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 선수는 복싱 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다.

홍수환 선수는 복싱 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다. ⓒ 홍수환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해라"

- 운명의 3라운드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3라운드에도 카라스키야는 약간 주춤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마음 놓고 경기를 했습니다. 나도 이판사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미 4번 다운된 거 한 번 더 된들 달라질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죠. 감히 이기겠다고 큰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기본인 원투 스트레이트를 시도했습니다.

원투가 운 좋게도 적중하더군요. 쫓아가서 짧은 라이트 어퍼컷으로 카라스키야의 턱을 들어올렸습니다. 이어 강력한 레프트 훅을 그의 복부에 꽂았습니다.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죠. 레프트 훅을 맞은 카라스키야는 링에 기댄 채 축 늘어졌습니다. 링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링 바닥에 누웠을 겁니다. 차라리 일찍 다운된 후 정신을 추슬렀다면 경기는 또 모르죠. 그게 바로 11전과 46전의 경험 차이라고 봐야죠.

나는 아예 왼손으로 눌러놓고 간신히 링에 기대 있는 카라스키야의 얼굴에 마지막 한방을 날렸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카라스키야는 링 줄과 평행하게 누워서 완전히 뻗어버렸습니다. 코너에 있던 친형이 가장 먼저 뛰어나와 나를 번쩍 안아 올렸습니다. 그 기분은 형언할 수 없죠.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분이 아리송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죠. 사실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날 저녁 로베르토 두란이 내 방으로 찾아와 축하해줄 때에야 내가 이겼다는 사실이 실감났습니다."

- 경기 후 인터뷰 때 홍수환씨 머리를 빗어주던 사람은 파나마 사람이던데 누구였죠?
"파나마 관중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불과 2분 전에 총을 쏘아대던 축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세상에 이럴 수가' 라는 표정으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죠. 근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축하해준 파나마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링에서 내려 오니 그 파나마인이 벙글벙글 웃으며 빗을 들고 연신 내 머리를 빗어주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파나마인이 그 날 카라스키야에게 돈을 걸었는데 그는 그 반대로 걸었다가 엄청나게 돈을 땄기 때문에 기쁨에 겨워 고마움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거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예 경기 후 나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나 역시 흥에 겨워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파나마 사람들은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빨리 가라."

그는 흥분한 파나마인들이 나나 자신을 총으로 쏠까 걱정했습니다. 나는 별로 큰 걱정을 안 했지만 우리 일행은 내 신변이 위태롭다고 판단했고, 그 말을 들은 경기 다음날 우리는 도망치다시피 과테말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금의환향 그러나...

 홍수환 선수가 74년 아놀드 테일러를 이긴 후 청와대에서 대통령 내외를 만나고 있다.

홍수환 선수가 74년 아놀드 테일러를 이긴 후 청와대에서 대통령 내외를 만나고 있다. ⓒ 홍수환


"과테말라에서 항공편 때문에 LA로 들어갔습니다. 사모라에게 타이틀을 잃은 LA였기에 감회는 더욱 깊었죠. 여기서부터는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습니다. KAL측은 특등석을 제공했고 스튜어디스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사진 찍자고 했고, 기장은 홍수환이 여기 탔다고 기내 방송을 했습니다. 박수소리가 너무 커서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흔들흔들하는 듯 했습니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의 동양방송국(TBC)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습니다. 제 생애 두 번째였죠. 당시 카라스키야전 재방송만 스물 일곱 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국민들은 무척 좋아했으나 권력자들은 나를 싫어했습니다. 청와대에도 초대받지 못했죠."

- 74년 첫 타이틀 획득 때에는 청와대에 초청받아 박정희 대통령에게 금일봉도 받고 하셨잖아요. 4전5기로 타이틀 땄을 때는 어땠나요?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수도경비사에서 보내준 지프차가 나와있더군요. '첫 번째 챔피언이 되었을 때는 청와대에서 고급 차를 보내주었는데 왜 4전5기로 두 번째 챔피언이 되었을 땐 군용 지프차로 끝났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홍수환 선수 때문에 후원회장이 직업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 이유는 내가 카라스키야와의 경기 직후 한 인터뷰 첫 마디에서 나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한 홍수환 후원회와 팬들에게 그 공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인터뷰 내내 박정희 대통령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박 대통령과 측근들은 그 점을 섭섭해 했다고 합니다.

그 섭섭함은 보이지 않는 보복의 부메랑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인터뷰에서 가장 고마워 했던 분은 당시 국세청 차장으로 있던 장재식씨였거든요. 이 분은 나에게 고기를 사줘 가며 카라스키야와 싸우면 반드시 옆구리를 때리라고 충고했던 분이기에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한 거였는데 장재식 차장은 인터뷰 직후 바로 해임됐습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측근들이 알아서 잘랐겠죠. 군부 독재 시절의 단면이었죠. 다행히도 그 분은 직장을 잃었다가 후에 주택은행장으로 복귀해 산자부 장관까지 역임했습니다. 어쨌거나 그 분께 평생 미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극적인 승리 이후 1차 방어만 성공했고, 2차 방어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서 국민들이 더 크게 실망하고 일말의 배신감마저도 들었던 듯 합니다. 오래 타이틀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는 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1차 방어전부터 꼬였습니다. 일본선수 가사하라 류랑 경기를 한 게 78년 2월 1일이니까 불과 두 달 만에 경기를 치른 거죠. 게다가 또 방문 경기였습니다. 복싱 규칙에 따르면 KO패 당한 사람은 100일 이내에 경기를 할 수 없습니다. 가사하라는 내가 카라스키야전에서 이기긴 했지만 네 번이나 다운당하고 두 달 만에 경기를 하는 만큼 회복이 덜 됐을 거라는 판단을 했는지 조인식에서 엄청 깐죽대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홍수환을 5회 안에 무너뜨리겠다. 얼마 전 이 경기를 못보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챔피언 벨트를 바치겠다.'
 
나는 코웃음치면서 이렇게 맞받아쳤습니다. '오냐, 너만 아버지 없냐. 내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는 권투 시작하기 전부터 아버지 무덤에 벨트를 바쳐 왔다.'

나는 '일본 킬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유난히 일본 선수들에게 강했습니다. 12전 11승 1패인데, 데뷔 초기 첫 방문 경기에서 억울하게 판정에서 졌던 우시와 카마루 선수도 재경기를 해서 이겼으니, 일본선수에게 전승을 했던 거죠."

 홍수환 선수가 78년 2월 1일 가사하라 류와의 1차 방어전에서 다운을 뺏고 있다.

홍수환 선수가 78년 2월 1일 가사하라 류와의 1차 방어전에서 다운을 뺏고 있다. ⓒ 홍수환



- 약물중독 의혹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유제두 선수도 마찬가지였고….
"경기 당일 오전에 계체량을 통과한 후 그냥 설사가 쏟아졌습니다. 계체량 전이니까 먹은 건 유일하게 호텔방 냉장고 안에 있는 사과 주스하고 물뿐이었는데, 설사가 물처럼 줄줄 나왔습니다. 그런 몸으로 경기에 임해서 2회, 5회, 9회 2번, 10회 총 5번 다운을 빼앗아 냈습니다. 특히 9회 2번 다운될 때 가사하라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는데 심판은 카운트를 질질 끌어서 경기를 속행시키더군요.
 
10회에도 다운을 끌어냈지만 가사하라는 괴물처럼 일어나는데 끔찍했습니다. 내가 네 번 일어났을 때 카라스키야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그때 들대요. 11회부터 15회까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힘이 없었지만 이 녀석한테만큼은 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홍수환 선수의 인기를 말해주는 광고

당시 홍수환 선수의 인기를 말해주는 광고 ⓒ 홍수환


내 친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하다가 일본인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서른 셋 나이에 홀로 됐습니다. 어떻게 따온 타이틀인데 일본에 바칠 순 없었습니다. 또한 다섯 번을 다운 당한 놈이 이기면 5전 6기가 되고, 나는 그 신화의 제물이 될 판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녀석이 환호하고 내가 털썩 주저앉는 비디오가 돌아갈 것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습니다.

15회 판정으로 가사하라를 이기기는 했지만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판정에서 내 팔이 올라가는 순간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겨서 기쁘다기보다는 화가 났죠. 약까지 타서 이기려고 하다니…. 지금까지도 아주 치사한 놈들이었다는 생각뿐입니다."

- 2차방어전은 1차 방어전 이후 얼마 만에 한 겁니까?
"78년 5월 7일이니까 석달 뒤였네요. 5개월 사이에 다운 4번 당하고 15라운드 뛰고 다시 12라운드를 뛴 거죠. 리카르도 카르도나에게 졌다고 봅니다. 1회전부터 버팅으로 제 눈이 찢어져서 선혈이 낭자했는데도 경기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2회전에서 경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그 후 이혼, 알래스카로 이민, 택시운전, 마약운반책 누명, LA에서 신발장사 등 갖은 역경을 겪으시고, 지금은 유명한 강사가 되셨는데 어떤 계기였나요?
"일전에 내 권투 해설을 들어온 선배 하나가 한 번 강의를 해보라고 주선해준 것이 계기였죠. 춘천 시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첫 강의를 했는데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복싱을 했던 덕분에 이렇게 강연을 하는 직업을 얻었으니 팬들의 성원에 그저 감사 드리고 보답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50번의 경기 중에 가장 생각나는 선수는 누구입니까?
"첫번째 타이틀을 뺏어왔던 아놀드 테일러입니다. 테일러 가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명한 스포츠맨 가족이었습니다. 그의 형은 최고의 경마 기수였고 테일러는 오토바이를 즐겼습니다. 176cm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 생겼죠. 내게 지고 나서 한 체급을 올려 페더급으로 재기해 승승장구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저한테 패한 후 2년이 채 못되었을 때였습니다. 언젠가 꼭 테일러의 무덤에 가고 싶습니다. 그가 보고 싶습니다."

 74년 7월 4일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와의 경기 직후 찍은 사진. 왼쪽이 김준호 트레이너

74년 7월 4일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와의 경기 직후 찍은 사진. 왼쪽이 김준호 트레이너 ⓒ 홍수환



-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일은 뭐가 있으십니까?
"30년이 지난 후에도 저를 기억해 주시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제가 더 이상 회자되지 않을 만큼의 훌륭한 선수가 등장하는 걸 보고 싶습니다. 불모지나 다름없었지만 박세리, 김연아, 박태환 같은 선수가 계속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복싱도 세계적인 스타가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 한국 복싱의 부활을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관심입니다. 지나가다 체육관이 보이면 그냥 들어가서 선수들 훈련하는 모습을 바라만 봐주셔도 됩니다. 누가 자기를 봐주는 시선을 느끼면 운동이 달라지거든요. 화분도 자꾸 보고 관심을 쏟으면 꽃이 잘 핀다고 하잖습니까?

오늘 행사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복싱 경기를 직접 봤다는 여자 회사원이 같이 온 직장 상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영화 다섯 편 본 거보다 재밌답니다. 앞으로 K-1 경기 너무 느리고 단순해서 못 볼 거 같다고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런 기회와 관심이 쌓여서 체육관을 찾는 동호인이 많아지고 그 동호인 중에서 잘하는 사람이 선수가 되는 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저변이 형성되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거든요. 그 아가씨처럼 오늘 행사를 통해 복싱 애호가가 한 명이라도 늘었으면 오늘 행사의 목적은 달성된 셈입니다."

ⓒ 홍수환



- 그야말로 복싱 전도사로 불릴 만한데 복싱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제가 권투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반드시 실력 있는 사람이 이기는 정직한 게임입니다. 진실만이 통하는 거짓말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인들이 권투 선수를 닮았으면 합니다.

임무가 싸우는 거면 얼마를 맞았건 이길 가망이 있건 없건 '땡'하면 나가고 '땡'하면 들어오지 않습니까? 자기가 원해서 한 일이면 앞뒤 너무 재지 말고 앞만 보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바로 복싱의 가르침입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3개월만 권투했으면 좋겠습니다. 1회전 3분만 뛰어 보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겁니다.

저를 기억하시고 이 글을 읽어주실 모든 분들과 가정에 다함 없는 건강과 화목이 깃드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수환 카라스키야 4전5기 아놀드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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