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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고 싶은 당신... 떠나라, 제주로 (사)제주올레는 '대한민국의 산티아고 길'을 목표로 지난 8일 '바당올레 하늘올레' 행사를 제주도 서귀포시 일대에서 열었다.
ⓒ 문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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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 걸어봐."

 

사회부장의 지시는 '나비' 같았다. 중국 베이징에 나비가 날면, 미국 뉴욕에 태풍이 분다는 말처럼, 부장의 지시는 기자에게 '태풍'을 가져왔다.

 

기자에게 주어진 취재는 (사)제주올레 발족식 현장(8일). 제주도 출장이라는 기쁨도 잠시, '태풍' 같은 존재는 바로 발족식과 함께 열리는 단체 도보여행 행사. 15km 구간, 5시간 정도를 걸어야 한단다.

 

'내가 왜?!'. 뻥뚫린 도로가 있고, 제주공항 앞에는 렌터카가 기다리고 있는데, 친절한 네비게이션이 함께 하는 자동차 여행을 버리라는 뜻인가.

 

하지만 주최측이 배포한 보도자료가 '일단 한번 걸어보시라'고 말한다. '올레'란 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어로, (사)제주올레는 잊혀지는 옛길이나 흙길 등 비포장 도로를 있는 그대로 도보 여행로로 만들어 새로운 관광자원을 만들고자 구성된 비영리 법인이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데,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전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본부장)과 부장이 걸어보라고 하니 한 번 걸어는 보기로 했다.

 

다음은 8일 오전 10시께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의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오후 4시 성산포까지 걸어서 이동한 한 '자동차 타기 애호가'의 실시간 여행기다. 

 

[오전 10시 15분] 말미오름, 오르기 전에 보니 괜찮군

 

출발 예정 시각(오전 10시)보다 30분쯤 일찍 집결지인 시흥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눈에 띄는 것은 푸른 잔디 운동장과 총 학생수 73명인 1층짜리 학교 건물, 그리고 이를 내려다보는 봉우리 하나.

 

사전 조사 결과, 분명 오르막 산길을 없다 했으니 저 봉우리에 오를리는 없겠지. 지도를 나눠주는 관계자에게 물었다. "저 봉우리 이름이 뭡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저게 말미오름입니다, 곧 오르실 거예요".

 

알고 보니 그는 도보여행의 가이드 역할을 맡은 오승국 제주4·3연구소 이사.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주 장관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기자의 먹먹한 심정한 아는지 모르는지, 출발 시각이 다가오자 참가자들은 늘어난다.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자녀를 대동한 부부, 여고 동창 같은 중년 여성들, 유모차를 끈 '신입' 엄마 등. 금세 불어나 70여명이 학교 운동장에 섰다.

 

서명숙 이사장은 출발에 앞서 도보 여행에 대해 "설명 필요없이, 여러분이 걸어보시면 왜 오늘 이 코스를 택했는지 아실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인다. '길동무'들도 쟁쟁하다.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의사 이유명호, 영화배우 김부선, 방송인 최광기, 최열 환경재단 대표 등.

 

간식거리도 제공됐다. 보리빵과 쑥떡. 인심 좋은 서 이사장의 고향 친구들이 참가자들에게 나눠줬다. 강병희 시흥리 이장도 신이 나 "마을을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마이크 없이 목청을 높여 인사했다.

 

이 사람들, 재미있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을 토요일 오전에 이 많은 사람들이 어찌 알고 모였을까. 서 이사장의 '조직'에 제주도 정보과 형사가 귀를 쫑긋 세울 만하다. 10시 30분, 참가자들은 "가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교문을 나섰다.

 

[오전 11시] 본격적인 오르막... 시흥리 인심 동날라

 

참가자들 면면을 보니 다양하다. 최연소자는 유모차에 실려 나온 생후 24개월짜리 혜나.
최고 연장자는 이유진 국제평화교류협회 이사장으로, 올해 71세.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시작길을 항상 가볍다. 하지만 출발한 지 30여분도 되지 않아 오르막이 보인다. 유모차는 접혔고, 불어오는 바람에 모자들은 벗겨져 뒷사람에게 안겼다.

 

오르막이 시작되자 '시흥리 청년회'라고 적힌 빨간 조끼를 입은 남성 5명이 얼음물을 나눠준다. "좋은 구경 하십시오"라는 인사부터 "쓰레기 버리면 안 됩니다"라는 공지까지, 외지인들의 등장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시흥리 인심이 이까지만일까. 20여분을 걸어 오름의 중턱쯤 오르자, 얼음 두 덩이가 떠있는 냉커피가 전달된다. 이번에는 부녀회가 준비한 것. 내친김에, '바람의 딸' 한비야씨가 시흥리에 소말리아 지폐 한 장을 '기증'했다.

 

제주의 조그만 마음이 소말리아 지폐 한 장을 어디에 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세상의 모든 것은 돌고 돈다.

 

[낮 12시 20분] 빈손으로 왔는데, 배가 불렀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다 보니 깃발을 따르던 대열은 늘어졌다.

 

이번 오름도 말미오름. 하지만 시흥리가 아닌 종달리쪽 오름이다. 이를테면, '말미오름 2편'. 걸을수록 멀리 있던 성산 일출봉이 점차 다가온다. 마주 본 일출봉과 우도는 마치 전투를 위해 마주선 함대 같다.

 

오름 정상에 오를 때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전날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계속됐다. 제주도 출신 참가자들은 "이런 날씨가 제주에 잘 없다"며 연신 칭찬이다. 참가자들이 첫 행사부터 '날씨 프리미엄'을 누린 셈이다. 

 

정상에 오르자 이미 도착한 참가자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아차. 취재 장비만 챙기느라 각자 챙겨야 하는 점심 도시락을 깜빡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참가자들이 샌드위치, 김밥 등을 취재진에게 나눠줬다. 빈손으로 왔는데, 되레 김밥 두줄이 수중에 남았다. 자연은 낯선 사람도 친하게 하는 것일까.

 

점심 시간 이후 출발 직전, 연신 팬들에게 싸인을 해주던 한비야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외국 친구들이 오면 제주도에 데려오다가 한동안 오지 않았다, 올 때마다 높은 건물이 서고 새 호텔이 들어서는 것이 싫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항상 '관광지' 하면 화려한 호텔과 으리으리한 네온사인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외국인 친구가 왔을 때 '한국은 이거다' 하고 내세울 상품이 없었다. 세계 여느 도시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한국의 도시들, 24시간 햄버거를 먹을 수 있고, 골목마다 세계적 커피 전문점이 들어선 한국에서 외국인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

 

[오후 1시] 흙에 살어리랏다

 

혼자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 한 가족과 동행하게 됐다. 제주에 살고 있는 정만용-김복란 부부와 세 아이들(2녀 1남). 뉴질랜드 곳곳을 다니며 풍경을 '한 수' 아는 이들은 제주도 경치에 '백점 만점'을 줬다.

 

정씨는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 곳곳을 다녔는데, 자연이 좋기는 하지만 (사람들과) 멀리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제주는 푸근하게 안아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요즘 이런 흙길이 어디 있느냐"며 "가는 길에 하늘과 구름도 보고, 아이들이 흙도 밟을 수 있고, 돈 주고 참여해야 할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했다.

 

그러게. 흙을 밟아본 지가 언제였더라.

 

[오후 1시 20분] '언니들'은 신났다

 

다음 행선지인 종달리 마을로 향하는 자동차 도로. 금세 지루해졌다. 자동차로 씽씽 달렸던 이 길을 걸으려니, 왠지 심사가 꼬인다. 대부분이 짐칸이 텅 빈 트럭들. 덥썩 잡고 싶다.

 

하지만 이같은 유혹을 제거해 준 '언니들'의 우렁찬 노랫소리. 한비야 팀장, 서명숙 이사장, 한의사 이유명호씨 등이 소녀들처럼 노래를 부른다. "토끼구름, 아기구름 짝을 지어서~". 한 곡 끝나니 자기들끼리 박수를 치고 또 부른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에요~".

 

노래가 끝나고, 수다가 이어진다. 한비야 팀장은 "자동차로 여행하면 도보의 맛을 모른다"며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만 집중하지, 오감으로 느끼면서 여행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8월 제주도 휴가 당시 네비게이션에 찍힌 '도착 소요시간'에 참 신경 썼다.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했고, 빨리 도착해서 둘러본 뒤 다른 곳에 또 욕심을 냈다. 왜 그랬을까. 일에 쫓기던 모습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아쉬워라, 내 휴가'.

 

[오후 2시 10분] 이름을 불러다오

 

종달리 마을에 들어온 뒤 해안도로를 따라 성산포 갑문으로 향했다. 일출봉이 제법 가깝게 다가왔다. 

 

도보가 길어지자 참가자들은 한둘씩 빠져나갔다. 콜택시를 부르거나, 지인에게 차를 요청해 고단한 다리를 자동차에 의지했다. 사람들의 얼굴도 점차 붉게 변했다. 어짜피 완주는 없었던 행로다. 마음껏 즐겼다면, 이날 여행은 다 한 셈.

 

길가 연못에 소시지 모양의 풀이 서있다. 모양새로는 강아지풀의 '형님' 정도일까. 뒤에 오던 한 중년 여성이 '부들'이라고 알려준다. 꽃꽂이에 많이 쓰이는 풀이라고 덧붙였다. 세상엔 이름을 불러줘야 할 생명체들이 많구나. 

   

[오후 3시 45분] "예쁘게 찍어줍소~"

 

앞에 두던 성산 일출봉을 걷다 보니 뒤에 두게 됐다. 동암사절을 지나 수마포로 들어선 것. 테이블 두 개 정도 놓을만한 좁은 횟집들이 보였다. 해녀들이 직접 잡아올린 것들을 파는 모양이다.

 

아니, 가게가 없어도 좋았다. 서울 사람들이 "직접 잡아올린 것이냐"고 전복 꾸러미를 가리키자, 곧바로 해녀들은 소줏잔과 종지를 가져온다. 고객이 사라질까, 재빠르게 초장을 담았다.

 

사진을 부탁하니, 예쁘게 찍어달라며 수경을 다시 쓴다. 방금 전과 똑같은 것 같은데…. 주름이 깊게 파여있어도 곱다. 달라붙은 검은색 고무옷이 세련됐다.

 

[오후 4시 10분] 다 왔다, 만세!

 

기쁜 소식. 최종 목적지인 섭지코지까지 30여분 더 가야 하는데, 오늘은 이만 줄인단다. 이미 많이 걸었기 때문. 시작 당시 70여명 상당의 참가자들은 어느새 30여명으로 줄었다.

 

지친 참가자들은 광치기 해변가 돌 위에 앉아 마지막으로 노래 '감수광'을 부르며 아쉬움과 피곤함을 달랬다. 도보 시작 당시,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회원 가입 신청서를 재빨리 작성했다. 서울 사무실에 있어도 제주올레의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 이날 맡은 바다냄새를 다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왕 이까지 온 김에 섭지코지까지 가보기로 했다. 물론 자동차로. 눈 깜짝할 사이 도착한다. 아, 벗어날 수 없는 자동차의 유혹...

 


태그:#(사)제주올레, #말미오름 , #성산 일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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