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월 말, 한 영화제를 취재할 일이 있었다. 그때 본 한 영화에서는 바그다드의 쿠르디스탄 독립군들이 자치지역 수립을 축하하며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관객 중 누군가는 감독과의 대화 시간 손을 들어, "저는 현재 군복무 중입니다. 많은 영화에서 전쟁 중 군인을 가해자로 그리고 있는데, 군인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가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다음 본 영화에서는 필리핀 게릴라 군이 잘못하여 민간인을 쏘는 장면이 나왔다.

영화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라디오에서는 피랍자들의 육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어떤 누리꾼들은 답글을 달아 '그냥 죽어라, 세금이 아깝다'라는 비난을 하기도 했던 때였다. 동네 앞 문방구에서 남자아이들이 총 쏘는 오락을 하고 있었고, 집에서 티비를 틀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흘러나왔다. 군대엔 미리 제외되었으며, 군대식 논리에 익숙해본 적도 없었던 한 여성으로서, 이 날 기분이 참 비통했다고만 적어두자.

'여성 평화 운동'에 대한 기사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날이었다. 취재는 단지 군사 폭력에서 여성이 애초에 집단 소외되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어떤 답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했다. 여성이 권력을 잡았던 역사는 거의 없기에, 여성이 권력을 잡으면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총을 들고 싸울지, 총 자체와 싸울지. 대상이 누구일지. 다만 확실한 건, 현재 평화를 만들어가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힘의 논리를 깨라!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김엘리 대표(좌측), 김현희 사무국장
▲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김엘리 대표(좌측), 김현희 사무국장
ⓒ 김홍주선

관련사진보기


그 중 하나,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는 '아세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1991년도 토론회를 시작으로 한다. 일본, 북한, 남한 여성들이 동북아 평화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네 번째까지 진행이 되었을 때 북핵문제가 터졌고, 1994년 북한 홍수를 거치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여성단체 각 대표들이 모여 실행위원회를 꾸렸다. 1997년 3월 27일 정식으로 창립하면서 북한 여성을 돕는 것을 첫 이슈로 하였다. 기독교 여성 평화연구원이 한국 여성 평화 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병설로 들어왔다. 1992년 '방위비 삭감을 위한 연대 모임'이 꾸려졌던 때에 여성단체와 함께 참여했던 군축운동 단체가 모임을 해체하면서 평화 여성회로 바톤을 넘겨주었다.

남북여성교류에 참여하고, 2002년도 통일행사로 금강산에 갈 때에는 700여명이 함께 하였다. 북한 측에 상설기구를 제안하였지만, 북측이 부담스러워하였다. 그 외에도 파병 반대, 전쟁 반대, 군축 운동 등에서 여성계의 목소리를 모아 전달하는 활동을 해왔다. 북핵 문제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8월 말, 성북동 사무실에서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김엘리 대표와 김현희 사무국장을 만났다. 아프간 사태에 다소 질렸던 때, "대체 군대 감축과 평화적 해결이라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긴 한겁니까"라는 기자의 하소연 섞인 질문에 김엘리 대표는 정색을 했다.

"현실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운동을 하지 않겠죠. 평화운동이라는 게 뭡니까. 사회에는 폭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정들이 많이 마련되어 있어요. 갈등을 토론과 대화로 푸는 것,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우리 사회에는 군사적 가치에 장점을 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 믿음을 흔들어야 합니다."

'힘'에는 군사적 힘도 있고 이와 결탁한 경제적 힘도 있다.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를 보면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에 맞서 선과 악이 싸우지만, 결국 그 이기는 방식이 똑같다. 싸우고 죽이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평화는 거창한 국제관계가 아니라, 일상에서 온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규탄하는 여성단체 기자회견
▲ 2006년 여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규탄하는 여성단체 기자회견
ⓒ 평화여성회

관련사진보기


사실 폭력 말고도 '현실적인' 방식은 존재한다. UN에도 해결 구조는 있고 국회도 있다. 갈등 해결 구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그럼에도 논의를 거치지 않고 '힘'을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문제라고 김엘리 대표는 말한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대화를 통해서 풀어가는 능력이 필요한데 많은 사람들이 학교 교육이나 사회 교육에서 이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권위적) 힘에 따라가는 게 능사라고 배우지만 이는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나타나지요."

때문에 평화여성회 갈등해결센터에서는 생활 속에서 보다 평화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부, 청소년, 교사, 활동가, 공무원, 대학생들 각계각층 사람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다. 남녀간 사제간 부부간 갈등을 해결하는 다양한 훈련을 한다. 왕따 문제에서 가해자, 피해자 간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최근 경찰서장의 협조로, 고소까지 이르지 않고 조정을 통해 해결됐던 K중학교 청소년 폭력 사건이 있었다.

여주 골프장 주민 찬,반 의견이 있을 때 대화 프로그램 등을 꾸리기도 한다. 사회 갈등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들을 만들어낸다. 나와 세상을 분리하지 않는 평화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매달 교육 프로그램도 꾸린다. 몇 차례 걸쳐서 폭력과 (성적) 욕설이 등장하는 집회, 시위 방식 대신 평화적 방식을 권고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평화 명상 시위나, 춤과 퍼포먼스 등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향이다. 여성과 평화의 함수관계에 대해 묻자 김현희 사무국장이 답한다.

"여성과 평화가 본질적으로 동일시 될 수 있느냐,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평화'도 훈련된다는 것입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 관계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야 하느냐 하는 것들에 대해서요. 다만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이 평화를 기를 수 있는 장으로 작동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귀를 기울이는 돌봄노동이 '상대방이 뭘 원할까'에 귀기울이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거지요. 타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성, 국경을 넘어라

여성 평화협상가 전문가 과정
 여성 평화협상가 전문가 과정
ⓒ 김홍주선

관련사진보기


평화를 염원하는 여성들의 모임은 국경을 넘은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말라라이 조야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여성과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는 평화여성회. 아프간 피랍 사태 당시, 평화여성회는 여성단체들과 함께 피랍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노란 리본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의 여성국회의원들이 '한국인 피랍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운동단체에 연락해 이에 대해 묻자 RAWA의 말라라이 조야가 단체를 대표해 성명서를 한국에 보내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최연소 여성 의원이기도 한 말라라이 조야는 현재 국회의원 자격이 정지된 상태로, 아프가니스탄 아프간여성인력촉진회(OPAWC)의 대표로 일하고 있으며, 탈레반의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

피랍 사태가 터졌을 때, 많은 한국인들이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다. 탈레반에 메일을 보내 악의적으로 피랍자들의 정보를 전달하며 '죽여달라'고 부탁한 누리꾼까지 있었다. 김현희 사무국장이 말한다.

"생명을 세금의 잣대로 재서 우리가 손해본다는 식의 논리는 정말 이기적입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복잡 미묘하지요. 탈레반이 아프간을 대표할 수는 없고, 납치라는 복잡한 상황도 아프간의 역사 속에서 나온 문제입니다. 탈레반은 무고한 생명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한국인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문제이죠. 외국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나서 나름대로 무사귀환하지만, 아프간 사람이 납치되면 거의 참수당했습니다. 정작 아프간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1000여 명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교육 의료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단체나 NGO 단체이지요. 한국에서는 굿네이버스나 개척자들에서 들어가 선교하지 않고 봉사한다는 원칙으로 구호를 펼쳐왔습니다. 이번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현지에 서툴고 미성숙하게 대처한 편이었죠. 그런데 이번 사태 이후로 다들 뿌려놓았던 구호 기반을 버리고 나와야 합니다. 나와야 할 건 이들이 아니라 군대입니다."

최근 9월 11일에서 15일, 평화여성회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미국-푸에르토리코 여성네트워크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1997년 오키나와에서 시작한 국제회의는 올해 6회째다. 오키나와, 일본, 필리핀,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주의가 낳고 있는 피해를 알리고 이에 저항하는 연대 행동을 제시한다. 한국에서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한국여성평화네트워크' 이름으로 두레방,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평화인권연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활동가와 회원 등 12명이 참가했다.

덧붙이는 글 |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e-mail : wmp@peacewomen.or.kr 홈페이지 : http://www.peacewomen.or.kr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다음 기사는 언니네트워크의 시스투어, <평화는 나의 여행> 임영신 작가로 이어집니다



태그:#평화여성회, #아프간, #탈레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