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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지역의 성범죄자 분포도. 파란색이 성범죄자 거주지
 LA 지역의 성범죄자 분포도. 파란색이 성범죄자 거주지
ⓒ 캘리포니아 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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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을 성추행한 후 살해한 자에게 최소 무기징역을 내릴 수 있는 가칭 '혜진·예슬법'이 제정을 앞두고 있다. 잔인하게 희생 당한 두 어린이를 추모한다는 뜻과 같은 범죄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굳이 희생 당한 어린이들의 실명을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는 다소간의 반대 의견만 있을 뿐, 법률 제정에 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성범죄자 신상공개, 실효성 입증된 적 없어

문제는 이 법안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 확대방안'과 맞물리면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1996년 이웃 남자에게 성폭행 당한 후 살해 당한 7세 소녀 메건 칸카의 이름을 딴 '메건법(Megan's Law)'을 제정했다. 메건법 제정 후 미국에선 누구나 주정부에서 만든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면 성범죄자들의 거주지, 사진, 인적사항 등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성범죄자 신상공개는 미성년 자녀를 둔 학부모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 메건법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로 아직까지 성범죄자 신상공개 이후에 성범죄율이 괄목할 만큼 낮아졌다는 보고가 나온 적이 없으며, 범죄율과 신상공개 제도와의 연관성도 증명된 적이 없다. 오히려 메건법 이후에 더욱 강력한 통제수단인 전자 팔찌 제도가 도입됐을 뿐이다.

지난 2006년 영국에서도 미국의 메건법과 유사한 법제정이 논의됐다. 이때 유력 일간지 <가디언>은 영국의 아동 위원회(Children's Commissioner)의 발표를 인용해 "메건법의 도입은 아이들을 성범죄자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라며 "오히려 감시를 피해 지하로 스며든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위험률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성범죄자 인권은 무시해도 된다?

확대된 지도. 파란색 네모가 성범죄자 거주지.
 확대된 지도. 파란색 네모가 성범죄자 거주지.
ⓒ 캘리포니아 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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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를 클릭했을 때 나타나는 성범죄자의 신상정보
 거주지를 클릭했을 때 나타나는 성범죄자의 신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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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신상공개제도가 또 다른 부작용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홈 뉴스 트리뷴>은 얼굴과 주소지가 적나라하게 공개된 미국의 성범죄자들은 취업이 불가능해짐은 물론, 소위 '자경단원'이라고 불리는 지역주민들로부터 수시로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고 전했다.

결국 사회 복귀가 좌절되고 생계수단이 막힌 성범죄자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범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척되었다는 생각 또한 그들이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갖는 요인으로 작용해 범죄를 부추겼다. 이와 더불어 성범죄자가 다른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이 성범죄의 신상공개 시스템 구축에 드는 비용을 상쇄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신상공개 제도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청소년의 법정대리인이나 청소년관련 교육기관장들만이 관할경찰서를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는 '폐가식' 공개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어린이 성범죄 피해가 늘어나자,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의 메건법처럼 사진을 포함한 자세한 인적사항이 공개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성급한 시행은 보다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주거가 밀집되어 있고, 혈연·지연·인맥 등이 살아가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우리나라의 '공동체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성범죄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위험인자' 혹은 '집값을 떨어트리는 존재'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를 조장할 수 있고, 나아가서 주거권을 박탈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은 성범죄자의 주변인들에게는 자칫 '연좌제'같은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성범죄자 신상공개, 충분한 사회적 논의 거쳐야

한국어로도 서비스되는 캘리포니아주의 성범죄자 신상공개 사이트
 한국어로도 서비스되는 캘리포니아주의 성범죄자 신상공개 사이트
ⓒ 캘리포니아 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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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신상공개 제도가 시작된 지난 2000년에 6855건이던 성범죄 발생건수는 2007년 8732건으로 오히려 27%나 늘어났다. 이 결과만 보더라도 예방 효과를 과신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더구나 오는 10월, 보다 강력한 감시방법인 전자 팔찌제도를 도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신상공개제도를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에 기댄 처사라는 평가다.

물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한 대책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과학적인 사전 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이 제도를 먼저 시행한 다른 나라들의 실증적인 연구결과를 지켜보고,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법률적 검토를 충분히 거친 후에 도입을 논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태그:#메건법, #성범죄, #성범죄자 신상공개, #전자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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