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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왕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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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가 사사됨에 따라 이제 시청자들의 관심은 성인 연산군의 ‘활약’에 쏠리고 있다. 어우동의 애정행각에 이어 연산군의 난행(亂行)이 또 한 번 <왕과 나>을 달구게 될지 주목된다.

‘연산군’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폭군’ 이미지다. 그리고 ‘폭군 연산’ 하면 뒤이어 떠오르는 것이 ‘살상’과 ‘여자’라는 이미지다. 연산군이 폐주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역사기록이 공정하게 집필될 리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재위 당시의 연산군이 도를 넘는 난행을 저질렀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살상’ 및 ‘여자’와 함께, 폭군 연산의 이미지를 형성할 만한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독단’이다. 그는 정상적인 언로를 차단하고 독단을 일삼았다. 회의를 통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에 옳다 싶으면 무조건 밀어붙이는 ‘불도저식’ 스타일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연산군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연산군일기> 10년 기사에 소개되어 있다. 자신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한글 익명서가 투서된 사건을 계기로 아예 한글 사용을 금지해버린 사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1504) 7월 19일자 기사에 소개된 언문투서 사건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날 대궐을 찾은 외척 신수영이 연산군에게 한 장의 익명 투서를 은밀히 보고했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제용감정(濟用監正) 이규의 심부름을 왔다면서 자기 집에 익명서를 투서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익명으로 날아든 '언문투서'

한글로 된 투서의 내용 중 두 가지는 이러했다. 조방·개금·덕금·고온지 등의 의녀들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은 대체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 목숨을 파리 머리 끊듯이 죽이는가?”라고 했는데, 왜 그런 사람들을 잡아들이지 않느냐? 그 의녀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은 여자를 가리지 않으니 조만간 우리 같은 의녀들도 궁궐에 불려가겠구나!”라고 했는데, 왜 그런 여자들을 잡아들이지 않느냐? 그런 내용이었다.

의녀들이 모여 앉아 임금의 인명 살상과 이성관계를 비판했는데, 그런 여자들을 왜 잡아들이지 않느냐는 불만을 담은 익명서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내용이라면 굳이 익명으로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연산군은 작성자로 지목된 제용감정 이규를 불러들여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네가 글을 써서 신수영의 집에 전달했느냐?”
“아닙니다.”

이규의 짓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한 연산군은 조방·개금·덕금·고온지 등의 의녀들을 잡아들여 국문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 한결같이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답변할 뿐이었다.

성인 연산군 역을 맡을 정태우. <대조영>에서 검이 장군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성인 연산군 역을 맡을 정태우. <대조영>에서 검이 장군 역을 맡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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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확인된 내용은, 이규가 그런 투서를 작성한 적이 없다는 점과, 의녀들 역시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한글 투서를 작성한 게 분명했다.

수선사학회 발행 <사림> 제15호 논문 ‘조선 중기 익명서 사건의 특징과 정치사회상’에서 이상배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누군가가 이규와 의녀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투서에 적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산군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엉뚱한 사람들의 이름을 빌려 투서에 담았다는 것이다. 

당시 연산군이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고 심지어는 신하들에게 신언패(말조심 패)를 목에 걸고 다니도록 할 정도로 정상적인 언로가 막혀 있었던 데에 대한 반작용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누군가가 투서 형식을 빌려 자신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내지 못한 29세의 젊은 연산군은 가슴 속으로부터 분노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약이 바짝 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도성의 성문을 닫아걸고 사람이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범인의 실체를 전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조치라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지, 뒤이어 연산군은 황당한 후속책을 내놓는다. 앞으로는 누구도 한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글 투서를 읽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투서 사건 다음 날인 연산군 10년 7월 20일에 있었다. 꽤 신속한 대응이었다. 한글 금지와 관련하여 연산군이 내린 전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산군, 익명 투서 한글로 썼다고 사용금지 시켜

“앞으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못하게 하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오부(五部, 한성의 다섯 구획)에 신고하도록 하고,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웃사람까지 함께 벌주라.”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은 물론 한글을 아는 자들을 관아에 신고하도록 하고, 게다가 오가작통법 식으로 이웃사람들에게까지 연대책임을 지운 것이다. 앞으로는 조선 땅에서 오로지 ‘중국글자’만 사용하라고 엄명을 내린 것이다. 일종의 중국글자 ‘몰입’사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글 익명서가 투서된 데에 대한 분풀이 치고는 너무 과한 대응이었다. 그 순간 연산군은 한글을 창제하신 4대조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그냥 세계 최강 명나라의 글자를 쓰면 될 일이지, 뭐 하러 이런 글자를 만들어 나를 피곤하게 만드셨는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1987년 영화 <연산군>의 주인공들인 연산군(이대근 분)과 장녹수(강수연 분)
 1987년 영화 <연산군>의 주인공들인 연산군(이대근 분)과 장녹수(강수연 분)
ⓒ 삼영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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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대한 연산군의 분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틀 뒤인 7월 22일에는 한글로 토를 단 한문 서적까지 모두 다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를 연상케 하는 조치였다.

그보다 더 황당한 조치는 3일 뒤인 7월 25일에 있었다. 언문과 한문을 아는 자들의 필체를 확보해두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언문 및 한문으로 각각 네 장의 글을 쓰게 한 뒤에 대궐·의정부·사헌부·승정원에 1장씩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민의 지문을 채취한 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투서 사건이 발생한 7월 19일로부터 불과 6일 만에 ▲한글 사용 금지 ▲한글로 토를 단 한문서적의 제거 ▲언문 필체 확보 등의 조치가 전격적으로 그리고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백성의 언어생활과 관련된 민감한 조치들이 6일 안에 모두 신속히 이루어진 것을 보면, 당시 조선정부가 얼마나 연산군의 독단에 의해 움직였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폭군 연산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고 독재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까지 내렸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금지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그 비판자들을 한심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 이렇게 나를 몰라주느냐는 식이었다.

자신에 대한 비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에 그는 이런 시를 남긴 적이 있다. “누가 능히 충심을 다해 이 용렬한 임금을 도와 풍속을 바로잡을 것인가?” 자기 주변에는 비판자만 있을 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을 무조건 보필하는 사람이 충신일 뿐,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충신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 폭군 연산. 그는 비판하는 사람도 싫었고, 비판하는 문서에 쓰인 글자도 싫었다. 그래서 한글을 금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폭군 연산의 한글 금지조치는 그의 독단적 기질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공청회는 뭐 하러 열고, 여론은 뭐 하러 수렴하는가? 내가 옳다고 여기면 무조건 밀어붙이면 그만이지. 그 같은 폭군 연산의 독단적 기질은 결국 그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태그:#왕과 나, #연산군, #언문,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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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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