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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한두 번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갱

8월 31일, 아침 7시에 중원의 '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씨안(西安)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 중 두 번째다. 우루무치(乌鲁木齐)에서 캠코더가 고장 나서 취재를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칭다오(青岛)에서 만난 중국친구도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기에 어렵게 다시 온 것이다.

이번 6개월 취재 여행 중 씨안과 상하이에 두 번씩, 베이징은 세 번 들렀다. 그것은 곧 어느 다른 곳을 가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예정된 일정을 하나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상처로 남는다. 씨안에서 가까운 스촨(四川) 북부의 중국 최고의 말 트레킹의 고장 쑹판(松潘)을 가지 못한 것. 그리고, 상하이에서 갑자기 약속이 생겨셔 이우(义乌) 부근의 아름다운 자연 동굴 솽룽(双龙)을 지나친 것과 베이징 부근 여름별장으로 유명한 청더(承德)를 포기한 것도 아쉽다.

기차 역 앞은 사람들이 참 바쁘게 움직인다. 아마 이른 아침이라 더욱 그런가 보다. 병마용(兵马俑)은 2006년에 갔던 곳이라 버스 타는 곳을 쉽게 찾았다. 1시간 가량 달린 버스는 종점이기도 한 진시황 동상 광장에 도착했다.

세계적인 유물이라 자랑하는 병마용. 2006년도 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비가 온다. 박물관 입구까지 차를 탔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들어서니 비가 내리는데도 거대한 규모의 1호 갱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서체가 단정한 <진시황병마용박물관> 비석 뒤로 보이는 1호 갱 입구를 들어서니 멋지고 장엄한 모습의 병마용 갱이 등장한다. 사진으로 한두 번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갱이다.

이 갱은 마차병과 보병이 연합 편성된 부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을 향해 있는 갱 앞쪽의 3개 열은 선봉부대이고 뒤쪽(서쪽)은 후방부대로 후방을 향해 서있다. 좌우 양 끝의 1개 열은 좌우로, 즉 남과 북으로 향해 있다. 가운데 부분에 있는 무사들과 마차가 주력부대이다.

씨안 병마용박물관 1호갱 모습
 씨안 병마용박물관 1호갱 모습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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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누가 만들었나?

이 1호 갱은 1974년 3월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당시 문화혁명을 주도하던 강청 등이 언론을 동원해 1주일 만에 중앙집권 통치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진시황을 위한 병마용'이라 선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당시는 문화혁명 말기로 정국이 혼란한 시점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느낀 천징위엔(陈景元)은 평생을 바쳐 모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그의 주장을 2005년 12월, 중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이 보도했고 '큰 파문'(轩然大波)을 일으켰다. 천징위엔은 진시황 시기 100여 년 전 진나라 소왕이 어머니인 진선태후(秦宣太后)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씨안 병마용박물관 1호갱에 있는 병마용
 씨안 병마용박물관 1호갱에 있는 병마용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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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래 4천만 명 이상이 다녀간 곳. 1호 갱에는 6천여 건이나 되는 병마용 유물이 있으니 정말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천장 곳곳에 비가 새고 있어서 놀랐다. 그토록 자랑하는 박물관을 비가 샐 정도로 관리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으로 병마용의 이곳 저곳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기원전 시기에 이렇듯 아름다운 모양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감탄이 절로 생긴다.

천징위엔의 주장처럼 진시황이 아닌 진소왕이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한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면 그야말로 기적의 예술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병마용의 모습은 다양하고 서로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른 것처럼 다른 표정, 동작, 자세가 그대로 묻어있다. 대부분 군복을 입었지만 갑옷을 입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자연스럽게 손을 차려 자세로 서 있기도 하지만 손을 살짝 들고 있는 것도 많다. 말들도 몸집에 차이가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 색깔이다. 천징위엔의 주장을 보면 진시황은 통일 후 통치를 위해 옷을 모두 흑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병마용의 옷을 보면 전체적으로 붉은 빛이나 빛이 다소 바래긴 했지만 녹색 빛이 남아있는 전투복 상의에 자세히 보면 자주색 빛깔이 군데군데 드러나는 바지 차림이다.

2천년 이상 땅 속에서 숨쉬면서도 고유 색채 유지

병마용이 2천년 이상의 세월을 땅 속에서 숨쉬고 있으면서도 그 고유의 자기 색채를 유지한 것이 놀라울 정도다. 흙이 변하겠는가. 진소왕 이전 순장도 많았던 시대에 굳이 흙으로 병마용을 구웠기에 이렇듯 오랜 세월에도 빛나는 혼을 지켜온 것이 아닐까 싶다.

전투 부대이구나 느낄 편대의 행렬이지만 간혹 그 배치가 군대라고 보기에는 느슨하게 서 있는 모습도 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병마용이 몇 개 보인다. 갑옷 속을 뚫고 지나간 자리처럼 허하게, 멀리서 보면 어둠의 빛깔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을 보는 마음 역시 허망해진다. 같은 세월을 견뎌왔으면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서러운데 구멍까지 났을까. 사람이 다 서로 그 본성이 다르듯이 병마용도 다 다름인가.

씨안 병마용박물관 3호갱의 모습
 씨안 병마용박물관 3호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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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 속에는 좌우 사방에 감시원들이 서 있다. 그렇지만 마음껏 사진과 영상을 찍어도 된다. 자유롭게 감시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병마용을 담아도 된다. 최대한 줌으로 클로즈업해서 병마용 속의 마음까지 담아보려고 애를 써본다. 병마용에 푹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병마용은 1호 갱 외에도 2호 및 3호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4호 갱을 비롯해 많은 병마용은 아직 발굴 중이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이 묻혀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전국시대를 통일한 최후의 승리자인 진나라 100여 년 전 아무리 소왕이 통일의 밑거름을 쌓았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방대하다니 다소 의문이기는 하다.

병마용 3호 갱으로 갔다. 오목할 요(凹)자 형 모양의 무덤 속은 네 필의 말, 한 대의 마차와 예순여덟 개의 도용만 발굴된 520평방미터의 자그마한 갱이다. 약간 어두워서 무덤 곳곳을 세심하게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목이 잘리고 그 형체가 부서진 채로 그대로 있어서 오히려 보기 좋다. 억지로 정리하고 정돈했다면 불편해 보였을 것이다.

말 뒤에 몇 미터 떨어져서 말을 끄는 듯 양 팔을 앞으로 벌린 모습이 재미있다. 말이 네 필이니 병마용도 네 명이다. 그 동작이 다 다르다. 몸체도 다 다르고 두 개는 양 손을 주먹 쥐고 뻗어있고 두 개는 왼손은 펴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뻗어있다. 뻗는 각도도 다 각각 다르고 자연스럽다. 아쉽게도 세 개는 머리는 온전하지만 한 개는 목 위가 달아나서 썰렁하다. 이렇게 부서지고 떨어져 나간 유물들은 따로 보관하고 전시하지는 않는다.

3호 갱에서 2호 갱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멍회이친차오(梦回秦朝)라는 이름의 사진촬영소가 있다. 병마용과 함께 진나라 시대의 분위기를 느껴보라는 의미이다.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병마용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씨안 병마용박물관의 사진촬영소
 씨안 병마용박물관의 사진촬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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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다양한 모습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

2호 갱은 6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중국 최대규모로 1300여건의 병마용, 마차 80량을 비롯 수많은 청동병기가 출토된 곳이다. 그 규모도 굉장히 크고 넓지만 무덤 속 병마용도 자연스레 전시하고 있다. 떨어진 목이 그대로 나뒹굴기도 하고 부스러기들도 그냥 방치한 듯 쌓여있기도 하다.

씨안 병마용박물관 2호갱 전시실에 있는 입사용
 씨안 병마용박물관 2호갱 전시실에 있는 입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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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쏴 자세의 궤사용(跪射俑)과 서서 쏴 자세의 입사용(立射俑)과 말을 끌고 있는 안마기병용(鞍马骑兵俑), 중무장한 군리용(军吏俑)을 비롯 군사용(軍士俑), 장군용(將軍俑), 포용(袍俑), 개갑용(鎧甲俑), 어수용(御手俑) 등 다양한 형태의 병사용이 발굴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다양한 모습을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 자세나 동작들이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정말 사람의 자세와 동작을 본 떠 만들었다니 그 감각의 수준이 놀랍다.

2호 갱 옆 복도에는 출토된 병마용 중에서 그 상태가 완전한 것을 따로 전시하고 있다. 유리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전체 모습을 다 감상할 수 있다. 병마용을 찾은 사람들이 꽤 오래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입사용의 자세는 마치 태권도나 태극권을 하는 자세와 비슷해서 흥미롭다.

3곳의 갱 속 수많은 병마용을 보고 나와서 병마용 박물관을 찾았다. 병마용의 발굴과 역사적 의의를 전시하고 있어서 처음 가는 사람들은 한번 볼 만하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참관한 기록사진조차도 흥미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이것이 싫다면 굳이 볼 이유는 없다.

클린턴 전 대통령 가족이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1호 갱 속에 들어가서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기도 하다. 아마도 미국 대통령을 예우한 듯 보이지만 괜히 볼썽사납게 보이기도 한다.

씨안 병마용박물관에 있는 전시실에 클린턴과 힐러리가 1호갱 안에 들어가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씨안 병마용박물관에 있는 전시실에 클린턴과 힐러리가 1호갱 안에 들어가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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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간예술의 보배 '인상쟈오즈타오'

박물관 한쪽 옆 다른 방에는 상설전시장이 있다. 매번 전시 내용이 바뀌는 것 같다. 이번에 갔을 때는 대만의 유명한 채색도자기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서 관람했다. 무료이기에 봤는데 의외로 흥미를 끄는 것이 많았다.

바로 <인상쟈오즈타오(印象交趾陶)>라는 전시회이다. '쟈오즈'는 채색이란 뜻의 차이여우(彩釉)와 거의 비슷하니 채색도자기(彩釉陶)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쟈오즈타오는 명나라 말기부터 그 싹이 텄으나 청나라 도광제 시대인 약 200여 년 전 광둥 지방에서 발원했다고 한다.

이후 대만에서 그 예술적 기품이 더욱 꽃 폈으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독특하리만치 진한 색감이 도자기 속에 묻어 있기도 하거니와 마치 당삼채를 보는 듯 착각도 든다. 중국 민간예술의 보배라 일컫기도 한다.

대만출신의 린광이(林洸沂) 선생이 전시한 다양한 도자기를 보는 즐거움이 병마용 못지 않다. 그렇다. 역사공부하기 좋은 소재들이 넘친다. 관우, 관평, 주창 등 삼국지 인물들이 반갑고 노자(老子)와 토지공(土地公)도 있고 일반민중들이 하늘과 땅의 신이라 믿은 천후(天后)인 마조(妈祖)와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顺风耳)도 있다.

관세음(观世音), 보현(普贤), 문수(文殊) 보살도 있으며 자항(慈航)과 강태공(姜子牙)도 등장한다. 비의 신 우사(雨师)와 바람의 신 풍사(风师)도 있다. 8대 용왕 중 마나사용왕(摩那斯龙王), 그리고 진시황과 병마용도 있다.

씨안 병마용박물관에서 본 채색도자기 전시실의 12간지 중 개 도자기
 씨안 병마용박물관에서 본 채색도자기 전시실의 12간지 중 개 도자기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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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를 상징하는 쌍사자 놀이개라는 부귀사진(富贵狮镇), 토끼가 약을 찧는 그림접시 월궁오서도반(月宫五瑞图盘), 호랑이가 가져다 주는 '복'이라는 오복임문반(五福临门盘), 행운과 경사를 뜻하는 길상길경(吉祥吉庆), 전설 속에 등장하는 행운의 상징 마고헌수(麻姑献寿) 등등 역사 속의 인물이나 전설을 담은 것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어렵기 그지 없다.

무수히 등장하는 동물들처럼 직관적인 것도 있다. 역사, 종교, 신화 속 인물들과 함께 등장해 그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동물의 역할인 것이다. 토끼와 호랑이가 출몰하고 관세음과 우사는 용을 타고, 노자는 소를 타고 풍사는 호랑이를 타고 보현은 코끼리를 타고 등장한다. 12간지 동물들이 형상화된 작품들이다.

이슬람을 종교로 하는 독특한 민족 '회족'

여전히 비가 내린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가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16시간 밤 기차를 타고 내리자마자 병마용을 보러 왔으니 피로가 몰려올 만도 하다. 씨안에 가면 늘 묵는 민박 집에 짐을 놓고 몇 시간 잠을 잤다. 저녁에 중국 친구를 만나기로 했기에 그때까지 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다. 무엇을 할까 생각 끝에 청진사 회교사원을 가기로 했다.

중원의 중심, 역사적 전통, 고도로서의 자부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시내의 종루와 고루를 지나 재래시장과 공예품 거리가 어울려 있는 청진사 골목길을 걸었다. 청진사 부근은 무슬림(穆斯林) 거주 지역이다. 지역 특산품을 파는 재래시장이 형성돼 있어 관광객들의 좋은 쇼핑 코스이기도 하다.

청진사는 고루 북편 변두리에 바로 근접거리에 있는 회족 사원이다. 회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이지만, 인구가 900만 명에 육박한다. 회족 자치주가 닝샤를 도읍으로 있지만 이곳 씨안에도 꽤 많은 회족이 산다. 회족은 이슬람을 종교로 하는 독특한 민족으로 아쉽게 자기 언어와 전통문화를 보유하지 못한 참 이상한 민족이기도 하다.

씨안 시내에 있는 회교사원인 청진사 모습
 씨안 시내에 있는 회교사원인 청진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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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회교족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도시마다 이슬람사원이 꼭 있는 편이다. 이 씨안 청진사는 당나라 때인 서기 742년에 처음 건조됐다고 한다. 이후 중건이 수없이 이뤄졌겠지만 나름대로 옛 정취를 마음껏 담고 있는 아주 인상적인 사원이다.

중앙통로를 통해 길게 좌우로 길이 열려 있는 형태라 신비롭기도 하다. 건축조형물을 빼고는 온통 싱그러운 나무로 덮여 있어서 공기도 맑다. 마침 해질 무렵이라 사원 단청 사이에 새들이 짹짹거리며 바쁘게 날아다니며 멋진 조화와 낭만적인 평화를 연출하고 있다.

청진사 감상에 한참 빠져 있는데 꼬마 여자아이 둘이서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한다. 알고 봤더니 이곳에서 노는 것을 자기 아빠가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놀러 왔다가 다시 나가기 위해 보호자처럼, 또는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싶다.

하여간 귀여운 두 아이랑 본당 앞에서 두루 살펴보다가 아이들과 같이 돌아 나왔다. 왼편으로 관리사무실이 있는데 그곳을 지날 때 아이가 내 손을 꼭 잡더니 내 보폭에 맞춰 지나간다. 하여간 뭔 사연이 있겠지만 노는 짓이 귀여운 꼬마아이들. 아, 회족 아이들이다.

씨안 청진사에서 만난 아이들
 씨안 청진사에서 만난 아이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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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중국친구가 전화가 왔다. 청진사를 나와 종루 옆 커피샵에서 기다렸다. 자오저(赵哲)는 친구들을 잔뜩 불러모았다. 한국 친구가 왔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는 것이다. 마침 주말이라 모두 모이기도 좋았다. 둥라이순(东来顺)이라는 유명 훠궈 체인점에서 맥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 역시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한국드라마와 연예인들을 좋아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친구도 있다. 베이징에서 경극을 전공하며 배우를 꿈꾸며 권상우와 <내 이름은 김삼순>을 좋아하는 친구는 경극 취재를 도와준다고 했는데 아쉽게 아직 못하고 있다.

다음날, 시내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고 다음 행선지인 우한(武汉)으로 떠났다. 얼마 전 라싸에서 만난 리아씨가 아는 말레이시아 화교인 아이링(爱琳)가 쓴 책을 소개해줬다. 난징(南京)에서 공부했으며 한국어도 곧잘 하고 한국여행을 포함해 전 세계를 여행하고 다니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6~7개 국어를 한다고 해서 관심이 갔다.

결국 씨안에 와서야 겨우 그 책을 사게 된 것이다. <再穷也要去旅行>. 번역하면 '다시 가난해져도 여행을 할래' 정도일 것이다. 중국어도 공부하면서 여행기도 읽으면서 우한까지 다시 16시간 동안 친한 벗처럼 옆에 끼고 갈 수 있게 됐다.

덧붙이는 글 | 중국문화기획자 - 180일 동안의 중국발품취재
blog.daum.net/youyue 게재 예정



태그:#병마용, #씨안, #중국, #진시황, #청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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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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