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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세는 자기 성격의 결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저질과 위선을 똑같이 경멸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못 참는 것은 저질이 고질인 체하거나 위선이 선으로 인식되는 환경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잠시도 참으며 앉아 있지 못했다. 그는 ‘솔직한 악’은 참고 보아 줄 수 있었지만 ‘기만적인 선’에는 지나칠 정도로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는 차츰 그를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성(城)을 견고히 쌓고 그 안에서 옹송그리는 폐쇄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런 분위기에 드는 것을 지레 두려워하게 되었다.

김영세는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는 스스로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날은 1월 2일이었다. 양력설을 쇠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초였다. 그는 정초를 잡친 기분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기분은 좀처럼 전환되지 않았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자꾸만 떠올려졌다. 위장된 애국자들은 계몽주의자들 가운데 현저히 많은 게 사실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서구 문물에 대해 근거 없는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일본 유학 출신자들이 더 그랬다. 그들이 서구 문물을 동경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류일수록 이유 없이 우리 것을 폄하하는 경향이 심했다.

김영세는 고창고보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가 교사로 근무하는 것은 순전히 생계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달리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제 조카 문수가 서울에 유학 가는 새 봄부터 그는 그 일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조카 문수의 보호자였다. 그의 형 김영호는 그에게 아들을 맡기고 만주로 떠난 지가 벌써 10년이었는데 지금은 생사조차 감감했다. 형이 떠난 지 5년 후에 형수가 폐렴으로 죽었다. 어쩔 수 없이 김영세는 조카 문수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만약 조카가 없었다면, 그는 필경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나 독립군 부대가 있는 간도에 가 있었을 터였다.

조카가 서울로 간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카에게 학비와 생활비는 대줘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문수도 15세의 고보생이었다. 문수는 이제 같이 데리고 있지 않아도 될 나이였다. 마침 문수도 서울 유학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제 조카에게는 경제적으로만 도움을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신학기부터는 평소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독립운동의 꿈을 버리기까지 많은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자기마저도 문수를 두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독립운동도 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하는 거라고 그는 스스로를 변호해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그는 다시 희망을 품었고 올 봄부터 그 일을 착수하려고 준비해 오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서울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총독부에서 주관한 물산공진회에 구경 간 적이 있었다.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장에서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선의 대표적 왕궁이었던 경복궁의 이상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의 문화재에 특별히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역사 교사로서 필요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게 된 경복궁은 그가 알고 있던 조선의 왕궁이 아니었다. 근정전 내부는 물론 수많은 전각과 누각들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집에 돌아와 문헌과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결과 그는 조선의 왕궁이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어 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경복궁이 그렇다면 다른 문화재들도 그에 못지않게 훼손되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조카 때문에 조선을 떠나지 못할 바에야 국내에 남아 일본의 문화 침탈을 막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몇 년째 조선의 문화유산을 연구해 오고 있었다.  

그들 형제의 기질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영세의 할아버지는 광산 김씨로 과거 초시에 합격한 진사였다. 진사 정도로 청렴하다는 평을 들었으니 더 이상의 벼슬은 과욕이라며 그는 서당을 차려 마을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그가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 한심했던지 상민들의 결사체인 동학군의 접장을 맡았다.

김영세의 할아버지는 일본군에게 잡혀가 목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영세의 아버지는 면회를 갔다가 오만하게 구는 일본 군인의 턱을 긴 담뱃대로 건드리며 호통을 쳤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를 면회하기는커녕 그 길로 일본군에게 끌려 들어가 다음 날 피투성이가 되어 나왔다. 그로부터 김영세의 아버지는 서서 걷지 못했다. 일본 군인은 그를 반신불수로 만든 것이었다.

며칠 후 삼촌과 조카는 소쇄원을 향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책은 구했느냐?”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그러고 보니 어제 조카가 와서 무슨 말인가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필 그때에도 김영세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조카에게 좀 쑥스러웠다.

“내가 또 뭔가를 생각하다가 네 말을 못 들었나 보구나.”
“삼촌이 찾으셨던 책은 서점에 없어서 주문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제 영어 참고서를 한 권 사왔습니다.”
“지방 학생들이 서울 학생들에 비해 외국어가 많이 부족하다고 하더라.”

그들은 산길을 쉬지 않고 올랐다. 추운 날씨였지만 이마에 땀이 배고 있었다. 그들이 계곡을 따라 한참 더 오르자 대나무 숲길이 나타났다.

“거의 온 것 같구나. 너 소쇄(瀟灑)란 말이 좀 생소하지?”
“네.”
“잘 쓰이는 말은 아니지. 그저 맑고 깨끗한 뜰 정도의 뜻으로 알면 된다.”

소쇄원은 전라남도 담양 남면에 있는 산속 정원이었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정원을 만들 때 인위적으로 꾸미는 일을 경계했다. 계곡의 산자락에 누각이나 정자를 지어 자연 그대로를 정원으로 삼았다. 그러기에 정원이라 하지 않고 원림이라는 말을 썼다. 원림이란 자연 상태의 숲과 동산과 계곡을 적절히 가꾼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16세기 조선의 학자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였다. 그는 사회 개혁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충격을 받는다. 그는 순수하고 명민한 사람의 현실 참여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눈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아니면 그는 삶의 허무를 느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고향인 이곳에 집과 원림을 만들었다. 그는 세상을 멀리 하고 숲과 계곡을 벗하는 은둔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삼촌과 조카는 약간 경사진 오솔길을 걸어 올랐다. 좌우에 빼곡한 대나무 숲이 있었다. 여름이라면 그늘과 바람을 만들어 주는 숲일 터였다. 숲길을 지나자 마침내 왼쪽 계곡 위에 소쇄원이 나타났다.

김영세는 나귀를 탄 동자가 소쇄원에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 보고 있었다. 동자의 눈앞으로 네모난 연당이 나타난다. 그 위로 바위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 작은 폭포, 그리고 물레방아가 보인다. 동자의 나귀가 좀 더 앞으로 가면 다시 작은 연못이 나오고, 그 옆 축대 위에 초정이 있다. 초정은 찾아오는 손님을 길섶에서 맞이하는 운치 있는 정자였다.

건너 계곡 축대 위에는 광풍각이 있고 그 위로는 제월당이 있다. 청량한 바람과 신비로운 달을 ‘광풍제월’이라고 일렀다. 광풍각과 제월당은 이것에서 딴 이름이었다. 제월당 주변은 각종 꽃나무가 심어진 화단이었다. 위아래 언덕으로는 ㄷ 자로 둘러쳐진 맞담과 오곡문이 있었다. 소나무, 대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들로 이루어진 숲은 말 그대로 ‘원림’이었다.

삼촌과 조카는 광풍각 앞에서 아래로 팬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계곡물은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물은 바위를 타고 구불거리며 통나무 귓대를 지나 소나무 뿌리를 적시면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계곡물은 다시 움푹한 바위에 고여 있다가 물이 넘치게 되면 그 아래로 작은 폭포를 만들며 떨어졌다.

낮이건 밤이건 물소리와 바람 소리는 맑고 깨끗하게 들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달을 한 번씩 올려다보는 삶이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아무튼 소쇄원은 아름답고 격조 있는 문화유산임에 틀림없었다.

“문수야, 저기 계곡 맨 아래를 보아라.”

김영세가 가리킨 곳은 계곡 바닥이었다. 그곳은 멀리서 내려다보면 작은 배처럼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정말 작은 배처럼 보이는군요.”
“저 아래에서 위를 보면 어떨까?”
“?…….”
“저곳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계곡에 바짝 다가선 석단이 푸른 물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뱃머리처럼 보이게 되어 있단다.”

문수는 말없이 계곡 아래를 보고 있었다.

“장차 어떤 전공을 택하려 하니?”
“삼촌처럼 역사를 전공하면 어떨는지요?”
“내 생각은 다르다. 너는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과학을 하면 좋을 듯싶다.”
“왜 그렇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너한테 맞을 것 같아서다.”

김영세는 조카를 자기 형제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성장한 그들은 삶에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미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청춘을 흘려보냈다고 여기고 있었다.

“서울에 가거든 책도 읽고 음악이나 그림도 감상하는 삶을 살아 보아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예쁜 처녀들도 만나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삼촌과 조카는 마주보며 웃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해 보고 싶어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소쇄원, #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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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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