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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수장인 옥환 역을 맡은 김명곤.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수장인 옥환 역을 맡은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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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에서 좀 아리송한 설정이 하나 있다. 옥환을 지도자로 하는 이른바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존재가 그것이다. 드라마 상에서 그들은 충녕대군을 납치하기도 하고 몽골 오이라트부와 제휴하기도 한다. 또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조선왕실을 전복하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고려황실 잔존세력’이 허구적 설정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면 ‘저런 일이 진짜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게 시청자들의 고민일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 출연진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명망이 높은, ‘전직 문화관광부 장관’ 출신의 배우가 옥환 역을 맡고 있으니, 왠지 ‘고려황실 잔존세력’이 정말로 존재한 것 같은 착각이 순간적으로나마 들지도 모른다.  

그럼, 조선 태종시대에 옥환 그룹과 같은 강력한 ‘고려황실 잔존세력’이 존재했다고 상상할 만한 역사적 근거가 있을까? <대왕세종>의 설정이 픽션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여기서는 태종시대에 과연 그런 조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초기에 체제전복 세력이 있었을까?

<대왕세종>에서 옥환 그룹은 몽골 오이라트부와 제휴하여 조선왕조를 전복할 계획을 품고 있다. 옥환 그룹은 조선왕조에 한이 맺혀 있고 몽골은 명나라에 한이 맺혀 있는 한편, 조선왕조와 명나라가 동맹을 맺고 있으므로 옥환 그룹과 몽골 역시 동맹을 맺을 만한 객관적 조건은 충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몽골족이나 여진족의 위협 때문에 명나라의 동아시아 지배력이 그리 견고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조·명 연합 대 옥환·몽골 연합의 설정은 결코 엉뚱한 발상이 아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만약 조선 땅에 실제로 옥환 그룹 같은 조직이 있었다면 그 조직이 몽골족이나 여진족과 제휴를 시도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조선 땅에 그만한 역량을 가진 반체제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옥환 그룹처럼 군사력과 자금력에다가 기획력까지 보유한 반체제 비밀결사가 실제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지배층인 유림들이 조선왕조를 비토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칼 대신 붓을 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글의 논의에서는 배제된다. 여기서는 왕씨와 비(非)왕씨 중에서 그만한 역량을 가진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왕씨의 경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초기에 왕씨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왕(王)이라는 성에다가 지붕(全)을 씌우든가 아니면 점(玉)이라도 찍든가 해서라도 왕씨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선정부는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기 위해 왕씨 일족을 계속해서 추적했다. 그래서 태종 시기에는 왕거을오미나 왕상우 같은 왕씨 일족의 존재가 발각되어 대형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옥환 그룹처럼 강력한 역량을 보유하지 못했다. 왕씨들은 그저 숨어살다가 붙잡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에 조선왕조를 위협할 만한 왕씨 세력은 없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정치참모인 전행수 역을 맡은 김승욱.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정치참모인 전행수 역을 맡은 김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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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신하가 고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

다음으로, 비(非)왕씨의 경우. 왕씨가 아닌 사람들 중에도 당연히 고려왕조를 지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과연 위협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을 검토하기 위해, 고려왕조를 추종하는 비(非)왕씨들에 대해 조선왕조가 과연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태종 12년(1412) 5월에 발생한 ‘고려 유신’ 서견에 대한 사법 처리를 둘러싸고 조선왕조 지도부에서 벌어진 논의로부터 그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종 12년이면 <대왕세종>의 최근 배경과 비슷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전 왕조의 왕업이 오래가지 못한 것이 도리어 한스럽다”(却恨前朝業不長)는 내용의 시를 지은 적이 있는 전 고려 사헌장령 서견이 사법당국에 붙잡혔다. 이 문제가 의정부에서 논의되고 결국 태종 이방원에게까지 보고되었다. 그런데 태종의 반응은 이랬다.

“고려의 신하가 고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만일 이씨의 신하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어라.”

그런데 그 뒤에 대신들이 이 문제를 재차 거론했다. 이번에도 태종은 “서견의 시에 대해서는 따질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사헌 유정현이 “신들은 따져봐야 하겠습니다”라고 대꾸하자, 태종은 “서견이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를 추모했으니, 이는 착한 일이 아닌가?”라며 또다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간(司諫) 이육이 나선다.

“고려의 신하이기는 하지만 몸은 조선에 있으니, 당연히 따져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견이 나를 임금으로 모시지 않는데, 그를 나의 신하라고 볼 수 있겠느냐?”

서견은 나의 신하가 아니니 얼마든지 고려를 추모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마지막으로 대언(代言) 한상덕이 나선다.

“그래도 서견의 시는 고려를 추모하는 시가 아닙니까?”
“고려에서 사헌장령을 지낸 바 있는 서견이 지금 왕조에서는 기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고려를 추모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고려왕조에서 밥을 먹은 사람이 고려를 추모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결국 서견의 문제는 불문에 부쳐지고 말았다.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세 주역. 배경이 무척 한가롭기만 하다.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세 주역. 배경이 무척 한가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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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왕조에 대한 추모시를 쓴 전직 고려 관리의 처리를 둘러싼 태종과 대신들의 논의로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은, 서견을 비호하는 태종이나 서견을 벌주려는 대신들이나 한결같이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들도 서견 한 사람을 벌주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서견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거대한 세력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태종은 아예 ‘고려를 추모하고 싶은 자, 고려를 추모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조선왕조가 고려를 지지하는 비(非)왕씨 세력을 크게 염려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증거가 될 것이다.

만약 강력한 고려왕조 지지세력이 존재했다면, 서견의 사건을 빌미로 어떻게든 반체제세력을 분쇄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는 군사력을 갖춘 고려왕조 지지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미미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군사력 갖춘 고려왕조 지지세력 있었을 가능성 낮아

또 태종대에 추진된 사병혁파 역시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당시 사병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조선왕실 지지세력’이었다. 사병혁파를 지지한 쪽이나 반대한 쪽이나 모두 다 조선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그들에게는 ‘고려황실 잔존세력’이 공동의 적이었다.

만약 ‘고려황실 잔존세력’이 드라마 <대왕세종>에서처럼 상당한 군사력·자금력·기획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태종이 그처럼 단호하게 사병혁파를 단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의 적 앞에서 자기편을 약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태종이 ‘조선왕실 지지세력’을 상대로 사병혁파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의 적인 ‘고려황실 잔존세력’의 위력이 무의미해진 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당시의 정황들을 살펴보면, 태종대에 조선왕실을 위협할 만한 강력한 ‘고려황실 잔존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반이 아직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고 재야에 반체제 유림세력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사력을 보유한 반체제세력의 존재를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세종>의 설정은 당시의 조선왕조가 그만큼 기반이 취약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나을 듯하다.


태그:#대왕세종, #대왕 세종, #고려황실 잔존세력, #옥환, #전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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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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