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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가에 장난기가 가득 서려진 개구쟁이 병철이가 연신 바나나를 도시락 위에 얹어준다.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지만 마주치는 눈빛만으로도 마음은 그들과 이미 통해 있다. 조막만한 손이 따뜻한 사랑을 전해주면 그것을 받아든 거칠고 뭉툭한 손들에 작은 떨림이 전해진다. 길게 늘어선 줄은 병철이에게 바나나를 받는 의례(?)를 통과해야 비로소 일주일 간 기다려 온 사랑이 깃든 밥 한 끼 먹을 준비를 마치게 된다.

 

"고맙구나."

 

꾀죄죄한 겉모습의 노숙자 아저씨도, 반쯤 눈이 풀린 마약 중독자도, 남편 없이 아이를 기르는 미혼모도 오늘을 기다려 한 걸음에 달려와 병철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어린 병철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고귀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천진난만하게 힘들다는 불평 없이 마지막까지 임무를 완수한 녀석은, 마음을 나누는 천사에서 다시 철부지 어린 아이로 돌아간다.

 

이들은 일주일에 딱 한 번 따뜻한 밥을 대한단다. 그렇기에 한 수저 뜨는 것에도 한 모금 마시는 것도 남기지 않는다. 나라에서 그들에 대한 복지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그들은 마약 중독자, 노숙자 등으로 행정관리의 선 밖으로 벗어난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을 위해 몇 해 전부터 멕시코 한인 교회에서 팔을 걷어 붙였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지 않고 작게나마 자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봉사하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어느 누구도 반찬이 형편없다고 (사실 정말 좋은 재료를 써서 맛있게 제공된다) 투덜대지 않는다. 식탁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먹는 가족에게서 단출한 평안이 느껴진다. 또 초라한 행색으로 혼자서 먹는 이를 보면 그가 겪었을 회환에 대한 연민이 눈동자를 스친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오히려 미안한 마음에 멋쩍은 웃음만 보이고는 시선을 돌린다. 불현듯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누군가를 위해 진정으로 나누지 않고 있구나.'

 

불필요한 소유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더욱 내 것을 포기하고 나눠줄 수 있는데도 적당한 선을 그어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는 식으로 나를 합리화한 것이다. 어쩌면 봉사라는 잘 포장된 간사함으로 사랑으로 품어야 할 대상의 평온보다 괘씸하게도 내 자신의 만족을 우선으로 찾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떳떳하게 두 팔을 벌려 그들을 안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꽃으로 치장한 내 안에 숨겨진 가시가 너무 많다.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을 텐데 세상은 가끔 그들의 의지로 버티기보다 더욱 세차게 인생을 부수어 버릴 때가 있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해 버린 그들은 거칠고 추운 세상으로부터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단 한 번 누군가의 격려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방인이 해 줄 수 있는 토닥거림이 겨우 이 밥 한 끼뿐이니 돕는 손길도 어쩐지 아쉽기만 하다. 이상주의의 더욱 이상적인 생각이라도 부디 언제가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이 지금의 상황을 훌훌 털어버리고 멋지게 재기할 수 있기를. 받는 인생에서 주는 인생으로 멋지게 터닝 한 인생이 되기를….

 

병철이는 내내 여기저기 휘젓고 다닌다. 녀석이 활개 치는 자리마다 사랑의 온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녀석이 어른이 된 다음에도 지금보다 더 넓은 곳을 사랑으로 휘젓고 다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성장하기를 빌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변화를 생각지도 않고 어린 아이에게 미래의 장밋빛 퍼즐을 끼워 맞추기 위한 모든 짐을 떠넘기는 단작스러운 내가 한심해 보였다. 언제쯤 나는 스펀지처럼 그들의 옹송그린 아픔과 무관심에 덧씌운 탁한 희망을 진정 내 가슴으로 빨아들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자전거 여행, #세계여행,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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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비전노마드, 지구를 순례하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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