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이 사라졌다곤 하지만, 80~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야구나 축구장에서는 거친 관중들이 적지 않았다. 경기장에 주류를 밀반입해서 만취한 상태로 선수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거나 행패를 부리기 예사고, 상대팀 팬들이나 경기장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광경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라이벌팀과의 경기에서 졌다고 구단 버스를 가로막고 농성을 벌이거나 심지어는 불까지 지르는 극단적인 관중들도 있었다.

 

재미있는 게 스포츠 문화에 있어서 이런 현상이 후진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덧 21세기가 되었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스포츠에서 변하지 않은 필수적인 요소는 '열광'이다. 승부의 세계에서 느끼는 치열함과 열정만큼이나 약간의 맹목적인 광기도 스포츠에서 필요악처럼 이야기된다.

 

팬들의 거친 자기 표현방식도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물론 해당팀과 스포츠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오늘날 프로스포츠에서 팬들은 제2의 선수라고들 한다. 스포츠맨십은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만이 아니라 팬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인 것이다.

 

우리 선수와 팀이 잘할 때만 응원을 보내주고 그렇지 않을 때는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정이 아니라 사디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 팀과 우리 선수가 소중한 만큼 상대 팀과 선수 또한 존중하는 것이 스포츠맨십의 기본이다.

 

경기장에서 목청을 높여 우리 팀을 응원하고 때로는 거친 표현방식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으며, 그것도 결국 맹목적인 광기나 대상에 대한 적대감 같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최근 수원 삼성의 안정환이 2군 경기 출전 도중 상대팀 팬들의 아유를 견디다 못해 관중석에 난입한 사건이 화제로 떠올랐다. 다행히 물리적 충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선수가 관중석으로 난입한 일은 프로축구 사상 초유의 사태인데다, 이 과정에서 상대팀 구단의 일부 서포터스가 안정환의 신상과 가족들에 대해 모욕적인 야유를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유감스럽지만, 일단 이유야 어찌됐던 안정환의 관중석 난입은 분명히 징계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안정환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선수가 경기장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기본적인 법과 원칙이 있고, 안정환은 그것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에릭 칸토나(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처럼 자신을 야유하는 관중에게 두발 당성을 날리거나, 론 아테스트(전 인디애나, 농구)처럼 자신에게 물병을 던진 팬을 찾아내 격투기를 펼치는 엽기적인 행동까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선수가 관중과 일일이 마찰을 일으키는 사례를 묵과할 경우, 향후 걷잡을 수 없는 후유증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태가 결코 안정환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선에서 흐지부지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안정환이 스타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한다'식의 생각은 '팬이니까, 서포터니까' 야유와 욕설이 무슨 당연한 권리이자 문화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사고방식이다. 선수도 사람이고, 스타도 사람이다. 선수가 존중받으려면 필드 위에서 자신의 기량을 입증해야하는 것처럼, 팬들도 팬으로서 대우받으려면 마땅히 지켜야할 원칙이 있다.

 

많은 이들은 축구 선진국의 응원문화를 근거로 이야기한다. 유럽축구에서는 실제로 경기도중 국내보다 훨씬 수위가 심한 비난과 야유가 넘쳐나고, 때로는 인종차별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아기가 아버지 무등을 탄 채 경기장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들어올리는 장면은 국내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널리 회자되며 유럽의 광적인 축구문화를 반영하는 자료로 씁쓸한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응원문화가 이미 여러 차례 도마에 오른바 있다. 이번에 안정환 사태와 연관된 팀의 서포터스들도 상대팀으로부터 네거티브 응원 피해를 입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행태들이 '관행적으로 묵인되는' 것이지 그것이 올바른 행동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끔 인적이 드문 횡단보도에서 차량이 뜸한 틈을 타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길거리에서 침을 뱉거나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행위들은 모두 원칙상 불법이지만, 이런 당사자들을 모두 처벌하려면 사실상 전 국민의 80% 이상이 범죄자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부당한 행위가 적발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해서, 혹은 나 아닌 다른 이들도 동참한다고 해서 잘못된 행위 자체가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열정과 광기의 충돌 같은 갈등 요소는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거티브식 응원에 대한 자성도 없이 무조건 하나의 문화로서 합리화하려는 태도는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유럽의 열정과 시스템을 배우는 것이라면 모를까, 가장 훌리건스러운 행태를 통해 부정적인 응원문화를 포장하는 것은 구차하다.

 

선수로서 지켜아 할 규칙을 위반한 안정환은 처벌을 받아야하지만, 원인 제공의 빌미를 제공한 팬도 마땅히 공동의 책임을 져야한다. 당사자의 공개적인 사과는 물론, 해당 팬이 소속된 서포터스 역시 모든 K리그 팬과 선수 당사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가 필요할 것이다.

 

이번 사태는 유감스럽지만 팬과 선수 모두에게 바람직한 응원문화에 대한 자성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관중석 난입을 근거로 선수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린다거나, '다른 데도 다 그러는데, 왜 우리만 갖고 그러냐'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스포츠와 축구팬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무책임한 훌리건에 지나지 않는다.

 

팬의 권리와 자격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이기주의야말로, 진정한 한국 프로축구와 성장과 혁신을 갈망한다는 축구팬의 자세로서도 맞지 않는 게 아닐까.

2007.09.12 10:02 ⓒ 2007 OhmyNews
안정환 관중석난입 서포터스 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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