 쌍팔년 대한민국.

 

결국 그 말도 안 되는 광경 앞에서 내가 영화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를 떠올린 것은 시대착오적인 현실 때문이었다.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는 디지털 시민 앞에서 2008년도에 어울리지 않는 80년대식 대응방식을 자랑하는 권력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향수만을 믿고 변한 거 하나 없이 당당하게 돌아온 <인디아나 존스>와 닮은꼴이었다.

 

세상은 이미 너무도 달라졌는데 예의 그 음악소리와 중절모 그림자만을 전면에 내세우며 귀환한 <인디아나 존스>. 유감스럽게도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나의 느낌은 '이럴 줄 알았으면 <인디아나 존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만을 고이 간직하고 있을 걸'하는 후회였다. 과연 무엇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레퍼토리를 시대착오적으로 만들었을까?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인기

 

<인디아나 존스>의 귀환 시대착오적인 귀환

▲ <인디아나 존스>의 귀환 시대착오적인 귀환 ⓒ 파라마운트

지난 시절,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가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냉전체제 속에서 상상의 폭이 제한되었던 그 시절.

 

소위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장르로 묶여지곤 했던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호기심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80년대, 하나의 현상이었다. 경제적 부가 축적되면서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일탈을 꿈꾸기 마련인데, 사라진 문명을 찾아나서는 모험은 기존의 역사를 전복하고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당시 어린이었던 세대에도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세대의 많은 이들은 만화영화 <태양소년 에스테반>을 보며 마야·잉카·아즈텍 문명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으며, 나중에 어른이 된다면 그 궤적을 따라 세계 여행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아직도 눈에 선한 황금 콘도르의 매력.

 

개인적으로는 나의 꿈도 역시 고고학자였다. 물론 유럽에서도 고고학이란 왕실이나, 귀족집안에서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이들이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이후 꿈을 접게 되었지만, 이는 대학시절에까지 영향을 미쳐 내가 인류학과 사학을 공부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고고학은 나의 시선이 한반도를 벗어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였으며, 동시에 현시대의 시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비록 현실의 벽에 막혀 고고학자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깊은 정글 속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유적을 찾아내는 것을 막연하게 꿈꾼다. 그것이 바로 내가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볼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이유였다.

 

식어버린 고고학의 열정

 

그러나 이와 같은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동경은 시대가 흐르면서 바뀌어갔다. 과거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열정이 예전과 달리 식어버린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과학의 발전이 역사학에 끼친 영향과 관련이 깊다. 과학의 발전이 기존의 많은 신화를 역사로 치환시킴에 따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그 여백을 실증적인 역사가 채우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고대 이집트와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는 불가사의로 거론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유적이 아니라 역사의 수직적인 발전 단계에 있어서 하나의 예외일 뿐이다. 현재 우리의 역사관으로 합리적인 설명이 힘들 뿐, 수직적 발전론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할 일이란 그 불가사의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이론을 연구하는 일 뿐이다.

 

고고학과 신비주의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디아나 존스

▲ 고고학과 신비주의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디아나 존스 ⓒ 파라마운트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화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 예전과 달리 외계인을 그 주요 모티브로 삼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결국 해석할 수 없는 불가사의의 배후에 외계인을 상정한다는 것은 예전처럼 고고학만으로 현재의 관객을 열광시킬 수 없음을 인지했다는 것이며, 최근 관객에게는 외계인과 같은 초자연적인고 신비주의적인 접근이 오히려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고학보다 신비주의적 접근을 내세운 <인디아나 존스>의 변신은 현시대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충분한 시간과 열정, 끈기를 필요로 하는 고고학은 먹고 사는 것이 점점 각박해지는 이 시대에 사치스러운 학문인 반면, 끊임없이 제기되는 '외계인론'은 음모론에 가까운, 한 방에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전지전능하고 간편한 설명체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외계인론'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을 신의 역사하심으로 설명하고 마는 종교와 비슷한 논리 체계로서 불안정한 현 세태를 투영하는 것이다.

 

2008년 <인디아나 존스>의 한계

 

그러나 문제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그 신비주의적 접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미국의 로스웰 사건 등을 언급하며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활동하는 1950년대와 신비주의를 연결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억지스러운 설정일 뿐이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캐릭터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미개한 족속과 대비되는 합리적인 백인 남성으로 형상화 된 이상, 갑작스러운 외계인 타령은 지금까지 쌓아 온 고고학자의 합리적인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다. 그는 SF물 보다는 모험 활극에 어울리는 그런 캐릭터인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바탕 그렇다고 오리엔탈리즘을 모두 버릴 수는 없다

▲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바탕 그렇다고 오리엔탈리즘을 모두 버릴 수는 없다 ⓒ 파라마운트

인디아나 존스 역의 해리슨 포드 이젠 활극의 액션을 맡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뵌다.

▲ 인디아나 존스 역의 해리슨 포드 이젠 활극의 액션을 맡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뵌다. ⓒ 파라마운트

 

게다가 안쓰러운 해리슨 포드의 액션 연기를 보라. 나이 앞에 장사 없다고 그의 액션은 더 이상 과거의 경쾌하고 재치 있던 그것이 아니다. 그의 둔탁한 채찍질과 나이에 맞지 않는 과도한 맷집은 눈높이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현재 관객에게 유치한 장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편이라고 무조건 말도 안 되게 이기는 시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던가.

 

결국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말도 안 되는 액션과 뜬금없는 외계인 타령은 2008년 디지털 시대에 잘못 귀환한 1980년대식 <인디아나 존스>의 눈물겨운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내용의 현실성을 떠나 <인디아나 존스>라는 깃발만 꼽으면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안일한 인식의 결과이다.

 

감독은 <인디아나 존스>를 사랑했던 이들의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흘러간 옛 추억을 끄집어내려 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욕심일 뿐이다. 흘러간 옛 이야기를 현대의 맥락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기존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가져감으로써 구태의연해진 것이다.

 

돌아온 악당, 붉은 군대 오랜만에 만난 냉전 시대 악당

▲ 돌아온 악당, 붉은 군대 오랜만에 만난 냉전 시대 악당 ⓒ 파라마운트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악당 역의 소련군이 최고가 아니었나 싶다. 나치군을 이어 강력한 악당의 역할을 해주는 붉은 군대.

 

영화에는 냉전 체제 속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언제나 강력한 악의 무리 역을 소화해 주었던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핵실험이 빈번하고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착한 역을 무난히 소화할 수 있었던 80년대 비결은 바로 그들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비교한다면 최근 할리우드의 악역을 도맡는 중동의 테러리스트나 독재자들은 너무도 미미한 존재가 아닐까?

 

현재 영화 <인디아나 존스>는 그럭저럭 흥행을 이어나가고 있다. 부잣집이 망해도 3년은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직도 그 아련한 향수를 잊지 못한 많은 이들과 신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자 하는 이들이 영화를 찾기 때문인 듯싶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귀환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2008년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물대포를 쏘며 촛불 든 시민들을 "실업자"에 "사탄"이라 부르짖는 현 정권만큼이나, 영화 <인디아나 존스>는 이 시대를 너무 만만하게 본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6.17 15:44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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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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