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해송초등학교 교직원 식구 16명이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호치민 묘소가 바라보이는 바딘 광장에서 한 기념촬영
▲ 바딘 광장 해송초등학교 교직원 식구 16명이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호치민 묘소가 바라보이는 바딘 광장에서 한 기념촬영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오토바이의 나라

베트남의 첫인상은 오트바이의 나라였다.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로 네 시간 가량 날아서 내린 어둠에 묻힌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은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열대지방의 날씨가 이런 것인가. 정말 의외였다.

K교사가 전해준 여행 준비물에는 ‘자외선 차단제(모자, 선글라스, 썬크림 등), 수영복(호텔 수영장)’ 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 오해였다. 베트남 여행 3박5일의 여정 동안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호텔에서 덜덜 떨어야 했다.

초가을 날씨, 아니 여름 날씨에 대비해서 큰 가방에 잔뜩 챙겨간 반바지에 소매 짧은 티셔츠, 슬리퍼는 가방 속에 잠재워야 했고 집을 나설 적에 추위를 쫓은 동복 한 벌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추위 속의 베트남이지만 역시 열대지방임을 느끼게 하는 것은 너른 들판 곳곳에서 모내기 하는 풍경이었다. 드물게 경운기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소로 논 갈고 써레질하고 줄도 맞추지 않고 손으로 모내기 하는 모습이었다. 추위에 몸을 떨어도 역시 베트남은 열대지방이었던 것이다.

여행 첫날 숙소인 스포츠 호텔, 바로 이 호텔앞에는 하노이 대학 기숙사가 있었는데 아파트 였다. 대학기숙사가 대학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 스포츠 호텔 여행 첫날 숙소인 스포츠 호텔, 바로 이 호텔앞에는 하노이 대학 기숙사가 있었는데 아파트 였다. 대학기숙사가 대학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하노이 현지 시간으로는 1월 26일 23시40분, 하지만 우리 시계(한국시간)로는 27일 새벽 1시40분이다. 곧바로 버스로 한 시간 가량 이동하여 스포츠 호텔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식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펄펄 날리는 지저분한 거리에 오토바이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붕붕거리며 달리는 모습이 마치 벌떼들이 몰려다니는 것 같았다.

길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는 택시를 보니 대우자동차 마티즈가 아닌가. 이 나라에서 마티즈는 우리 돈으로 2천만원 가량 된다고 하니 꽤 비싼 값이다.

호치민 묘지

첫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호치민(1890~1969) 묘소다. 우리는 넓은 공원 안에 들어가 한 건물 앞에 줄을 서 있는 데 섰는데 가이드가 사라졌다. 일순 황당했지만 한참후 가이드가 나타났다. 가이드는 우리가 뒤따라가는 줄로 알고는 묘소 쪽으로 성큼 가버렸고 우리는 호치민 박물관 앞에서 있었던 것이다.

호치민은 ‘깨우치는 자’란 말이고 본 이름은 응우엔 땃 탄이라고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두 벌의 옷과 평소 읽던 책을 남긴 그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목민심서>가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길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이 택시는 모두 대우 마티즈였다.
▲ 베트남 택시 길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이 택시는 모두 대우 마티즈였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프랑스에서 지어준 주석궁. 호치민은 너무 화려하다 해서 집무실을 옆에 있는 소박한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주석궁은 영빈관으로 사용하게 했다.
▲ 주석궁 프랑스에서 지어준 주석궁. 호치민은 너무 화려하다 해서 집무실을 옆에 있는 소박한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주석궁은 영빈관으로 사용하게 했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서너 해 전 호치민 박물관을 다녀온 어느 대학 H학장은 호치민이 김일성을 존경했다고 했다. 가이드에게 이를 확인하려고 물었지만 호치민이 레닌, 스탈린을 존경했지 왜 김일성을 존경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아무튼 호치민 박물관을 들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호치민의 묘소는 21.6m의 높이로 그렇게 큰 건물은 아니지만 주변에 높고 큰 건물은 없고 넓은 바딘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호치민은 생전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했다지만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미이라가 되어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것인지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호치민은 3꿍 정신 곧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담(함께 일한다)’으로 살았다. 화려한 주석궁을 버리고 정원사의 남루한 집을 관저로 썼으며 굶주리는 동포들을 위하여 하루 세끼 중 한끼 밥을 줄이자고 제창하였다.  또한 그의 식탁에는 세가지 이상의 반찬을 올리지 말도록 했다.

인민을 사랑한 그의 애국애족 정신을 느끼게 된다. 그의 묘지 양 벽에 써있는 ‘호치민은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사회주의여 영원하라’라는 글자가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호치민은 이 지하벙크를 통해서 밖으로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이 신출귀몰 했다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 지하 벙크입구 호치민은 이 지하벙크를 통해서 밖으로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이 신출귀몰 했다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호치민 묘소가 있는 곳에는 이렇게 넓은 호수도 있다
▲ 호치민 묘소의 호수 호치민 묘소가 있는 곳에는 이렇게 넓은 호수도 있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못꼿 사원

공원 안에 있는 못꼿 사원(일주사)은 하노이를 상징하는 옛 절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절의 산신각보다 조금 큰 전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절은 1049년 리(李) 왕조의 창건자인 리 따이똥이 지었다.

그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꿈을 꾸고 난 후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세웠는데 한 개의 기둥위에 서 있다고 해서 일주사란 이름을 붙였다. 1954년에 훼손된 건물을 최근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시멘트 계단 말고는 아주 낡은 건물이었다.

'씨클로' 우리 말로 인력거를 말한다. 리어카 같은 것이다. 손님이 앞쪽에 앉으면 뒤쪽은 자전거로 연결되어 운전사가 페달을 밟으면 가게 되어 있다. 지나고 나면 가난했던 과거도 추억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가. 베트남 안내 책자에는 씨클로를 타고 하노이 시가지의 한 복판에 있는 끼엠 호수가를 돈다고 했지만 우리는 시내 거리를 한 바퀴 돌아 낭만도 덜하고 한편으로 위험하기조차 했다.

숙소를 끼엠 호수가에 정하면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즐기면서 관광할 수 있어 좋고 또 관광지와 가까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을 텐데 우리는 변두리 지역 먼 곳에 숙박을 하게 되어 시간이 많이 낭비 되지 않았나 싶다.  

사원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전각에 지나지 않았다. 기둥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해서 일주사라고 한다. 호수에 박힌 큰 기둥 위에 집을 세웠다.
▲ 못꼿 사원 사원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전각에 지나지 않았다. 기둥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해서 일주사라고 한다. 호수에 박힌 큰 기둥 위에 집을 세웠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한국인들도 이 곳에서 아들 낳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한다.
▲ 못꼿사원의 관세음보살 한국인들도 이 곳에서 아들 낳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한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뒤쪽에 자전거를 붙여 운행할 수 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씨클로가 움직인다.
▲ 하노이 시가의 씨클로 뒤쪽에 자전거를 붙여 운행할 수 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씨클로가 움직인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겨울 추위 속에서 베트남 농부는 모내기를 한다. 소를 써서 농토를 갈고 쎄러를 이용하여 땅을 고른다.
▲ 겨울철에 모내기 하는 베트남 농민 겨울 추위 속에서 베트남 농부는 모내기를 한다. 소를 써서 농토를 갈고 쎄러를 이용하여 땅을 고른다.
ⓒ 정근영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dharmanet.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부산 해송초등학교 교직원 식구 일부는 1월 26일부터 1월 30일까지 3박 5일의 여정으로 베트남 북부 하노이 닌빈 하롱베이를 다녀왔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태그:#베트남, #호치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