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감독에 의한 여성선수 성범죄 사태가 ‘제2라운드’에 돌입했다. 전직 여자배구 국가대표 선수가 지난 11일 방송을 통해 전·현직 감독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나 가해자와 구단에 의해 은폐된 사실을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 6월 우리은행 여자프로농구단 소속 선수가 자신을 성폭행하려 한 박명수 전임 감독을 공개 고소해 파문이 인 후 9개월 만이다.

KBS 1TV ‘시사기획 쌈’(연출 정재용) 제작진은 이날 ‘스포츠 성폭력에 관한 인권보고서’ 프로그램을 통해 스포츠계의 여성선수 성폭력 실태를 고발했다.

이날 방송에 따르면, 지난해 한 고등학교 여자농구부 코치가 선수들에게 당번제로 안마를 강요하며 상습적 성폭행을 일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코치는 사실 발각 후 대한농구협회에서 영구 제명됐지만, 현재 한 학교의 여자농구부로 옮겨 지도자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계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한 남성지도자는 “자기를 따르게 하기 위해 성폭행하는 방법이 남성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며 “초등학교부터 성인 선수까지 대다수의 종목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증언해 충격을 줬다.

여성신문은 지난해 6월 스포츠계에 만연한 성폭력 실태를 앞서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박찬숙 대한체육회 부회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남성감독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뒤 반강제로 퇴출당하거나 성폭행의 충격으로 자살까지 시도한 선수들도 있다”고 폭로하고 “만약 남성감독들의 성범죄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여성선수의 죽음은 시간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본지는 당시 ▲초·중·고 및 대학·실업팀 여성감독·코치 의무할당제 도입 ▲구단별 감독·코치·선수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 ▲성범죄자 영구 제명 등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는 오는 3월 ‘체육계 성폭력 근절 종합대책’ 발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당장 15일에 대한체육회, 교육인적자원부, 여성단체로 구성된 체육계 성폭력 근절대책단을 발족하고, 광범위한 의견 수렴을 거쳐 여성선수 성폭력 피해방지대책을 모을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프로팀과 직장 운동부에 소속된 여성선수 1500명을 대상으로 성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이와 관련해 문광부 관계자는 “생각보다 응답률이 저조하고 해외사례 연구도 쉽지 않아 좀 더 보완한 후 3월에 종합대책과 함께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방송에서처럼 여성선수 성폭력은 내부 은폐가 심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감독·코치·선수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와 여성감독·코치 할당제 강제는 물론, 내부고발자제도 활성화와 함께 학교 및 기업의 책임자 처벌을 강화하는 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학생선수 성폭력 피해 실태 및 근절대책 연속기획 토론회 ▲중도탈락 학생선수 인권상황 실태조사 ▲해외 선진국 학원스포츠 정책 및 실태 연구 ▲학생선수 인권향상을 위한 사회적 캠페인 등을 실시키로 했다.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취재후기
정재용 기자 / KBS 보도본부 시사보도팀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이번 프로그램을 취재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스포츠 기자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처음 취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덧붙여 혹시 성폭력 사건도 있다면 추가해서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 취재가 시작되면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한 가지 사건을 취재하면 또 다른 사건이 따라 나왔다. 결국 쌈 제작팀은 일정 선에서 취재를 중단하고 먼저 방송을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물론 취재팀의 기획 의도는 성폭력 문제를 통해 한국 스포츠의 구조적 문제점을 분석하고 전체적인 시스템을 개혁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 문제만큼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즉각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해자들은 또 다른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어떤 변명도 허용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자들이지만, 일정 부분 우리 사회가 그 범죄를 방조하고 묵인해 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는 점이다.

운동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학교 수업도 받지 못한 채 만성적인 구타에 시달리고, 운동을 그만두면 갈 곳 없는 실업자로 전락한다는 것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눈을 감았다. ‘운동선수니까 당연히 공부도 안하고, 맞고 그러는 거 아니냐’는 안일한 생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스포츠계의 폭력 역시 성폭력과 죄질이 다를 뿐이지, 구조적으론 똑같은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그토록 수많은 폭행사건이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가 성폭행이라는 더욱 심각한 피해로 이어진 것이다.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우리 사회가 과연 피해자가 누구냐, 가해자가 누구냐 하는 재밋거리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지난 수십년간 관행이란 이름으로 개혁의 대상에서 소외돼왔던 반인권적인 스포츠 제도와 시스템을 바꿔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성폭행 여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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