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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기 가득 담긴 눈빛.
▲ 디에고 장난기 가득 담긴 눈빛.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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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언제 했나요?"
"3년 전에요."
"애가 너무 예뻐요."
"디에고는 이제 두 살이죠."
"그렇군요. 서른에 두 살짜리 아들. 부러워요. 내 친구들도 결혼해서 이미 아이를 가진 애들도 있는데…."
"종성은 여자 친구 없어요?"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있으면 여행을 못했겠죠? 친구들이 여기서 아예 세뇨리따 만나라고 아주 난리가 아니에요. 하하."
"그거야 좋죠. 멕시칸 여자들 나름 예쁘고 착하거든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 일곱이요."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종성 나이 때 결혼을 했군요."
"음, 그럼 내가 샘처럼 되려면 올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군요."
"맙소사! 서두르세요."

별안간 또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과달라하라 가는 길에 작은 도시 익스뜰란 델 리오(Ixtlan del Rio)에서 오늘의 친구 샘을 만났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가 경찰에게 길을 묻는 나와 우연히 만나면서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한 것이다. 그래 놓고서는 나를 이끌고 잠시 밖에 나가더니 내 의사도 묻지 않고 타코를 시켜 버렸다.

아무리 내가 손님이라지만 내 의사결정권 정도는 존중해 주어야지. 그는 묻지도 않고 내 몫으로 종류별로 8개나 주문해 버렸다.

전기 기술자로 일하는 그는 디에고라는 두 살짜리 장난꾸러기 아들과 여전히 신혼부부인 것만 같은 아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디에고는 예의 장난기 어린 눈매만큼이나 처음 만난 나를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달라붙었다. 식사 시간 내내 내 무릎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식사 중에 관심받기 위해 끊임없는 작은 소동을 피워 우리는 조용히 대화하기보다 디에고를 달래는 시간이 더 많기에 이르렀다.

사실 그 전에 잠깐 두 살 눈높이에서 놀아주었던 것이 녀석의 신뢰를 산 게 아닌가 싶다. 안아주고 하늘로 던져주고 신나게 녀석을 들고 흔들어주었더니 그게 그렇게 흥미 있었나 보다. 녀석의 눈망울엔 강렬한 호기심이 서려 있다. 뭐든지 손아귀에 넣고 주물럭거리기를 원한다. 해묵은 물건들이라도 아이의 손에서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된다. 그리고 그의 최고의 장난감은 바로 식사시간 때마다 나오는 음식들이다. 그런 디에고를 안은 평온한 가정의 가장 샘을 보니 한없이 부러운 마음에 별안간 또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잠잠히 밀려온다.

웬 키스 장면이 그리 많이 나오는지...

샘과 디에고.
▲ 부자 샘과 디에고.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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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과 나는 디에고가 자지 않고 칭얼대는 통에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멕시코 인기 드라마인 패션(Pasion)을 시청했다. 이 드라마를 멕시코 들어올 때부터 봐왔는데 아마도 거의 모든 가게나 가정에서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 같다.

이 드라마는 마지막 장면이 파노라마로  이어지는데 아주 인상적이다. 카메라 앵글 하나로 모든 출연진과 모든 배경을 이어가며 잡아내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음악 역시 익숙한 순환코드를 써서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다. 배우들의 연기는 연극무대를 살짝 옮겨놓은 듯이 다소의 과장과 약간의 경직이 공존하는데 그런 액션이 바로 멕시코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연기력이 아닌가 싶다.

파일럿이 직업인 남자 주인공의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웬 키스 장면이 그리 많이 나오는지. 하지만 바람기가 다분해 보이는 반면에 근육질에 젠틀한 이미지는 여배우들을 항상 넘어 오게 만든다. 언어는 귀에 들어오지 않지만 내용은 눈으로 쏙쏙 들어와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다. 우린 TV 드라마 시청으로 그날 밤의 교제를 대신했다.

다음 날 아침, 샘의 가족과 또 살짝 섭섭한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고 길에 나왔다.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 속에 이젠 적응도 되고 어느 정도 무덤덤해질만도 한데 막상 이런 장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음 한 편이 시린 건 날마다 새로운 감정이 밀려드는 혼자만의 여행의 특별한 감정 때문이 아닌지.

연말인데도 불구하고 뜨겁기만한 햇살.
▲ 태양 연말인데도 불구하고 뜨겁기만한 햇살.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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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아프냐고? 어깨와 관절이 더 아프다

햇살은 여느 날보다 눈부시다. 연말인데도 불구하고 도로 위 온도는 30도를 훌쩍 넘어섰다. 툴툴거리며 달리는 길. 게다가 이 날 아침은 시작부터가 언덕이었다. '죽었구나.' 아스팔트 위로 이글거리는 열기에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으며 입을 굳게 다물고 나홀로 이런저런 생각에 똬리를 틀고 보니 저절로 침묵피정이 된다. 야심한 언덕을 넘으려니 허벅지에 가해지는 고통에 이는 악물어지고 인상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편견 중 하나가 다리가 아프겠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타보면 다리보다 어깨와 관절들에 더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을 그리며 운동 에너지를 발산하는 다리와는 달리 어깨나 손목과 같은 관절들은 오랜 시간 동일한 힘을 유지한 채 같은 자세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전거 여행을 마치는 밤에 결리는 곳을 마사지 하는 곳은 대부분 관절 쪽이다. 특히 산을 넘은 날 밀도 높은 근육으로부터의 피로와 경직된 관절의 뻑뻑함은 지친 뻐근함을 안겨준다.

멕시코의 작은 학교. 교실상태가 좋지 않아 아이들 몇 명이서 야외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학교 멕시코의 작은 학교. 교실상태가 좋지 않아 아이들 몇 명이서 야외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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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운다.
▲ 아이들 이제 글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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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주스와 데킬라를 권하고...

언덕을 어느 정도 올라가자 갑자기 사람들이 불렀다. 시원한 주스나 한잔 하고 가란다. 고맙지. 오르막이 얼마 남았냐고 물어보니 앞으로 5km는 가야 한단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저 멀리 산등성이로 길이 돌아 나오는 게 아득하게 보였다.

털썩. 마치 야간행군을 앞둔 병사의 마음처럼 힘이 쭉 빠졌다. 시원한 주스 한 잔 들이키고 계속 길을 가는데 이번엔 도로에서 웬 소형 트럭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나더러 얼른 오라고 손짓한다. 무슨 연유에선가 가보니 데킬라 한 잔 마시고 가란다.

"이 더운 날 무슨 고생인가? 자, 이거 한 잔 마시게. 데킬라는 힘을 복돋워 준다네. 자전거를 타고 저 산을 넘으려면 이거 한 잔 마셔둬야 해. 남자한텐 데킬라만한 정력제가 따로 없거든.(사실 장난이긴 했지만 훨씬 노골적이면서 은밀한 농담이었다)"

그러면서 힘들면 차에 자전거를 실으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못한다. 결국 산등성이 왕복 2차선에 스스로 정차한 차를 그냥 보냈다. 물론 데킬라도 정중히 거절했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한 번 타협을 시작하면 다음부턴 합리화시키는 전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만 참기로 한 것이다.

주스 한 잔 대접하던 멕시코 가게 주인
 주스 한 잔 대접하던 멕시코 가게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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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코로나 맥주 한잔 하고 가"

겨우 산등성이 하나 넘기고 눈물이라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소매로 닦아내며 간만에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안은 채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았다. 짐이 워낙 무거워서 밀고 올라가야 했기에 거북이 걸음으로 겨우 고개를 하나 넘었을 뿐인데 시간은 이미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다름이 아니라 고개 하나 넘어오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치킨집만 보이면 무조건 쳐들어가야겠다.'

하늘이 귀를 기울였는지 30분 후 마침 산 중에 치킨집 하나가 나왔다. 당장에 반마리를 시켜 토르티야에 싸 먹으니 세상만사 어화둥둥 어깨춤을 들썩이며 눈을 감아보니 천국이 보이는 것이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한 끼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내려가는데 또다시 그늘 아래서 술과 대화로 느긋한 낮의 여유를 즐기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날 불러 세운다.

"시원한 코로나 맥주 한 잔 하고 가!"

권하던 사내들. 하지만 대신 콜라를 마셨다.
▲ 시원한 맥주 한 잔 권하던 사내들. 하지만 대신 콜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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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말을 꺼낼 용기 있었으면...

코로나(Corona) 맥주라면 멕시코 중남부 지역을 대표하는 맥주다. 멕시코 중북부 지역은 테카떼(Tecate) 맥주가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데 이 두 맥주가 멕시코에서 가장 대중적인 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술을 안 마신다고 하니까 정말이냐고 되묻는다.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를 안 마신다고 생각하니 의아했던 모양이다. 대신 콜라 한 캔을 부탁해 마셨다. 이런저런 여행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을 때쯤 한 남자가 손에는 집게같은 뾰족한 창을, 어깨에는 무언가 뭉툭한 자루를 들쳐 메고선 나타났다.

자루에는 다름 아닌 사냥한 사슴이 들어있던 것. 집게같이 생긴 뾰족한 도구가 바로 사냥할 때 쓰이는 창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남자 왈,

"술에 안주는 이게 최고지. 자네도 한 번 먹어 봐. 어때?"

를 제안하던 남자. 구역질이 나 도저히 입에 댈 수가 없었다.
▲ 사슴고기 를 제안하던 남자. 구역질이 나 도저히 입에 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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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맥주 한 모금에 사냥해서 불에 구운 사슴을 즉석에서 먹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한바탕 웃고 떠드는 그 익살스러운 장면에 나만 혼자 속이 메스꺼워져 더 이상의 장면은 시선을 피해야 했다.

나름대로 거친 습속으로 달려온 길인데 아직 난 야생에 대한 완벽한 적응은 덜 되었나 보다. 이렇게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종류는 다르지만 세 번이나 '한 잔' 소리를 들었다. 그 때문인가? 그 한 마디에 비록 육체는 노곤해도 마음만은 즐거운 양약이 된 것 같다.

지나가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한 잔 대접할 수 있는 여유와 친근함. 여행은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혹시 다음 번에 누군가 또 이런 권유를 해 온다면 그 땐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눌 마음으로 한껏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둔 채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용기도 있었으면 좋겠다.

"갈 길이 먼데 한 잔 해도 될까요?"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멕시코, #자전거, #비전노마드,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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