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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자리에 참석한 학생들 사이에 촛불 문화제 참석 적발 시 귀가조치한다는 문자가 돌고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이곳에는 학생들을 찾으러 나오신 많은 교사분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여러분, 학생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옳은 선생님이라면 이 아이들의 행동을 나무라고 귀가조치 하시기보다는 함께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교육 아니겠습니까."

 

5월 6일 청계천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교복차림의 많은 학생은 다가오는 취재진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도 혹시나 얼굴이 잡히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 주춤거렸다. 이미 학생들 사이에선 '적발 시 귀가조치'라거나 '불법집회 징계' 등의 문자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요즘 세상에 겁날 게 없는 10대라지만 학교의 말이라면 끔뻑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신분이기에 그러한 문자에 동요하지 않을 수는 없는 터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러한 걱정을 불사하고서라도 자리를 지킨 까닭은 어쩌면 태어나 처음 맞는 '위기의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기자요? 어디 기자이신지 먼저 말씀해 주세요!"

 

당돌했다. 수많은 취재진 사이에서 그나마 비슷한 연령대라고 우기고 싶었던 내가 한 여학생 무리로 다가가 질문을 던졌을 때 대답 대신 돌아온 말은 바로 기자의 '소속'에 대한 질문과 경계심이었다.

 

"언니! 어디 기자신데요? <조선일보>랑 <동아일보>면 말 안 할래요!"

 

허! 잠시 멍한 상태로 3초간 대답을 못하자 아이들은 당돌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며 당장에라도 싸울 태세다. 10대들의 뻗치는 기에 눌린 나로선 어찌 됐든 대답을 해야 했다.

 

"어… 응, 언니는… 거기 아니야. 저쪽에 있는… <오마이뉴스>야. 오마이…."

"그럼 질문 하세요. 키키키."

 

녀석들, 뭘 알면서 이러는 건가?

 

"너희 왜 그 신문사들에는 인터뷰 안 하려는 거니?"

"거기는요… 음… 아, 맞다! 노무현 아저씨가 대통령일 때는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지 않다고 해놓고 2메가(아이들 사이에선 이명박 대통령을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가 대통령 되니까 금세 말 바꾸잖아요."

"저희도 매일 뉴스 보거든요, 다 알아요. 딴나라당도 그랬어, 맞지?"

"맞아, 맞아."

 

이미 어른들만큼 많은 뉴스를 읽고 달려온 아이들이기에 달리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사이 MBC 취재 차량이 현장으로 들어왔고 아이들은 '미친 소 개방'의 문제점을 다룬 <PD수첩>에 대한 고마움이었는지 환호성을 질러댔다.

 

 

"학교에선 분위기가 어때?"

"선생님들도 하시는 말씀이 다 달라요. 대부분 선생님들은 저희랑 같이 걱정하시는데 어떤 선생님들은 너희가 뭘 알고 소란이냐고 하기도 하시고요, 오늘도 촛불 들고 나오는 녀석 발견되면 바로 귀가조치시킬 거라고 하셨어요."

 

교사들도 그들만의 고충이 있을 터였다. 어찌 됐던 무한경쟁체제의 세상 속에서 시간을 쪼개 아이들에게 '미친 소를 저지하러 나가자!'라고 외쳐야 하나 그들도 고민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역시나, 녀석들은 이미 그 속까지 꿰뚫어보는 눈치다.

 

"그래도 선생님들도 대한민국 사람들이잖아요. 봐도 모른 척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또 은근히 지지해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시거든요."

 

촛불아 모여라!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시청 일대는 촛불 문화제에 참석하려 달려온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작정을 하고 퍼포먼스를 준비한 이들부터 계획에 없이 길가다 자리를 펴고 앉은 행인들까지 그들은 모두 오렌지빛 촛불을 하나씩 나눠 밝히며 질서정연하게 하나의 구호를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 사이사이 자리 잡은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들,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따윈 전혀 관심도 없을 것 같던 10대들이 이 차가운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른으로서 짠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학생들, 안 추워? 여기 신문지 깔고 앉아."

 

교복이라는 것이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입을수록 괴로운 옷이 아니던가. 봄이라지만 아직은 쌀쌀한 날씨,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아버지 한 분이 갖고 있던 신문지를 나눠 주시며 푸념을 하신다.

 

"아, 애들이 뭔 죄여. 한창 공부할 애들까지 길거리로 끄잡아 내서 이 지랄을 펴야겠어? 어른이 왜 어른이여, 이 애들 지키는 게 어른 아니여. 이게 무슨 4·19도 아니고 학생들이 얼마나 속이 답답허면 여기까지 달려나왔겠어!"

 

하나 둘 촛불이 늘어가며 수많은 인파가 자리를 잡았지만 우려했던 과격폭력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과 시민들은 침착했고 냉정했다. 문제의 본질에 대해 결정권을 쥔 그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정치세력에 이끌려, 혹은 떠도는 말에 혹해서 우왕좌왕해댄다는 억측은 그야말로 그들만의 억측일 뿐이었다.

 

"며칠 전 뉴스에서 우리가 촛불시위 참가하는 게 무슨 세력이 조종해서 그럴 거라고 했다던데요? 인터넷만 들어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아요. 우리만큼도 인터넷을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을 하나같이 바보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어른들 시대에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멍청하게 기사 한두 개 읽고 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자기가 생각해서 위험하다 판단되니까 이러는 거지요."

 

미친 소를 차고 달리는

앞이 없는 미래는 끝나야 한다

나는 살고 싶다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 이제 더는 부끄럽게 살지 않으리

아이들의 해맑은 눈망울 앞에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리

 

이 작은 촛불을 밝혀 들고

미친 소를 넘어 대운하를 넘어

끝없는 불안과 절망을 넘어

한걸음 더 희망 쪽으로 손잡고 나아가리

 

촛불아 모여라

촛불아 모여라

 

- 박노해 <촛불아 모여라> 중에서

 

 

무능력한 어른들이 짓이겨놓은 세상을 바로잡으려 아이들까지 선봉으로 내몰아야 하는 개탄스러운 현실을 무엇으로 사과해야 할까. 그 아이들이 자라서 과거를 돌아볼 때, 우리는 어떤 어른들로 기억될까.

 

그들에게 우리가 물려줄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언니, 저희는 아직 20년도 못살았거든요. 엄마, 아빠가 주신 밥 먹고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친구들 만나고 솔직히 세상엔 그게 전부인 줄 알았어요. 어른들이 머리 아프게 정치니 뭐니 얘기를 해도 와 닿는 게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 문제는 대학가서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무서운 게요, 우리가 학교 급식이나 엄마가 지어주신 밥을 먹고 20대 30대에 어느 날 갑자기 광우병이 생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건 사먹고 안 사먹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결정권이 없어요. 어른들은 자기들이 가려서 먹으면 되지만 우리는 정말 아무런 결정권도 선택권도 없다는 말이에요. 내 의지나 내 실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생명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생명을 위해 지켜낼 건 지켜내는 게 어린 저희에게도 의무이자 권리 아닌가요."


태그:#광우병, #미친소, #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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