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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폭포의 모습
 빅토리아 폭포의 모습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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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도 들리는 폭포의 굉음

기차는 짐바브웨와 잠비아 국경의 빅토리아 폭포 역에 도착했으나 아직까지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빨리 잠비아 땅으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빅토리아 폭포 역은 짐바브웨 땅이다. 짐바브웨의 인플레 유령이 나의 뒤를 계속 쫓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짐바브웨의 물가와 환율은 귀신이 나올 듯 한 에티오피아 랄리벨라의 허름한 여행객 숙소와 케냐 나이로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치안불안과 함께 아프리카 여행 중 가장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열차에서 내린 뒤 서둘러 잠비아 국경 쪽으로 걸어갔다. 열차 1등 칸에서는 내리는 30대 중반의 남녀 유럽 여행객에게 “잠비아 국경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자신들도 같은 곳을 간단다. 그들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짐바브웨 국경 출입국사무소에서 출국절차를 끝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짐바브웨 탈출 작전의 성공이다.

갑자기 물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수풀 너머에서 노랑나비처럼 날아와 내 얼굴에 내려앉는다. 물보라는 내가 앞으로 걸어가자 가랑비가 되었다. 폭포의 모습은 잠비아 국경으로 가는 도로 사이에 있는 빅토리아 폭포 국립공원의 울창한 나무가 가로막아 보이지 않지만,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한 “쾅~쾅~”하는 굉음 같은 물소리와 연기가 되어 날아와 여행객의 옷깃을 적시는 물보라가 빅토리아 폭포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옛날 아프리카인들은 빅토리아 폭포를 ‘모시 오아 투니아(Mosi-oa-Tunya)’라고 불렀다. ‘모시 오아 투니아’는 ‘천둥치는 연기’라는 뜻이다. 하얀 연기가 천둥소리를 낸다는 옛날 아프리카인들의 표현만큼 빅토리아 폭포를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정작 폭포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데 마치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소리와 뿌연 연기로 변한 물보라가 여행객을 멀리서부터 맞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빅토리아 폭포는 물보라가 300m이상 튀어 오르고, 굉음은 몇 km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맑은 날에는 저 멀리 50km에서도 폭포의 물안개를 볼 수 있다. 이 아름다운 표현인 ‘천둥치는 연기’ 대신 왜 엉뚱하게도 ‘빅토리아 폭포’라고 부를까.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에 둘러싸인 아프리카 대륙의 최대 호수가 ‘빅토리아 호수’로 불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철길 다리에서 제1계곡을 통해 바라본 빅토리아 폭포
 철길 다리에서 제1계곡을 통해 바라본 빅토리아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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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잇는 빅토리아 폭포 철길 다리

폭포의 물보라를 맞으며 걷다보면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잇는 빅토리아 폭포 철제 다리가 나온다. 짐바브웨 불라와요에서 빅토리아 폭포까지를 있는 철도 다리가 만들어진 것은 식민지 시대인 1905년. 이 철도 다리는 잠베지 강을 향해 몸을 날리는 높이 111m 번지점프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다리 중간에 다다르자 계곡 사이를 통해 빅토리아 폭포가 처음으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던 물보라가 내 얼굴에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하는데, 오랜 아프리카 배낭여행으로 사막처럼 건조해진 나의 얼굴에 마치 얼굴 스프레이 화장수를 뿌리는 느낌이다.

빅토리아 폭포에서 떨어진 잠베지강의 물은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이 미국과 캐나다로 나누듯이 좌우로 짐바브웨와 잠비아로 나눈다. 계곡의 잠베지강을 경계로 짐바브웨 쪽의 도시는 이름도 빅토리아 폭포이고, 잠비아 쪽은 리빙스턴이다. 짐바브웨 쪽의 공원은 빅토리아 폭포 국립공원이고, 잠비아 쪽은 모시 오아 투니아 국립공원이다.

다리 밑 잠베지 강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흐르고 그 강물 위에 보트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래프팅을 즐기는 여행객이다. 짐바브웨와 잠비아 쪽의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흐르다 회오리를 일으키며 잠시 머물다 가는 웅덩이란 뜻에서 보일링 포트(Boiling Pot)라고 부르는 지점이다. 래프팅이 시작되는 출발지점이어서 그런지 많은 노란색 보트들이 모여 있다.

빅토리아 폭포에서 치솟는 물안개기둥(폭포 위쪽 잠베지강에서 찍은 모습 )
 빅토리아 폭포에서 치솟는 물안개기둥(폭포 위쪽 잠베지강에서 찍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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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폭포의 물안개기둥

다리를 건너 잠비아 국경 사무소에서 미국 돈 25달러를 내고 비자를 받았다. 잠비아 쪽 폭포를 보러 성큼성큼 걸었다. 걸어가는 길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튀어 일 년 내내 푸른 나무로 우거진 열대우림이다. 나무숲을 지나자 놀라운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잔디용 분무기에서 물이 뿌려지듯 하늘로 물안개가 날아오른다. 물안개는 바람에 날리면서 가랑비가 되어 어느덧 나의 옷을 금세 흠뻑 적셨다.

잠베지 강에서 흘러 내려오던 물이 계곡 밑으로 떨어졌다 아래쪽의 바위벽에 부딪치면서 300m까지 치솟으니 주변 하늘은 온통 물안개다. 물이 떨어지는 폭포의 절벽과 아래쪽 절벽의 사이는 짧게는 25m에서 넓게는 75m. 깊이 108m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강물의 힘과 빠르게 흐르는 물의 속도가 합쳐져 아래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서 거대한 물안개기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빅토리아 폭포의 물안개기둥이 높이 치솟는 이유는 특수한 지형 때문이다. 마치 지진에 의해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처럼 물이 떨어지는 위쪽의 절벽과 똑같은 높이의 아래쪽 절벽사이에 계곡이 만들어져 있다. 폭포의 위아래가 짧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같은 높이의 절벽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다른 폭포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고 있다.

빅토리아 폭포는 이런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넓은 웅덩이로 물이 떨어져 바로 평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계곡으로 떨어진 물이 아래쪽의 절벽에 부딪힌 다음 다시 하늘로 치솟는다. 짐바브웨와 잠비아 쪽의 폭포에서 떨어졌다 아래 절벽에 부딪힌 물은 각각 배수구 같은 가운데 계곡으로 합쳐져 흘러간다. 아래쪽 절벽의 난간을 따라서 위쪽의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을 정면에서 가까이 볼 수 있는 것도 다른 폭포에서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잠베지 강에서 흘러내려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보자 마치 나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이 현기증이 난다. 폭포의 계곡이 마치 블랙홀처럼 여행객의 눈을 빨아들인다. 폭포의 물은 계곡에서 튀어 오르면서 물거품이 이는 듯 하더니 작은 물방울인 물보라로 되었다가 수증기 같은 물안개로 변하고, 순식간에 내 머리 위로 하얀 연기가 되어 날아간다.

빅토리아 폭포 위쪽 절벽과 아래쪽 절벽을 잇는 쌍무지개 다리
 빅토리아 폭포 위쪽 절벽과 아래쪽 절벽을 잇는 쌍무지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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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를 만들어 내는 빅토리아 폭포의 쌍무지개

잠비아 쪽의 맨 아래쪽 절벽난간으로 내려가면 ‘칼 모서리(Knife Edge)’라는 폭포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폭포에서 떨어진 물들이 하나로 모여 제1계곡을 따라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계곡의 바로 건너편인 짐바브웨 전망대인 ‘위험 지점(Danger Point)’이라는 뾰족한 바위가 있는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 있었다.

제1계곡에는 선명한 무지개가 두 줄로 휘어진 활처럼 물과 바위에 걸려 있다. 쌍무지개이다. 강물과 절벽 사이에 반달모양을 그린 무지개가 활짝 웃으며 여행객을 맞는다. 여러 줄기로 내려오는 빅토리아 폭포는 폭포의 특성과 모양에 따라 ‘악마의 폭포’, ‘중심 폭포’, ‘말발굽 폭포’, ‘무지개 폭포’, ‘안락의자 폭포’, ‘동쪽 폭포’라 부른다.

영국의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차 아프리카 탐험을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한 뒤 1857년 출간한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라는 여행기에서 빅토리아 폭포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거대한 물안개기둥은 구름과 닿아 있는 듯 했다. 밑동이 흰 물안개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색깔이 차츰 짙어졌기 때문에 땅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기둥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주변의 큰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150여 년 전 리빙스턴이 보았던 빅토리아 폭포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커다란 물안개기둥과 주변의 울창한 숲은 세월과 상관없이 지금도 빅토리아 폭포를 이루고 있다. 잠비아 쪽에서는 폭포의 아래 뿐 아니라 위쪽으로 올라가서 폭포를 구경할 수도 있다.

폭포의 위쪽에서 여행객의 눈길을 빼앗는 것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무지개이다. 마치 폭포 의 위쪽 절벽과 아래쪽 절벽 사이를 잇는 구름다리처럼 쌍무지개가 아름답게 떠 있다. 제1계곡의 무지개보다 더 선명한데, 영락없는 무지개다리이다. 빅토리아 폭포의 쌍무지개는 앞쪽은 선명하고 뒤쪽은 약간 흐릿하게 걸려있어 마치 하얀 종이 위에 원근법에 의해 무지개다리의 수채화를 그린 것 같다.

물방울이 하늘로 튀어오를 때 햇빛이 비추면 빅토리아 폭포 어디서나 아름다움 쌍무지개가 뜬다. 바위에 부딪힌 물거품이 작은 물방울로 산산이 부서질 때 때마침 생긴 무지개가 비추니 나비가 춤추며 날아가거나 비눗방울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 한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지진이 갈라놓은 듯한 폭포의 절벽사이(잠비아의 '동쪽 폭포'에서 찍은 모습)
 지진이 갈라놓은 듯한 폭포의 절벽사이(잠비아의 '동쪽 폭포'에서 찍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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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폭포는 어떤 차이가 날까

빅토리아 폭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이구아수 폭포나 미국과 캐나다의 나이아가라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로 꼽힌다. 그러나 그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빅토리아 폭포는 너비가 1.7km로 나이아가라의 1.2km보다 크고, 이구아수 폭포의 4km보다는 작다. 그러나 물이 떨어지는 깊이는 108m로 나이아가라 51m, 이구아수 82m보다 훨씬 크다. 단순히 수치상의 차이 그 이상이다. 가장 큰 차이는 빅토리아 폭포는 한마디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다른 폭포는 웅장하거나 거대하다는 느낌은 들어도 폭포 자체가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브라질 이구아수 폭포는 홍수가 난 강물이 화가 나서 휩쓸고 지나가듯 폭풍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이아가라는 우리나라 동아건설이 만든 리비아 대수로의 대형 송수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느낌이 났다. 빅토리아 폭포는 여러 줄기의 물기둥으로 갈라져 내려오다 보니 마치 여러 개의 호스에서 아래로 물을 쏟아 붓는 듯하다.

빅토리아 폭포는 한눈에 폭포의 전경을 모두 볼 수 있어 물줄기의 다양성을 감상할 수 있고, 다른 두 폭포는 한 부분만을 보다 보니 획일성이 느껴졌다. 빅토리아 폭포는 두 폭포와 달리 물이 떨어지는 절벽과 똑같은 높이의 아래쪽 절벽에서 바라볼 수 있어 더욱 웅장함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물 흐르는 계곡 사이가 좁아 절벽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빅토리아 폭포에는 보름달이 뜨면 달 무지개가 걸린다고 하니 달밤에 오게 되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잇는 빅토리아 폭포 철길 다리와 번지점프하는 모습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잇는 빅토리아 폭포 철길 다리와 번지점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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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금 건너온 철길 다리에서는 10분 간격으로 잠베지강으로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발을 묶은 줄이 도르래가 풀리면서 내려오듯이, 하늘에서 스카이 다이빙하듯 강물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려오던 한 젊은이가 강물 위에 빠지기 직전에 줄이 당기는 반동으로 다시 20여m 하늘 쪽으로 올라간다. 발을 묶은 줄의 반동 작용으로 위아래로 3~4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더니 멈춘다.

어떤 사람은 밑으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 영화 타이타닉의 십자가 사랑자세처럼 두 손을 쭉 펴는 동작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은 하늘 중간에 붕 떠서 자유형 헤엄치는 듯 한 동작을 보여주고, 어떤 여자는 공포감에 얼어 죽은 송장인 강시처럼 꼿꼿한 자세로 줄의 움직임에 자신의 몸을 그대로 맡겨놓고 있었다. 번지점프에도 사람마다 다 자세가 다르다.

줄의 반동이 사라질 때쯤 밧줄을 묶은 전문가가 거꾸로 자세로 내려와 번지점프 여행객을 손으로 잡자 다리 위에서 밧줄을 당겨 두 사람을 모두 끌어올린다. 헬기를 타고 온 소방서 대원이 밧줄을 타고 내려와 사람을 구출해 헬기로 올라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잠비아의 빅토리아 폭포 입구에 서 있는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 구리상
 잠비아의 빅토리아 폭포 입구에 서 있는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 구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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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현상을 그대로 지명으로 부른 아프리카식 이름

폭포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데 입구에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왼손에 성경책을 쥐고 오른손은 멀리 보기 위해 눈 근처에 갖다 대고 잠베지강을 탐사하는 생생한 모습이다. 리빙스턴은 19세기 유럽의 많은 탐험가 중에서 그래도 인도적 탐험가로 꼽힌다. 리빙스턴은 1855년 잠베지강 탐험 중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현지인들이 “모시 오아 투니아”라고 부르는 폭포를 보고 당시 영국 여왕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이름 붙였다.

존 해닝 스피크나 헨리 스탠리 등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현지인들이 오래전부터 부르던 이름 대신 영국 여왕이나 왕세자, 후원자등의 이름으로 멋대로 바꾸어 버렸듯이 리빙스턴도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리빙스턴이 현지인들의 이름 그대로 “모시 오아 투니아”라고 불렀다면 얼마나 칭송받았을까.

리빙스턴이 바꾼 빅토리아 폭포 보다 애초 이름인 “모시 오아 투니아”가 더 아프리카답고, 스피크가 1862년 빅토리아 호수로 바꾼 이름 보다 애초의 ‘니안자 호수’가 더 멋있지 않은가. 아프리카인들은 그냥 자연현상이나 자연지형을 그대로 지명으로 불렀다. 에티오피아 바하르다르의 청나일 폭포의 애초 이름인 ‘티스 이사트(물연기)’와 콩고민주공화국의 비룽가 국립공원의 ‘비룽가(화산)’, 니안자 호수의 “니안자(호수)”가 그렇다.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유럽식 이름은 아프리카식 이름에서 자연을 빼고 엉뚱한 사람 이름을 붙인 격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도 그랬다. 서울의 북악산은 ‘북쪽의 큰 산’이 그대로 지명으로 되었고, 북한 금강산의 온정리는 ‘온천이 샘솟는 곳’이 마을 이름으로, 경기도 남양주의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이 만나는 곳’이 이름으로, 대전의 옛 이름인 한밭은 ‘큰 들판’이 이름으로, 내가 태어난 충북 영동의 한곡리는 ‘큰 골짜기’, 물한리는 ‘물이 많은 곳’이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되었다.

물안개가 자욱한 빅토리아 폭포 절벽사이
 물안개가 자욱한 빅토리아 폭포 절벽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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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고 조용한 관광도시 리빙스턴

빅토리아 폭포는 단순히 폭포만 구경하는 곳이 아니다. 코끼리와 하마, 악어, 사자 등 야생 동물을 볼 수 있는 사파리 뿐 아니라 승마, 래프팅과 번지점프, 카누와 카약 등 물놀이도 즐길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만 할 수 있는 모든 여행과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폭포를 구경하고 잠비아의 관광도시인 리빙스턴으로 봉고버스를 타고 갔다. 빅토리아 폭포를 유럽인으로 처음 본 리빙스턴을 기리는 뜻에서 아예 도시 이름을 ‘리빙스턴’이라고 지은 것이다. 리빙스턴은 폭포에서 11km떨어진 아담하고 조용한 도시이다. 관광도시답게 여행객 숙소가 많고, 수도 루사카로 가는 철길도 놓여 있고, 외국계 은행들도 많아 쉽게 자동현금지급기를 통해 돈을 빼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 찾아간 졸리보이스 백패커스라는 배낭여행객 숙소는 방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북반구의 여름 방학을 맞아 전 세계의 배낭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최근 짐바브웨의 인플레 때문에 짐바브웨 쪽 도시인 빅토리아 폭포 보다는 잠비아의 리빙스턴으로 관광객이 몰리다보니 더욱 방을 잡기가 어렵다. 결국 근처 폴티 타워스라는 다른 여행객 숙소에 묵었다. 정원에는 텐트를 칠 수 있는 캠핑장도 있고, 작은 수영장도 있고, 여행 예약도 해주는 등 배낭여행객에게는 편리한 숙소였다.

배낭여행객은 미리 투어나 레포츠 예약 등을 개별적으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예약을 대신 해주는 숙소가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물론 아프리카의 여행객숙소 대부분은 그런 예약을 대신해주었다. 숙소에서 만난 일본의 30대 젊은 남자는 혼자서 여행하는 데 아예 텐트를 갖고 다녀 야외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텐트를 갖고 다니면 여러 명이 같이 자는 기숙사식 도미토리와 비교해도 방값을 절반 정도로 아낄 수 있다. 그런데 텐트를 갖고 다닌다는 것은 이동 등 여러 가지로 불편하기 때문에 세계 일주 등 최장기간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한다.

오후에는 시내 은행에서 돈을 찾았는데, 바클리 은행과 스탠더드 차터드 은행 등 비자카드로 현금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아 편리했다. 잠비아 화폐는 말라위와 같은 콰차(Kwacha)를 통화단위로 사용하는데, 환율이 말라위는 미국 돈 1달러에 110 말라위콰차(MK)였는데, 잠비아는 3430 잠비아콰차(ZK)였다.

잠비아와 말라위의 화폐이름인 콰차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널리 사용되는 반투(Bantu)어로 '새벽'이라는 뜻인데, 잠비아와 말라위의 민족주의자들이 ‘새로운 자유의 새벽’이란 의미의 독립운동 구호로 쓴데서 나라의 화폐이름으로 되었다. 잠비아콰차는 아프리카 여행 중 엉터리 같은 짐바브웨를 제외하고는 환율이 가장 높았다. 보츠와나는 1달러에 5.5 풀라, 남아공은 1달러=7랜드, 나미비아는 1달러=8 나미비아달러, 마다가스카르는 1달러=2060 아리아리(Ariary)였다.

인도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것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였다. 여행기록을 담기 위한 노트와 볼펜 등을 사기 위해 은행 옆 문방구점에 들어갔는데, 인도인 어머니와 아들 모자가 문구점을 하고 있었다. 인도인은 케냐와 탄자니아, 우간다, 말라위, 잠비아, 남아공 뿐 아니라 마다가스카르의 섬까지 아프리카 곳곳에 진출해 있었다.

잠비아쪽 '칼 모서리' 전망대에서 짐바브웨쪽의 폭포를 찍은 모습(왼쪽 바위 위가 짐바브웨의 전망대 '위험지점')
 잠비아쪽 '칼 모서리' 전망대에서 짐바브웨쪽의 폭포를 찍은 모습(왼쪽 바위 위가 짐바브웨의 전망대 '위험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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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밥 나무의 전설을 말하는 리빙스턴 박물관

은행 바로 옆에는 리빙스턴 박물관이 있었다. 1층의 왼쪽에는 잠비아의 역사와 문화, 전통생활 등을 보여주는데 사자 등 동물 등을 박제한 것을 전시해 놓았고, 오른쪽의 전시관에는 탐험가 리빙스턴의 탐험일지와 물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루사카로 수도를 옮기기 전인 1930년 당시 리빙스턴이 식민지 시대의 수도로 있을 때 만들어진 박물관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잠비아의 역사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꾸며 놓았다.

리빙스턴 박물관의 입구에는 바오밥 나무에 대한 잠비아의 전설을 소개해 놓아 나의 눈길을 끌었다.

“잠비아 선조들은 오랫동안 바오밥 나무의 열매가 주는 혜택 때문에 특별히 보호해왔다. 바오밥 나무를 해치면 신의 노여움을 사 뱀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져왔다. 그래서 바오밥 나무를 신성시 해왔다.”

바오밥 나무에 대한 잠비아 뿐 아니라 아프리카인들의 생각이 들어 있다. 바오밥 나무는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하고, 잎과 가지는 소 등의 사료로 사용하고, 씨앗과 껍질 등에서 추출한 기름은 피부염증 치료제 뿐 아니라 노화방지와 피부보습을 위한 화장품 원료로도 사용한다. 바오밥 나무는 아프리카인들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빅토리아 폭포 근처와 잠베지강을 따라서 바오밥 나무들이 많이 자라는 데, 특히 짐바브웨 쪽의 바오밥 나무는 나이가 200년이 넘고 둘레가 20m나 되는데, 이름도 ‘빅 트리(Big Tree)’라고 부른다.

탐험가 리빙스턴의 물품들도 재미있다.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박물관에는 리빙스턴이 사용하던 나무상자 가방 밖에 없는데, 리빙스턴 박물관에는 많은 탐험 물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파리 모자와 코트, 부츠와 망원경, 성경책과 편지, 지도와 지팡이, 시계, 의약품통.

리빙스턴은 마지막 탐험지역이었던 잠비아 방궤울루 호수 남쪽의 치탐보 마을에서 숨졌기 때문에 잠비아 쪽에 많은 물품이 남은 것이다. 리빙스턴의 심장은 잠비아 치탐보 마을에 묻혔고, 햇볕에 쪼여 미라로 만든 그의 시체는 영국으로 옮겨졌다. 리빙스턴의 육체는 고국인 영국으로 보내졌으나 마음만은 영원히 아프리카에 남았다. 아프리카인들이 신성시 하는 비단뱀도 전시되어 있다.

빅토리아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빅토리아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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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식민지배의 고속도로로 악용된 리빙스턴의 탐험

박물관의 역사관에는 16세기 아랍과 포르투갈 상인들의 도착과 독립운동을 위한 투쟁의 기록도 새겨 놓았다. 애초 수렵을 하던 코이산족(코이코이족과 산족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 살던 잠비아는 11세기 무렵부터 아랍 상인들이 금과 상아, 노예무역을 위해 드나들었으며 1789년 유럽국가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밀어닥쳤다.

그 뒤 노예로 끌려가는 고통과 영국의 식민지 과정은 짐바브웨나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같다. 탕가니카 호 주변과 잠비아 내륙에서 잡힌 노예들은 말라위호를 통해 다우선에 실려 모잠비크 킬와와 탄자니아의 바가모요 항구 등을 거쳐 잔지바르 노예시장에서 중동과 유럽, 서인도 제도 등으로 팔려나갔다.

잠비아가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1차 탐험 결과였다. 1850년부터 56년까지 잠베지 강 상류에서 모잠비크의 인도양에 이르는 리빙스턴의 탐험성공은 그의 의도가 어떻든 결국 식민지배의 길로 가는 고속도로가 되었다.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는 1888년 짐바브웨와 똑같은 수법으로 자신의 ‘영국 남아공 회사’를 내세워 잠비아의 서쪽을 지배하던 로지 족으로부터는 광업권을 따내고, 동쪽의 은고니 족으로부터는 무력으로 땅을 빼앗아 식민지로 삼았다.

빅토리아 폭포 제1계곡의 강물과 바위사이에 뜬 쌍무지개
 빅토리아 폭포 제1계곡의 강물과 바위사이에 뜬 쌍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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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디지아라 불렸던 잠비아는 남로디지아로 불린 짐바브웨, 니아살란드(말라위)와 합쳐 ‘로디지아-니아살란드 연방’이 되었다가 1964년 영국으로부터 잠비아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잠비아(Zambia)라는 국명은 잠베지강(Zambezi River)의 이름에서 따온 것.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잠비아와 콩고민주공화국, 콩고, 세네갈 등이 강의 이름에서 나라이름을 따왔다.

잠비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은 바로 초대 대통령을 지낸 케네스 카운다이다. 교사 출신인 카운다는 통일민족독립당(UNIP)을 만들어 시민 불복종운동을 조직해 ‘차차차(Chachacha)’ 저항운동을 이끌다 투옥되기도 했다. 카운다 역시 아프리카 사회주의로 기울어 마르크스주의와 아프리카의 전통적 가치인 공동체 정신을 결합한 ‘잠비아 휴머니즘’운동을 펼쳤다. 아프리카 대륙에 불어 닥친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일종이었다.

탄자니아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의 ‘우자마(가족애)’ 운동과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의 ‘도의적 사회주의’와 같은 아프리카 전통인 공동체 정신에 사회주의를 가미한 것이었다. 카운다는 직접 <잠비아의 휴머니즘과 실행 가이드>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카운다는 탄자니아 니에레레와 가나 은쿠루마, 케냐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 나이지리아 초대 대통령 은남디 아지키웨, 기니 초대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 등과 함께 1945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의 젊은 멤버였다. 그 때 나이 21살. 아프리카 민족주의에 입각한 아프리카합중국을 꿈꾼 아프리카의 젊은 독립투사들이다.

잠비아의 카운다 처럼 아프리카 독립투사들 가운데는 유난히 교사출신들이 많다. 탄자니아의 니에레레와 세네갈의 셍고르, 가나의 은크루마 등이 그렇다.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 중산층의 자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지적 분야는 주로 교사였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교육 수준을 갖춘 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경향을 띠게 되고, 주체적 교육과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고, 자신의 이념을 담은 책 등을 직접 쓰기도 했다.

잠비아는 독립 당시부터 영국의 식민지배 후유증으로 이중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식민지배의 착취와 인근 짐바브웨와의 경제적 격차 때문이었다. 영국의 백인들은 잠비아에서 착취한 이익을 대부분 짐바브웨로 빼돌려 투자했다. 짐바브웨에 ‘로디지아’라는 이름의 백인정권을 만들어 영구 통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어서 잠비아의 자원으로 짐바브웨를 집중 육성시켰던 것.

빅토리아 폭포로 흘러가는 잠베지강(폭포 위쪽에서 찍은 잠베지강의 모습)
 빅토리아 폭포로 흘러가는 잠베지강(폭포 위쪽에서 찍은 잠베지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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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패하자 깨끗이 물러난 카운다 대통령

독립투사인 카운다는 집권기간 동안 주변 아프리카 국가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당시 백인정권인 남아공과 로디지아(옛 짐바브웨), 포르투갈 식민지인 모잠비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륙국가인 잠비아는 남아공과 모잠비크로 통하는 항구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주요 광물인 구리를 수출하기 위해 별도의 항구를 개척해야 했다.

잠비아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타자라 열차의 개통은 이런 역사적 이유가 있다. 당시 탄자니아 대통령 니에레레와의 개인적 친분 뿐 아니라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추구라는 공통의 목표에 따라 1975년 중국의 원조로 잠비아 카피리 음포시에서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항구까지 연결하는 타자라 철도를 완공한 것이다.

카운다는 일당체제하의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스스로 다당제로 복원한 뒤 1991년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선거에서 야당 후보인 프레데릭 칠루바 후보에게 지자 깨끗이 정권을 물려주고 물러났다. 선거 승복의 문화와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아프리카에는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오거나 선거에 불복하지 않고 깨끗이 인정해 물러난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탄자니아 니에레레 대통령과 세네갈의 시인 대통령 레오폴드 셍고르, 보츠와나의 케투밀레 마시레 대통령 등은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사례이고, 장기독재의 비판을 받은 말라위의 반다 대통령도 선거에서 지자 깨끗이 승복해 말라위 민주주의의 한 초석이 되었다.

카운다의 뒤를 이은 노조지도자 출신인 칠루바 대통령은 자신의 실정으로 카운다의 인기가 다시 치솟자 부모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 출마자격을 금지하는 희한한 법을 만들었다. 부모가 말라위 출신인 카운다를 겨냥한 치졸한 수법이었다. 카운다의 부모는 모두 교사였는데, 잠비아로 옮겨와 아이들을 가르쳤다. 카운다의 어머니는 식민지 잠비아에서 교사가 된 최초의 아프리카 여성이었다.

물론, 카운다는 잠비아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은 잠비아 국민이었다. 이미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에 대해 부모의 국적을 핑계로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유례없는 사실상 소급입법이기도 했다. 칠루바 자신도 부모가 콩고민주공화국(자이르) 출신이라는 야당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카운다는 결국 대선출마 자격이 없어 완전히 정계를 떠나게 된다.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시도하다 좌절된 칠루바는 자신의 뒤를 이은 부통령출신 자기당 소속 레비 음와나와사(Levy Mwanawasa) 현 대통령에 의해 오히려 거액의 국고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카운다는 정계은퇴 후 다양한 자선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태그:#빅토리아 폭포, #잠비아, #리빙스턴, #케네스 카운다, #잠베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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