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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있는 호남의병 유적지. 멀리 회문산 정상이 보인다.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있는 호남의병 유적지. 멀리 회문산 정상이 보인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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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의 고장, 정읍

2008년 3월 10일(월), 내장사 산사 곁에서 잔 탓인지 몸도 가뿐하고 기분도 상큼했다. 여사에 딸린 밥집에서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정읍시내로 갔다. 약속시간 10분 전 정읍문화원 문을 두드리자 김희선 사무국장이 반갑게 맞았다. 인사를 나눈 뒤 차를 마시면서 김 사무국장은 정읍을 소개했다.

정읍문화원 김희선 사무국장
 정읍문화원 김희선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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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은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요, 의(義)의 고장으로 기미만세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인 박준승 선생, 독립투사 백정기 의사 등 국가보훈처에서 서훈 받은 분만 33분이나 된다고 고장을 자랑하였다.

나는 백정기 의사가 귀에 익었다. 기억을 더듬자 3년 전, 우당기념관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함께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를 편집할 때 수록한 인물이었다. 백정기 의사는 아나키스트로 1932년 상하이 사변 직후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특수공작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했던 분이다.

김 사무국장은 나에게 주려고 정읍 안내를 비롯하여 정읍문예지 등, 몇 가지 책을 마련해서 건네주는데 가방이 꽉 차서 사양했다. 그러고는 임병찬 장군 관계되는 부분만 부탁하자 곧 그 부분만 복사해 주었다.

사실 답사 때 짐처럼 짐스러운 게 없다. 나는 답사 길에 기본 휴대품으로, 카메라와 녹음기, 취재노트에, 지도와 안내책자, 경우에 따라서는 노트북, 스캐너 등으로 자칫하면 휴대품을 빠트리기 쉽다. 거기다가 취재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까 가능한 짐은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

이제까지 10여 년 취재 다니면서 크게 실수한 적은 없었는데, 올 초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마리오보르 밤거리에서 취재수첩을 잃어버린 게 가장 큰 실수였다. 나중에 안내책자를 보니까 거기서는 소지품을 조심하라고 하였는데. 뚜껑 없는 주머니에 취재수첩을 넣고 번잡한 거리를 다닌 게 큰 잘못이었다. 사실 그 취재수첩은 나에게는 천금같이 소중하지만 소매치기는 아무 쓸모 없는, 허탕 친 장물이 아닌가. 그래서 그곳의 기행문은 여태 쓰지 못하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임병찬 의병장 무덤과 의병 훈련 터가 있다는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는 거리도 먼 데다가 고도가 높은 곳으로 당신 차로 운행하기에는 무리라고  걱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지형에 알맞은 지프차나 레저용 승용차 기사를 부탁드렸다. 김 사무국장은 전화로 몇 곳을 연락하자 곧 안면이 있는 택시기사를 불렀다.

김개남 장군과 임병찬 장군

김 사무국장은 기사 옆 자리에 앉고 나는 뒷자리에 타고서 가는데 호남의병 유적지는 꽤 멀었다. 김 사무국장은 임병찬 장군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는데,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걸출한 3대 인물인 김개남 장군과 임병찬 장군 사이에 얽힌 비사(秘史)를 얘기했다. 이야기인즉, 임병찬 장군이 김개남 장군을 관에다 밀고하여 체포케 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미처 몰랐던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본 국가보훈처 자료에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마침 자료로 준 <정읍의병사>에 실린 ‘임병찬 장군’ 편에도 자세히 담겨 있다기에 봉투에 든 자료 유인물을 꺼내 살펴보았다.

김개남 장군
 김개남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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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장군
 임병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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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1894년) 겨울,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인물이었던 김개남이 (임병찬이 살고 있던 종송리) 이웃 너듸(四升) 마을 서영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임병찬은 김종섭을 시켜 김개남으로 하여금 더욱 안전한 종송리로 옮기도록 설득하여 같은 마을 송두용 집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전라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했다. 그리하여 이 해(1894년) 12월 1일, 전주에 머물고 있는 강화병방 황헌주에 의하여 잡혀갔다. 1895년 정월, 김개남을 체포한 공으로 임실 군수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관찰사가 쌀 20석을 보내왔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 <정읍의병사> 164~165쪽

이 일이 있은 이후, 임병찬 장군의 임씨 집안과 김개남 장군의 김씨 집안은 대를 이은 원수지간으로, 지금까지도 화해가 안 된 듯하다고 김 사무국장은 얘기했다. 그러면서 임병찬 장군이 포상이 탐나서 김개남 장군을 밀고한 게 아니라, 아마도 서로의 처지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방법이 달랐기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풀이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라가 기울어져 국론이 둘로 나뉘면, 어느 한 편에 서야 하는 슬픈 백성들의 비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이 분들만, 이 시대만 그랬겠는가.

내가 아는 어떤 이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국군으로, 다시 인민군 포로로, 거제포로수용소에 갔다온 이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하에는 동족상잔의 슬픈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이 두 사람의 인생역정도 드라마나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될 듯하였다.

종성리에 있는 호남의병 유적지 조감도
 종성리에 있는 호남의병 유적지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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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을 떠나 30분은 더 달린 끝에 옥정호가 환히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를 한참 올라가자 한말 호남의병 유적지 조감도가 나오고, 곧장 임병찬 창의유적지가 펼쳐졌다. 김 사무국장은 일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곳 창의유적지는 구한말 임병찬 장군이 호남 의병을 훈련하던 곳입니다. 낙안군수를 사임한 임병찬 장군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공자를 모시며 후진을 양성하면서, 한편으로 일제 강점에 대비하여 의병을 훈련하였습니다. 이 일대 모두가 의병들의 의로운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지요.”

오랜 세월로 이제는 지난날의 건물들은 자취도 없고, 다만 그 자리에 ‘고택 터’ ‘흥악재(강당) 터’ 등 표석과 ‘대한독립의군원수부사령총장둔헌임선생지묘(大韓獨立義軍元帥部司令總將遯軒林先生之墓)’라는 비석만 서 있었다. 김 사무국장은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듯, 분명 이곳에 임병찬 장군 묘지가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하면서 주위를 여러 번 둘러보았으나 끝내 찾지를 못하고는 이 마을에 사는 송희정씨 댁으로 안내했다.

임병찬 의병장 창의 기념 표석
 임병찬 의병장 창의 기념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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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태생인 송희정씨는 임병찬 장군의 묘를 후손들이 명당을 찾아 이장한다고 하면서 몇 해 전 회문산 정상 부근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은 산이 워낙 우거져 찻길도 없을 뿐더러 도보 길도 험하고, 별도 하루를 잡아야지 한나절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하기에 더 이상 답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송씨는 당신 집을 황토방으로 꾸며 놓고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받아 도시민들에게 빌려주는 민박도 하고 있었다. 높은 산 중턱이라 공기도, 경치도 좋고, 특히 산 아래 빤히 내려다보이는 옥정호 풍광이 일품이었다. 굳이 다실로 들게 하고는 손수 차를 끓여주며 임 장군과 이 고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답사 길에 얻은 덤

'대한독립의군원수부사령총장둔헌임선생지묘(大韓獨立義軍元帥部司令總將遯軒林先生之墓)'
 '대한독립의군원수부사령총장둔헌임선생지묘(大韓獨立義軍元帥部司令總將遯軒林先生之墓)'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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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택시기사 김완규씨도 합석하였는데, 세 사람은 잘 아는 사이로 주로 나에게 정읍 소개를 하였다. 정읍은 널리 알려진 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혁명가를 많이 배출한 고장이며, 특히 천도교 등 고유 신앙도 성행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김완규씨는 택시기사지만 한학자로 한때는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강사로도 출강했고, 지금은 정읍 시내에다 한문학원도 차려서 운영하는  별난 분이었다.

온 나라가 영어 열풍인데 한문학원으로 밥벌이가 되겠는가. 때를 잘못 맞췄다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분은 한문을 보천교 차경석 교주 아들에게 배운 바, ‘보천교(普天敎)’의 총본산도 정읍시 입안면 대흥리에 있다는 얘기를 하였다.

'보천교', 어린 시절 얼마나 많이 들었던 말인가.  나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보천교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었다. 김완규씨 말에 따르면, 차경석 교주는 원래 동학교도였고, 보천교는 민족종교로서 한창 때는 신도가 100만을 헤아릴 정도로 성행했고, 신도들의 성금을 '독립적립금'이라는 명목으로 걷어 실제로 대부분 독립자금에 쓰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보천교 이야기만 꺼내면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였는데, 그 까닭은 할아버지가 한때 보천교에 빠져 집안 재산을 교단에 다 갖다 바쳐 살림이 기울어졌다고 원망하는 잔소리 때문이었다. 워낙 여러 번 들어 귀에 익은 바, 그 보천교의 실체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이다.

송희정씨가 회문산 정상을 가리키고 있다.
 송희정씨가 회문산 정상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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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좋은 녹차를 그윽하게 마시고 송희정씨의 배웅을 받으며 종성리 마을을 떠나오는데, 마침 당신이 임병찬 장군 묘지 사진이 있을 거라며 찾아서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정읍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완규 기사는 미처 몰라 부탁치도 않은 칠보면 무성리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내려주었다.

내가 호남의병의 마지막 인물로 면암 최익현 선생을 정했다는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당신이 고맙게도 알아서 데려준 것이다. 이 무성서원은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병오(1906)년에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장군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적지였다. 잠시 서원을 둘러보고는 귀가 길에 올랐다.

병오창의기적비
 병오창의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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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번 답사 길은 나에게 할아버지 행적의 의문을 풀어주는 덤을 얻는 소득도 있었다. 집 떠나온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이상하게 국내 답사는 나흘이 되면 더 이상 다니기가 싫어졌다. 내가 사는 강원도 횡성 안흥까지 가려면 최소한 차를 네 번은 갈아타야 그날 중으로 도착할 수 있다.

내 사정을 말하고 정읍시외버스정류장까지 부탁하자 김 기사는 거기로 데려다 주는데 그 새 택시비가 7만원이 넘게 나왔다.

내가 미터 요금대로 지불하자 김완규씨는 굳이 5만원만 받았다. 아무튼 택시비를 깎은 염치없는 사람으로 험한 산길을 편케 오르내리게 해준 김완규 기사에게 두고두고 미안하다. 셔터 한 번 누르지 못한 죄스러움도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부디 한학으로 대성하시기를…….

의병 활동도 그러했겠지만, 의병 유적지 답사도 여러 사람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정읍의병사> <정읍시청 홈페이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홈페이지> 등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태그:#호남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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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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