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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생명체와는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 예로부터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답해 왔다. 인간을 달리 부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생각하는 존재),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놀이하는 존재),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존재) 따위 용어들에는 바로 그런 대답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침팬지도 생각할 줄 알며 놀이를 즐기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과학적인 연구조사 결과 낱낱이 밝혀진 오늘날, 그러한 것들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유한한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주장은 어떤가? 잘 알려진 카톨릭 경구 ‘메멘토 모리(Memem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늘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거야말로 다른 생명체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주장 말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허점이 보인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는 마치 제 죽음을 예감하는 듯이 눈물을 흘리며, 정원사가 가위를 들고 미세한 전기 장치를 잎새에 연결한 식물에게 다가서면 마치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지르듯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눈금이 계기판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지닌 본성이 아닐까 여겨진다. 추운 극지방이나 고산지대에서 봄에 싹을 틔워 여름 한 철 자라는 식물들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꽃을 피워내는 것도 사실은 금세 다가올 죽음의 계절, 겨울을 의식해서 나름대로 취하는 생존 전략일 터이다.

그럼에도 ‘죽음’은 인간의 고유한 표지가 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념하는 형식인 장례식과 무덤과 제사는 다른 생명체들에게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인간의 창안인 것이다.

죽고 나면 그걸로 끝인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는 달리, 우리 인간의 죽음은 이렇게 죽음을 기념하는 특유의 방식에 의해서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이렇게 죽음을 기념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박경남이 지은 흥미로운 책 <묘비명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답은 이렇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현재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과 같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는 우리보다 먼저 같은 고민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긴 짧고 긴 묘비명을 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삶이 즐겁고 행복한 쪽으로 흐르지 않겠는가. (5쪽, 머리말)

2.

<묘비명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
▲ 책표지 <묘비명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
ⓒ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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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묘비명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에는 이처럼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150여 개의 묘비명이 짤막한 안내글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그 묘비명의 주인공들은 헤밍웨이, 데카르트, 모차르트, 링컨, 에디슨 등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타이 코브(미국의 야구선수), 모리야 센얀(일본의 선승) 등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인물들, 심지어는 평범한 일개 시민이었던 프랑스의 우편배달부와 시인 바이런이 사랑했던 애완견까지도 망라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묘비명에서부터 아직도 활발하게 작품을 쓰고 있는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미리 쓴 묘비명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또한 이순신, 천상병, 박수근 등 한국인 30여 명과 몇몇 일본인 및 중국인의 묘비명도 함께 소개되어 있어서, 죽은 자를 기리며 그를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자 했던 인간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보편적인 심리였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묘비명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삶의 지혜는 우선 ‘살아 있는 동안 삶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책에 첫 번째로 소개되어 있는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바로 이 점을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경구로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묘비명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글은 이것 말고도 여럿 발견된다. 칼 마르크스의 묘비명(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프란시스 베이컨의 묘비명(아는 것이 힘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묘비명(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의 묘비명(必生卽死 必死卽生)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책에 썼던 글 한 구절이나 주장했던 말 한 마디를 자신의 삶을 마지막으로 요약하는 묘비명으로 삼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묘비명이란 한 사람의 일생을 마지막으로 요약하는 한 마디일 텐데, 바로 그 ‘마지막 요약’이라는 구절을 자신의 묘비명으로 삼은 사람도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짧게 요약된 글들로만 이루어진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창간했던 드윗 월리스가 바로 그 묘비명의 주인공이다.

이처럼 묘비명에는 자신이 삶에서 이룬 대표적인 공적을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때로는 후세 사람들에게 우쭐대며 자랑하는 것으로 비춰질 그러한 묘비명도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겸손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평생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평화의 의술활동을 펼쳤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그렇다.

만약 식인종이 나를 잡으면 나는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슈바이처박사를 먹었어. 그는 끝까지 맛이 좋았어. 그리고 그의 끝도 나쁘지는 않았어.(366쪽, 알버트 슈바이처의 묘비명)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보여준 그의 생애를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죽음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살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의 몸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그의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허풍이 아니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묘비명을 통해서 우리는 ‘삶은 더불어 함께 살 때 진정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소중한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러나 묘비명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가장 소중한 삶의 지혜는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은 서로 이어져 있기에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며 따라서 살아가는 동안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면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일 것이다.

몇 해 전 작고한 조병화 시인의 묘비명이나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중인 프랑스의 노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미리 써 놓은 자신의 묘비명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이 바로 그렇게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한 인간이 평화롭게 맞이하는 죽음이다.

나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220쪽, 조병화의 묘비명)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34쪽, 미셸 투르니에의 묘비명)

3.

보름 전쯤 우리 할머님께서 백 년 동안의 긴 심부름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할머님의 장례식에 참가하느라 급히 한국을 다녀와서 보니 이 책 <묘비명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가 소포로 와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사온 책들을 제쳐두고 이 책부터 먼저 펼쳐서 밤마다 잠들기 전에 몇 쪽씩 읽었다.

무덤을 파고 묘비를 세워주는 대신 화장을 해서 한 줌 재로 남은 당신의 뼛가루를 야산의 소나무 아래 묻어주고 왔기에 할머님이 남긴 묘비명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험난했던 한 세기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살아오신 할머님의 삶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뒤늦게 내 가슴에 맺혀 왔다.

할머님은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만났을까? 6∙25 전쟁 때 북으로 끌려가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셨을 당신의 남편도 만났을까? 당신보다 먼저 하늘나라의 주민이 된 두 아들과도 행복한 해후를 하셨을까? 다시 만난 그들에게 어머님 심부름이, 이 세상 나들이가 소풍처럼 즐거웠다고 말씀하셨을까?

아닐 것이다. 비록 천수를 다 누리고 가셨지만 이 세상에서 살았던 당신의 삶은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시련과 고통과 슬픔이 더 많았을 테니까. 무덤이 없어서 지어주지 못했던 할머니의 묘비명을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묘비명으로 대신해서 할머님의 영전에 바친다. 할머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맞이한 새로운 삶은 편안하고 기쁘고 즐거운 나날이기를.

수고가 끝난 후의 수면,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한 후의 항구, 전쟁이 끝난 후의 안락, 삶 다음의 죽음은 기쁨을 주는 것이다 (372쪽, 조셉 콘래드의 묘비명)

덧붙이는 글 | <묘비명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

ㅇ 박경남 지음
ㅇ 포럼 펴냄
ㅇ 2007년 8월 30일 1판 1쇄
ㅇ 값 18,000원



묘비명 -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

박경남 지음, 포럼(2007)


태그:#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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