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상 깊게 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영화는 <크래쉬>(1996)다. 아무 것도 부족할 것 없는 중산층 부부가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에 자동차 충돌을 물신화한 집단을 만나게 되고 점점 자동차 충돌에 탐닉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 이 영화는 현대의 사람들이 지닌 기술과 물질에 대한 탐닉과 집착을 싸늘하게 다룬다.

그밖에 본 데이브 크로넨버그 영화는 <스캐너스>(1981), <비디오드롬>(1983), <플라이>(1986) 등이 있는데, 주로 공포영화와 공상과학영화 장르에 속하는 이 영화들 역시 일종의 기술과 은밀한 욕망의 대상을 탐닉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영화의 싸늘함은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기계의 차가운 금속의 질감을 통해 보여지곤 하는데, 이는 다른 인간을 대상화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황폐화된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마이클 하네케 영화들(<피아니스트>, <퍼니 게임>)의 싸늘함과 비교할 만하다.

▲ 카페로 찾아온 칼 포가티를 맞는 톰 스톨. 억압된 폭력의 귀환과 타락한 동부와 건전한 서부를 암시하는 장면
ⓒ 미로비전

<폭력의 역사> 2005년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찍은 영화이다. 이전의 영화들이 대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비해 이 영화는 인디애나주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카페를 운영하는 톰 스톨(비고 모텐슨)은 어느 날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를 구하기 위해 두 명의 무뢰배를 죽인다. 이로 인해 톰은 뉴스를 통해 영웅시된다. 한편, 이 사건 이후에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라는 남자가 두 명의 건장한 남자를 데리고 이 마을에 나타나는데, 그는 톰을 살인광 조이 쿠색이라고 부르며 이 동네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마을에 나타난 무뢰배들을 해치우는 남자가 영웅시되거나, 그를 제거하기위해 나타난 다른 무법자들에게 대해 마을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는 이야기는 전통적인 서부영화에서 쉽게 발견된다. 존 포드 감독, 헨리 폰다가 주연한 <내 사랑, 클레멘타인>(1946)이나 프레드 진네만 감독, 게리 쿠퍼 주연의 <하이 눈>(1953)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한편, 어두웠던 과거를 지닌 남자가 악당을 물리치지만 결국 그 지역 공동체에 편입되지 못하는 경우를 다루는 영화도 있는데, 조지 스티븐스 감독, 앨런 래드 주연의 <셰인>(1956)이 그런 작품이다. <폭력의 역사>는 위의 인물설정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서부영화의 근본적인 대립항 중 하나는 동부와 서부의 대립인데, 동부는 우유부단하거나 타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상대적으로 서부는 건강하고 강건한 분위기가 가득 찬 곳으로 묘사된다. <폭력의 역사>에서는 칼 포가티와 그의 필라델피아 악당들이 이런 타락한 동부를 대표하고, 톰과 이 마을은 건전한 서부를 대표한다.

그런데, 만약 이 영화가 그냥 톰과 칼 포가티의 대립을 그린다면 그저 현대화된 서부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전통적인 서부영화와 갈라지는 점은 칼 포가티가 등장한 이후로 주인공이 톰 스톨/조이 쿠색이라는 정체성의 혼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그와 주변 인물들을 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전 서부영화의 단순히 무법자가 법을 무시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어기고 혼란에 빠뜨리는 데서 위기가 발생하는 것과 전혀 다른 위기이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이전의 서부영화들이 미국 서부 지역에서의 문명의 도래와 공동체의 형성과정이 개인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비해 <폭력의 역사>에서는 이미 확립된 공동체가 위기를 맞는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공동체의 미래 자체가 그리 밝지 않게 그려진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은 톰의 아들 잭 스톨(애쉬튼 홈즈)를 통해 드러난다. 잭 스톨의 이야기만 따로 내놓고 보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허약한 남학생이 어떤 패거리에게 시달림을 당하다가 나중에 반격을 가하는 랠프 마치오 주연의 <가라데 키드>류의 청춘물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이런 청춘물에서 주인공이 악당을 때려잡는 것을 일종의 낭만적인 성장담으로 다루는 데 비해 잭 스톨의 반격은 그 정도가 지나쳐서 상대방 학생들이 전부 피투성이로 병원에 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즉, 잭 스톨의 반격이나 그 학생들의 괴롭힘 모두 서부의 공동체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이지 결코 외부에서 전달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불안에 떠는 에디와 사라. 남성들의 폭력때문에 불안에 떠는 여성들
ⓒ 미로비전
미국의 액션영화들을 보면 위기가 미국 외부(제3세계, 유럽, 외계인)에서 내부로 전파되고 그 위기를 주인공이 어떻게 막아내는가가 이야기의 기본 축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잭 스톨의 경우는 그 위기가 미국 사회 내부에 이미 싹이 트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톰과 잭 부자의 폭력에 얽힌 일화들은 결국 톰 일가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이 폭력은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오히려 불안과 위기로 몰아넣는데 이 불안과 위기는 톰의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와 딸 사라(하이디 헤이스)의 불안에 떠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존의 미국 액션영화를 보면 언제나 정의를 구현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는 폭력은 정당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존 웨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놀드 슈왈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이 이웃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디언, 범법자, 테러리스트들을 처단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폭력의 역사>는 적이 제거된 뒤에도 폭력의 수단이나 폭력적인 성향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사건이 해결된 뒤에 남아있는 평온함도 일시적인 것이지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태가 해결된 결말 부문이 여전히 모호하고 그리 행복한 결말로 처리되지 않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사이월드 미니홈피와 시네21 개인 블로그 '사과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광우 기자는 뉴욕대에서 영화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1년부터 뉴욕한국영화제를 위해 일했습니다. 현재는 서던 일리노이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연구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2007-07-23 11:16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사이월드 미니홈피와 시네21 개인 블로그 '사과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광우 기자는 뉴욕대에서 영화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1년부터 뉴욕한국영화제를 위해 일했습니다. 현재는 서던 일리노이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연구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폭력의 역사 서부영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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