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게 점수를 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홈런이다. 야구를 즐기는 팬들을 가장 열광시키는 것 또한 홈런이다. 홈런은 야구의 꽃이다.

1919년 '맨발의 조' 조 잭슨이 포함된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의 월드시리즈 승부조작 사건(블랙삭스 스캔들)이 터지면서 위기에 몰렸던 메이저리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1920년 반발력이 큰 라이브볼 시대와 괴력의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가 절묘하게 만났기 때문이다.

1920년 베이브 루스는 무려 54개라는 경이적인 홈런을 때려내며 메이저리그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전 데드볼 시대에 고작 11개(1918년 베이브 루스)의 홈런을 치고도 홈런왕에 오르는 모습을 보아왔던 팬들은 드디어 야구가 주는 가장 큰 재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라이브 볼 시대로 접어들자 루스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선수들의 장타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 때 위기에 몰렸던 메이저리그가 다시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홈런의 힘이었다. 홈런은 사람들을 열광시킨다.

그런데 1982년 메이저리그는 조금 다른 것에 열광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삼진을 뽑아내는 투수가 등장한 것도 아니었고 매 경기 안타를 때려대는 신기의 타자가 등장한 것도 아니었다. 1982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빠른 발이었다. '야구가 육상의 트랙 경기도 아닌 마당에 빠른 발이 뭐가 대수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주인공이 무려 130개의 루를 훔쳐낸 1982년의 리키 핸더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82년 '대도' 리키 핸더슨은 메이저리그를 통째로 훔쳤기 때문이다.

최강의 1번타자가 된 리키 핸더슨

 '대도' 리키 핸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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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리키 핸더슨은 1976년 아마추어 드래프트 4라운드(전체 96순위)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문을 하게 된다. 핸더슨은 고교시절부터 야구뿐 아니라 미식축구 러닝백으로도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냈을 만큼 뛰어난 발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다.

오클랜드는 핸더슨이 마이너리그에서 높은 출루율과 엄청난 도루능력(1977년 95개, 1978년 81개)을 보여주자 1979년 6월 메이저리그로 승격을 시키게 된다. 1979년 88게임에 출장을 한 핸더슨은 96개의 안타와 1개의 홈런, 26타점, 타율 .274를 기록하며 데뷔 첫해를 성공적으로 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해 아메리칸리그 7위에 해당하는 33개의 도루를 성공하며 메이저리그에서도 자신의 발이 유효함을 보여줬다.

1980년 적응기를 끝낸 핸더슨은 드디어 질주 본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게 된다. 1980년 핸더슨은 1번 타자로는 경이적인 .420(리그 3위) 출루율을 기록하는 등 158게임에 출장해 179개의 안타와 9개의 홈런 .303의 타율을 기록하며 무려 100개의 도루를 성공했다. 100개의 도루왕이 탄생한 것은 아메리칸리그가 생긴 이후 최초의 일이었으며 메이저리그를 통 털어도 1900년 이후 핸더슨을 포함 단 세 명만이 달성한 놀라운 기록이었다.

80년 핸더슨은 총 301번을 베이스에 나가 100개의 도루를 성공한 것이다. 나가면 무조건 뛰는 1번 타자 핸더슨은 메이저리그 투수들과 포수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떠오르게 되었다. 1981년 마빈 밀러가 주도한 메이저리그 파업의 여파로 시즌 경기수가 대폭 줄어들면서 2년 연속 100도루를 기록하는 데 실패를 했지만 135개의 안타(리그 1위)와 4할이 넘는 출루율, 56개의 도루(리그 1위)를 기록, 아메리칸 리그 MVP 2위에 오르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제 핸더슨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위력적인 1번 타자로 성장을 한 것이다. 그리고 메이저리그를 경악시켰던 문제의 1982년이 밝아왔다.

'대도' 메이저리그를 훔치다

 1982년 130개의 도루를 기록했던 리키 핸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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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더슨은 1982년 4월 8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의 시즌 세 번째 경기에서 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사를 바꾸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핸더슨은 4월에 벌어진 22경기에서 22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엄청난 페이스를 보여줬다. 그러나 4월 한 달 동안 18개의 안타(타율 .228)만을 때려냈을 정도로 핸더슨의 타격감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4월 한 달 동안 겨우 18개의 안타를 때려낸 핸더슨이 22개의 도루를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110타석에서 무려 31개의 볼넷을 골라내는 놀라운 선구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4월 타율이 고작 .228인 핸더슨의 출루율은 .445에 달했다.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핸더슨 역시 배리 본즈처럼 숱하게 걸어나간 것이다.

5월 들어 타격감이 살아난 핸더슨은 28경기에서 27개의 도루를 성공하며 더욱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핸더슨이 5월까지 벌어진 50경기에서 49개의 루를 훔치며 거의 매 경기 한 개씩의 도루를 기록하는 페이스를 보여주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핸더슨이 1974년 세인트루이스의 루 브록이 기록한 118개의 도루를 과연 깰 수 있는가에 모아졌다.

기록은 깨라고 존재하는 것이라지만 루 브록이 세운 118개의 도루 기록은 당시만 해도 도전 자체가 불가능한 기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핸더슨은 바로 그런 불가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7월이 끝났을 때 핸더슨은 103경기에서 99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7월까지 핸더슨은 두 번의 홈스틸과 27번의 3루 도루를 성공했다. 더 이상 핸더슨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1982년 8월 26일 밀워키 브루워스와의 원정 경기에 나선 핸더슨은 게임이 시작하고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은 1회초, 투수 마이크 카드웰과 포수 테드 시몬스를 두고 118번째 도루를 기록하게 된다.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118개의 루를 핸더슨이 기어코 훔친 것이다.

10월 3일 캔자스시티 로얄스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3개의 루를 더 훔친 핸더슨은 1982년 149게임에서 130개의 도루를 기록, 루 브록을 뛰어넘어 메이저리그의 도루 역사를 바꿔버렸다. 핸더슨 자신이 아니고서는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위대한 기록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라운드로 돌아온 핸더슨

44살이 된 2003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한 리키 핸더슨은 통산 3081게임에 나와 3055개의 안타와 297개의 홈런 그리고 1406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90년에는 .325의 타율과 28개의 홈런 그리고 65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MVP에 올랐으며 통산 12번이나 도루왕을 차지했다. 1998년에는 39살의 나이가 무색하게 66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1979년 아메리칸리그에서 8번째로 어린 선수였던 핸더슨은 2003년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가 되었을 정도로 세월은 그의 다리만큼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다. 10번의 올스타전 출전(스타팅 올스타 7번)과 세 번의 실버슬러거, 한 번의 골드 글러브 그리고 세 번의 한 시즌 100도루를 기록한 리키 핸더슨은 2003년 LA 다저스에서 3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화려했던 25년의 메이저리그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모두가 은퇴라고 믿었지만 사실 핸더슨 자신은 은퇴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이후에도 핸더슨은 지속적으로 현역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2007년 핸더슨은 선수가 아닌 뉴욕 메츠의 코치가 되어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도' 리키 핸더슨도 세월을 거슬러 달려가지는 못한 것이다.

도루가 홈런만큼이나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며 사람들의 마음까지 훔쳤던 '대도' 리키 핸더슨의 멋진 제2의 인생을 기대한다.

리키 핸더슨 대도 130도루 메이저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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