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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임박한 원빈 홍씨. 드라마 <이산>.
 죽음이 임박한 원빈 홍씨.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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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룬다더니…

정승보다 먼저 죽은 것이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세상 사람들은 문상을 간다. 하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은 홍국영 남매의 경우에 잘 부합할 것이다. 

4월 8일 <이산> 제59회에서 보여준 처럼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가 사망하자, 상당히 화려한 장례식이 치러졌다고 정조 3년(1779) 5월 7일자 <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원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정조 임금은 창덕궁 희정당에서 슬픔을 표시하고, 백관들은 선화문(宣化門)에서 슬픔을 표시했다. 조정과 시장의 업무는 5일간 정지되었다.

죽은 지 4일째 되는 날부터 백관들은 천담복(엷은 옥색의 옷)을 입고 파산관(일종의 퇴직 관료)과 성균관 유생 등은 하얀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

또 당나라 비빈(妃嬪)의 예에 따라 인숙이라는 시호, 효휘라는 궁호(宮號, 예컨대 혜경궁 등), 인명이라는 원호(園號, 예컨대 사도세자의 묘에 내려진 영우·현륭 등의 명칭) 등이 원빈에게 추증되었다.

한편, 원빈의 죽음과 관련된 문장을 짓는 데에 참여한 인사들도 상당히 화려한 편이었다.

원빈의 죽음과 관련하여 청나라에 보낼 표문을 지은 사람은 이휘지(1715~1785년)였다. 영조 치하에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에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원빈이 사망하던 해에는 규장각 제학을 제수 받은 인물이다.

지장(誌狀, 죽은 사람의 이력 등을 적는 문장)을 지은 사람은 유명한 예학자인 황경원이었다. 영조 치하에서 홍문관 대제학과 형조·예조·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또 홍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책을 지은 사람은 채제공이고, 홍씨의 시호를 임금에게 건의하는 시책을 지은 사람은 '한 방의 사나이' 서명선이었다(아래 관련기사 '정조의 남자들, 뜨는 별들의 뒷이야기' 참조).

이처럼 '호화 군단'이 동원될 수 있었던 것은 원빈의 사망 시점이 바로 홍국영의 전성기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81년에 홍국영이 홀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것과는 대조적인 풍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승 아닌 것이 죽으면 정승 집에 찾아가도 막상 정승이 죽으면 모두 외면하는 세상 인심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오빠 품에 안긴 원빈. 드라마 <이산>.
 오빠 품에 안긴 원빈.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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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세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 죽은 여동생

그런데 당초 홍국영 측에서는 이보다 더 화려한 장례식을 추진한 모양이다. <정조실록>에서는 "그때 홍국영의 횡포와 방자함이 날로 심하여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홍씨의 빈장(殯葬)에 관한 절차와 관련하여 예관이 모두 참람한 예를 원용하였다. 송덕상은 심지어 공제(公除)를 해야 한다고까지 했으나, 시행하지는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송덕상이 건의한 공제란 것은 임금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에 26일간 일반 공무를 중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정조 즉위년에 영조가 사망했을 때에도 그런 공제가 행해졌다. 이런 공제를 후궁인 원빈 홍씨에 대해서까지 적용하려고 했으니, 홍국영의 권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참고로, 송덕상은 '국영 맨'으로 분류될 만한 인물이었다. 저명한 유학자 송시열의 현손인 송덕상은 정조 즉위 직후부터 홍국영의 뒷받침으로 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거쳐 1779년에는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대학자의 후예치고는 그 처신이 좀 가벼웠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다.

위와 같이 원빈의 장례식에는 화려한 절차가 적용되고 화려한 인물들이 동원되었다. 홍국영의 세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그의 여동생이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찌 보면 원빈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사라기보다는 홍국영의 세도를 과시하는 행사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빠는 밉지만 본인은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사람

그런데 원빈의 장례식이 이처럼 화려했던 것은 홍국영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여동생에 대한 홍국영의 애정이 지나쳤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달리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모나지 않은 '착한 여동생'에 대한 홍국영의 맹목적 애정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빈이라는 인물 자체와 그의 죽음을 다루는 <정조실록>의 기록 속에서, 우리는 원빈 홍씨가 드라마 <이산>에서처럼 그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3월 31일자 기사인 '원빈 홍씨, 과연 악독했을까?(아래 관련기사 참조)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빈의 죽음을 다루는 <정조실록> 기록에서마저 사관들은 원빈에 대해서는 한마디 부정적 평가도 남기지 않았다. 홍국영에 대한 비난만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순조실록> 등의 원빈 관련 기록에서도 사관들은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평가를 남기지 않았다. 원빈 홍씨가 행위의 주체로 소개되어야 할 부분에서도 언제나 홍국영을 욕하는 식이었다. 

이것은 원빈이 오빠의 권세 덕분에 후궁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정작 그 본인은 크게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원빈이란 존재는 '그 오빠를 생각하면 밉지만, 정작 그 본인을 보면 쉽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동생을 잃고 오열하는 홍국영. 드라마 <이산>.
 여동생을 잃고 오열하는 홍국영.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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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달리 욕심도 별로 없고 행동도 조심스러운 여동생이었기에, 홍국영은 그런 여동생이 더욱 더 소중했을지도 모른다. 홍국영 측이 원빈의 장례와 관련하여 '오버'를 한 것은 홍국영의 권세가 막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동생에 대한 홍국영의 애정이 지나쳤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동생에 대한 홍국영의 애정이 지나쳤다는 점은, 홍국영이 원빈 사망 이후로 악수(효의황후 살해미수)를 놓고 그 때문에 결국 실각한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여동생의 죽음으로 이성을 상실한 홍국영이 평소처럼 사물을 영리하게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동생에 대한 애정이 그처럼 대단했던 당대의 세도가 홍국영. 그래서 그는 여동생을 화려하게 떠나보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불과 2년 뒤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여동생은 세계제국 당나라의 비빈처럼 화려하게 죽고, 오빠는 군기 빠진 당나라 군대의 병졸처럼 쓸쓸하게 죽고 만 것이다.


태그:#이산, #원빈 홍씨, #홍국영,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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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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