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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단체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들이 7월 31일 저녁 주한 미 대사관 앞에서 아프간 피랍 사태 해결을 위한 미국의 행동을 촉구하며 펼쳐놓은 피켓 위에 희생자 배형규 심성민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을 올려놓았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납치·살해 사건이 장기화 되면서 미국의 역할론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에 반미 논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범여권 인사들과 민주노동당은 "사태 해결의 실질적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미국 정부를 압박하는 반면, 한나라당은 이러한 움직임이 반미정서를 자극시킬 수 있다며 자제를 촉구하고 나선 것.

특히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대선이 4개월 남짓 남았다는 점을 감안, "한국인 피랍 사태가 자칫 '제2의 효순·미선' 사태로 가는 것 아니냐"며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범여·민노] "미국도 테러세력과 협상한 적이 있다" 압박

범여권 인사들이 탈레반에 억류돼 있는 한국인 인질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미국 역할론'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겨냥한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한국인 인질과 아프간 정부에 수감돼 있는 탈레반 '포로들'의 맞교환을 요구하고 있다. 아프간 정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톰 케이시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전날(1일) 브리핑에서 "테러범들에게 양보를 하면 궁극적으로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인질범이나 테러범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게 지난 수년 간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라면서 "우리의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탈레반과 협상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성민씨가 아프간 탈레반에 의해 추가 살해된 7월 31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아프간사태 평화해결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미국의 아프간 점령과 한국군 파병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와 관련,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탈레반이 수감자와의 맞교환을 주장하는데, 이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며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방관자가 되지 말고 선량한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말해,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장영달 원내대표도 2일 오전 한나라당 등 4당 원내대표들과 함께 미국측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떠나기 앞서 "아프간 당국도 그렇지만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UN의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자세와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2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미국 대사관측에 전달했다. 한국인 인질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미국 정부가 적극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정 전 의장은 공개서한에서 "우리 국민은 지금, 납치된 23명이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다면 미국은 어떤 조치를 취하고 행동했을 지 묻고 있다"면서 "한국민들은 이번 사태가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비롯된 만큼 미국은 제3자가 아니라 당사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압박했다.

정 전 의장은 전날 기자간담회에서도 "탈레반 세력이 제시한 포로 명단에는 미국이 관할하는 포로들이 포함되어 있고, 아프간 정부 역시 미국을 의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대부분 국제사회의 생각이다"고 지적했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천정배 의원은 "미국도 테러세력과 협상한 적이 있다"며 미국 정부가 탈레반과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천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이 테러세력과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미국은 2006년 이라크 통신원 질 캐롤 사건, 2000년 에콰도르 미국 민간인 납치사건, 1999년 콜롬비아 미국 인질 사건 등 테러세력과 협상을 했던 점을 상기하고 이번 사태에서도 인질들이 자국민이라는 생각으로 협상에 임하라"고 촉구했다.

'질 캐롤 사건'은 지난 2006년 1월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의 프리랜서 기자 질 캐롤이 바그다드에서 무장세력에게 납치됐다가, 미국이 수용소에 억류하고 있던 이라크 여성 5명을 석방시키면서 풀려났던 사건을 말한다.

강혜숙·우원식·유승희·최규성·홍미영 의원 등 열린우리당 및 탈당파 의원 33명도 이날 '굳건한 한·미 동맹을 위해 미국의 결단을 촉구한다'는 제목의 공동성명을 내고, "납치단체는 수감된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면서 "수감자 석방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어쩌면 결론은 간단하다"면서 "우리 정부가 '한·미 동맹의 공고한 발전을 도모'하고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듯이, 이제 미국이 '공고한 한·미 동맹을 위해' 우리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면 된다"고 강조했다.

범여권 인사들이 '미국의 역할론'이라면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미국의 책임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노회찬 의원은 "미국이 인질 석방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인의 안전은 알 바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미국 정부의 경직된 원칙 때문에 인질이 추가로 살해된다면 반미감정은 '효순·미선 사건' 때보다 훨씬 더 강도가 높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권영길 의원도 "테러단체와 협상은 없다는 미국의 태도는 무관심이고 무책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고, 심상정 의원은 "침략전쟁과 파병 강요가 가져온 것은 더 큰 참화이고 더 큰 테러"라고 말해 파병부대의 즉각 철군을 요구했다.

[한나라] "제2의 무슨 사건 만들려는 유치한 움직임" 경계

▲ 지난 7월 26일 오후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선경선후보 합동연설회에서 이명박, 원희룡, 박근혜, 홍준표 후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뒤 사망한 배형규 목사를 위해 묵념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나 한나라당은 한국인 인질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면서도 '미국 역할론'이나 '미국 책임론'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감을 나타냈다.

지난 2002년 대선의 '악몽' 탓이다. 당시 고 신효순·심미선양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발생해 반미정서가 확산됐고, 이런 분위기가 노무현 민주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실제 2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이러한 우려를 담은 발언들이 쏟아졌다.

정형근 최고위원은 "인질석방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미국 책임으로 돌려 마치 미국이 '비인도적'이라는 인상을 국민들이 갖도록 호도하면서 오로지 반미코드로 제2의 무슨 사건을 만들려고 하는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움직임이 있다"며 "인질석방 교섭은 물론 국익에도 절대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정 의원은 또 "이러한 무책임하고 유치한 움직임, 특히 반미 움직임을 쟁점화하려는 행동은 절대 자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의원은 오히려 한국인 피랍 사태에 대한 정부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정 의원은 "정부의 외교력과 정보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2005년 8월 31일부터 2007년 7월 25일까지 영국, 네팔, 미국, 알바니아, 인도,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덴마크 국적의 외국인을 상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11차례 납치테러가 발생했고 10여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도 충분히 예견하고 막을 수 있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상황까지 온 것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강재섭 대표도 "정치권이 섣부른 말이나 행동은 자제하고 또 즉흥적인 얘기라든지 정략적인 발언 등은 오히려 일을 꼬이게 한다는 것을 스스로 명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우려했다.

이강두 중앙위의장은 "반미를 외치는 사람들, 특히 일부 정치단체들의 무분별한 반미 때문에 미국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측 입장이냐"며 "노무현 대통령은 왜 미국에 더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지 국민에게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이날 피랍 인질 석방을 위해 미국으로 출발하기 앞서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피랍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물론 미국, 아프간 정부를 비난해서는 안된다"면서 "비난대상은 분명히 무장납치단체인데 최근 일부 정치인과 시민단체에서 반미감정을 부추기는 행동이 있어 큰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당직자들은 김형오 원내대표를 비롯한 5당 원내대표들의 방미와 관련해서도 "방문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싸잡아 반미감정을 이용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며 "괜히 반미·친미 정서에 편승하는 효과만 낳을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고 나경원 대변인이 전했다.

"아프간 사태를 기회로 이념적인 반미운동을 일으키려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이명박측 장광근 대변인), "이번 사건을 일종의 '효순이·미선이 사건'처럼 끌고 가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박근혜측 김재원 대변인) 등 대선 예비주자측도 반미정서 확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고든 플레이크 미 맨스필드 연구소장은 2일 오전 KBS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만약 나머지 인질이 희생하게 된다면 한국 국민의 입장이 변하지 않겠는가, 미국이 동맹국인데 도와주지 않아서 반미 감정 일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 2002년 마지막 밤 광화문에 미군장갑차에 숨진 효순·미선양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태그:#아프가니스탄, #한나라당, #반미, #미국 역할론, #인질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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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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