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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
 드라마 <이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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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의 '무단질주'가 계속되고 있다. 원빈 홍씨마저 가세해서 그 오빠와 함께 왕실에 큰 분란을 조장하고 있다. 드라마 <이산>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볼 때, 시청자들은 홍국영의 무단질주를 앞으로 조금은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다재다능했지만 지혜가 모자랐던 실제의 홍국영. 누구보다도 열심히 주군을 받드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자신의 세도를 향해 달려간 홍국영. 그런 홍국영을 지켜보면서 정조 임금은 속으로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까?

어찌 보면, 정조는 '신하 복'이 별로 없는 임금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조 이산이 신하들을 가르치고 과거 문제까지 직접 출제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 시대에는 임금만한 신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통령이 철학과 교수들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수능시험 수학문제를 직접 출제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진풍경'일 것이다. 그처럼 정조시대의 조선 조정에서는 정조 임금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 똑똑한 군주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군주가 너무 똑똑해서 신하들과 페이스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게 도리어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군주가 못 나서 조정이 잘 안 돌아가는 것이나 신하가 못 나서 조정이 잘 안 돌아가는 것이나 결과는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4공자(公子) 중 한 명인 맹상군(孟嘗君)과 정조 임금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제나라의 제후인 맹상군은 위나라 신릉군, 조나라 평원군, 초나라 춘신군과 더불어 전국시대의 4대 정치가로서, 그 문하에 수천 명의 식객을 두었다고 한다. 맹상군과 그의 가신인 풍훤(馮諼)의 사례를 살펴보면, 주군보다는 신하가 똑똑한 게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참고로, 맹상군은 제나라의 제후였다. 당시의 제후들은 위로 군주를 모시는 동시에 아래로 자신의 가신들을 두고 있었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래로 신하들을 둔 주군으로서의 맹상군’이다. 정조 임금과 비교하고자 하는 측면은 바로 그것이다.

전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전국책>에 의하면, 집안이 가난해서 맹상군의 식객으로 들어간 풍훤은 처음 한동안은 맹상군의 얼굴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식객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별다른 희망도 없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재능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홍국영처럼 넉살마저 좋았다고 한다. 기둥에 기댄 채로 칼로 땅바닥을 치며 "내가 먹을 고기가 없구나" "내가 탈 가마가 없구나"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구나"라며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밖에서 시끄럽게 구는 식객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맹상군은 측근을 통해 그에게 좋은 음식과 가마와 가족 부양비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문객들이 풍훤을 더욱 더 미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풍훤이 드디어 맹상군을 직접 대면할 기회가 생겼다. 제나라의 수도에 체류하고 있던 맹상군이 자신의 영지(領地)인 설(薛, 현재의 산동성 관내) 땅에 가서 채권을 회수해올 문객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회계를 할 줄 알던 풍훤이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선생이 바로 그 ‘노래 부르던 사람’이었군요. 설 땅에 가서 채권을 회수하거든 그 돈으로 우리 집안에 필요한 것을 사오시오.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선생이 직접 판단하시오."

그런데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풍훤. 그것도 맹상군이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새벽녘에 주군의 침소를 급히 찾아온 풍훤. 이상하다 싶은 맹상군, 그에게 급히 묻는다.

"채권은 다 받아왔소? 집안에 필요한 물건도 사왔소?"

풍훤의 답이 걸작이었다. 결론은, 채권을 회수하긴 했지만 그 돈을 백성들에게 도로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설 땅에 간 그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채권문서를 다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왜 그랬느냐는 주군의 물음에, “주군께서는 그 돈으로 이 집안에 필요한 것을 사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라며 “이 집안에 필요한 것은 의(義)라고 생각되어, 저는 그 의를 갖고 왔습니다”라고 답변하는 것이었다.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하고 왔다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의를 베풀었더니 백성들이 주군을 위해 만세를 외치더군요.”

맹상군은 짧게 대답했다. “알았소. 가서 쉬시오.” 그런데 그 ‘쉬라’는 말은 ‘이제 당신한테는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맹상군은 풍훤에게 일을 시켰다가 공연히 큰 손해만 보고 말았다. 백성들이 자신에게 만세를 외쳤다지만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또 무엇보다도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으니, 맹상군의 기분이 결코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제나라 왕인 민왕이 맹상군을 전격 숙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식객을 수천 명이나 두고 있는 세력가 맹상군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갑작스레 밀려난 맹상군은 짐을 싸들고 자신의 영지인 설 땅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 땅의 경계에 100리쯤 다가갔을 때였다. 맹상군은 뜻밖의 풍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대적인 환영 인파가 맹상군 일행을 마중 나온 것이다. 풍훤이 맹상군의 이름으로 채권을 면제해주었기 때문에, 설 땅에서 맹상군에 대한 지지율이 급상승해 있었던 것이다.

중앙에서 밀려난 맹상군이 본거지인 영지에서마저 환영을 못 받았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것이 정치적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그런 발판을 만들어준 게 바로 풍훤이었다. 풍훤은 좀 뻔뻔하고 경망스럽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하! 선생께서 말한 의(義)라는 게 바로 이것이군요."

그제야 맹상군은 풍훤의 지혜를 보았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풍훤을 신뢰하게 된 맹상군은 그에게 정치참모의 역할을 맡긴다. 주군의 신임을 받게 된 풍훤은 이때부터 주군을 정치적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풍훤은 위나라로 직접 들어가서 “제나라 왕이 맹상군을 몰아냈지만, 맹상군의 저 세력을 보십시오. 지금 맹상군을 스카우트 하면 위나라가 부국강병을 할 수 있을 겁니다”라며 맹상군 홍보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위나라 조정에서 맹상군을 재상으로 모시려 하자, 풍훤은 맹상군에게 “고사하십시오”라고 귀띔 한다. 이런 정보를 제나라에서 다 듣고 있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뭔가 반응이 올 것이라고 말이다. 제나라 민왕의 반응은 정말로 즉각적이었다.

"내가 잘못했소. 다시 돌아오시오!"

이번에도 풍훤은 맹상군에게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한다.

"종묘를 설 땅으로 옮겨 놓으면 제나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십시오."

맹상군을 몰아냈던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에게 잘못을 사과하는 한편, 수도에 있어야 할 종묘를 맹상군의 설 땅으로 옮겨주었다. 제나라의 정치적 중심이 맹상군의 설 땅으로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정치적으로 몰락할 뻔했던 맹상군은 풍훤의 지혜 덕분에 정치적으로 도리어 재기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수십 년 동안 제나라의 권력가로서 정치적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주군이 돈을 벌기보다는 민심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한 풍훤의 지혜가 낳은 결과였다.

위와 같이 맹상군은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풍훤이라는 가신을 둔 덕분에 정치적 위기를 오히려 정치적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가 오늘날까지도 전국시대의 4공자로 기억될 수 있는 데에는 풍훤의 공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가신을 둔 맹상군과 비교할 때에,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조 임금은 좀 불행한 편이었다. 정조 임금 자신이 조정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로웠기 때문에, 맹상군처럼 ‘주군보다 지혜로운 신하’를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혜로운 신하들로부터 조언과 도움을 받을 기회가 적었는지도 모른다.

취약한 정치기반을 갖고도 24년씩이나 군주 자리를 지킨 것은 정조가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홍국영 같은 사람이 제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어차피 정조 이산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사실은 정조 임금이 홍국영 같은 사람들보다도 고단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군주가 너무 똑똑한 것은 어찌 보면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군주가 똑똑해야 나라도 잘 운영되겠지만, 그것이 겉으로 너무 명확하게 표출되어 ‘주군보다 못한 사람들’로만 조정이 채워진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라에 불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조가 안경을 쓸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것은 정조 주변에 진짜 인재가 별로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신하들의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직접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조가 과로에 시달린 것은 한편으로는 정조에 대한 존경심을 자아낼 만한 측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주변에 그만큼 인재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측면일 수도 있다.

정조 시대에 임금보다 더 훌륭한 신하들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의 세력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이 모두 원위치된 것이 아닐까? 임금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원톱 시스템' 은 그 임금이 죽은 후에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정조는 능력 많고 훌륭한 군주였다. 그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신하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훌륭한 군주가 아닐까? 좀 뻔뻔하고 경망스러워 보이긴 해도 지혜가 많은 풍훤에게 기회를 만들어준 맹상군이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정치적 성공을 이루었듯이 말이다.


태그:#이산, #정조, #맹상군, #풍훤,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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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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