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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우리의 지프차
ⓒ 박동구

솔직히 많이 억울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동안 좁은 차 안에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그렇단 말이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전 회에도 썼지만,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프랑크푸르트행 야간열차를 미리 예매해 놓았고, 월드컵 티켓으로 나를 구제해 준 현기도 좀 시간이 늦은 관계로 침대칸은 아니었지만, 열차표를 구할 수 있었다. 헌데 동구 형이 우리와 함께하게 되면서 일이 좀 달라졌다. 동구형의 제안은 이랬다.

“기차도 좋지만, 차로 프랑스-독일 고속도로를 달려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가 아는 분이 있는데, 얘기 잘해보면 우릴 프랑크푸르트에 대려다 줄 수도 있을 거야.”

기왕 함께 하기로 한 동구 형이 늦은 합류로 인해 열차표를 구할 수 없는 상태였기도 했지만, 제안이 솔깃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우리는 동구 형이 잘 안다는 임 선생님의 차를 얻어 타고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가기로 했다.

열차표의 경우, 13일 우리나라와 토고의 첫 경기를 하루 이틀을 앞두고부터 물밀듯이 밀려오는 한국응원단 덕택에 11일부터는 거의 기차표를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특히 13일 아침에 도착하는 파리-프랑크푸르트 야간열차의 경우 응원단으로 인해 완전 매진되었다.

▲ 차창으로 보이는 독일의 한가로운 마을
ⓒ 김현기

여하튼 12일 아침 프랑스-독일의 고속도로를 달린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더구나 약속한 장소를 갔더니 우리 말고도 2명의 동행인이 더 있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아닌가! 이거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전정희와 이자영이라고 이름을 밝힌 두 미녀와 함께, 우리 셋이 이러한 밝은 분위기를 잃어버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 선생님의 지프차는 설명과는 달리 우리 셋이 타면 충분할 크기였다. 한데 여기에 둘이 더 같이 가니, 타는 순간부터 ‘온전히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1시간 정도는 어떻게 참아보았지만, 불편한 자세로 인해 슬슬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유쾌한 동구 형과 현기의 장난과 개그로 분위기 반전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짐짝같이 몸을 찡겨가는 듯한 느낌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불편함은 상관없다는 듯, 임 선생님도 오랜 운전으로 짜증과 피로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반나절을 더 달려 프랑스 국경을 넘을 때쯤엔 정말 쉬지 않고는 못 갈 상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들판은 널찍하고 여유로웠지만, 비좁은 차 안에서 몸을 돌리기도 어려운 상태였던 우리는 그러한 들판을 보고 여유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지역 경계선 같은 유럽의 국경 넘기

▲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검문소
ⓒ 강병구
서로의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인 시점,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도착했다. 눈앞에 보이는 검문소에 긴장을 했지만, 아무런 제지도 없이 지났다. 좀 쉬었다 가자는 누군가의 제안으로 차를 검문소 옆에 세우고 검문소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 '독일 연방 공화국'이라는 검문소 표지판
ⓒ 박동구
‘여기서부터는 독일이에요!’하고 말하는 듯한 간판과 검문소 옆 편의점과 주유소가 눈에 띄었다. 검문소를 외국인이 어슬렁거리니 ‘누가 와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검문소에 사람이 없는 것인지, 우리가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누구하나 우리에게 오는 사람이 없었다.

러시아에서 에스토니아로 넘어갈 때 같은 긴박함이나, 고압적인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동차로 국경을 넘는 흔치 않은 경험에 우리는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더 있었다.

우리가 돌아보고 있는데, 캠핑카 한 대가 우리 근처에 차를 세우더니, 사람들이 내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더니 우리처럼 사진을 찍고 돌아보는데 정신이 없었다.
장난 끼가 발동한 현기가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자, “스페인”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에게 되묻기에 “South Korea”라고 하자, 놀라는 눈치를 보이고는 이내 장난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2002년을 기억한다며, 우리에게 웃으며 몇 마디를 던졌다. 우리나 그들이나 서로 짧은 영어실력이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모두 월드컵 때문에 모이고 있다는 점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서로에게 “Good Luck!"이라는 덕담을 해주며 헤어졌다.

▲ 검문소에 만난 스페인 응원단과 함께
ⓒ 박동구

한국에 있으면 국경이란 것이 막연하게나마 두려운 존재란 느낌을 받는다. 북한과 남한이 총칼로 막혀있고, 설사 통일이 된다하더라도 중국을 육로로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독일을 넘어가는 이곳에서는 그런 두려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이곳의 국경은, 마치 서울에서 경기도로 넘어갈 때 나오는 “잘 가세요”, “반갑습니다” 같은 표지판 경계선을 넘는 느낌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역 앞을 점령하며 벌인 승리의 전야제

국경에서부터 다시 서너 시간을 더 가자 드디어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생각해보면 운전하느라 임 선생님이 제일 고생하셨지만, 그때는 그냥 그 차를 벗어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서로 이런저런 불만이 쌓인 끝에 별 좋은 인사도 못 나누고 그냥 헤어져버렸다.

▲ 경기 전 날, 무던히도 한국 응원단을 토해내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 박동구

프랑크푸르트에는 도착했지만, 연고도 숙소도 없는 우리로서는 당장 오늘 밤을 지낼 것이 막막했다. 하지만 그 막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역 앞의 광장에 붉은 티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일루와! 일루와!”를 외쳤다. 한 5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들 한 목소리로 불러대는 것이 좀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렇게 불러대는데 안 갈 수도 없지 않은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함께한 자리에는 서로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신혼여행으로 프랑크푸르트를 오셨다는 형님부부부터, 대한민국의 각지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서 온 학생, 교포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었다.

▲ 역 앞에서 날이 새도록 함께 응원한 사람들
ⓒ 박동구
그 자리에서 친해진다는 말은 정말 절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맥주 한 잔과 누군가의 선창으로 “대~~한 민 국!” 하는 응원 한 마디를 듣자 모두들 열광하며 따라 불렀다.

프랑크푸르트 역 앞의 터키 음식점은 우리로 인해 정말 대박이 났다. 역에서 나오는 한국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처럼, “일루와!! 일루와!!”를 불러대니 조만간 사람들은 100여명에 가까웠다.

처음 함께하기 시작할 때 보이던 미국, 영국, 호주, 브라질 응원단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넓은 광장 테이블을 빨간 티를 입은 한국 사람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신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어떤 약속도 없이, 사전에 아는 것도 없이 그냥 한국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이국땅에서 자랑스럽게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나중에는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영국, 독일의 응원단도 함께 “대~~~한 민 국!!”을 외치며 함께 했다.

내일 승리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그 자리는, 해가 뜨는 아침 5시 반까지 이어졌다. 모두들 오늘의 승리가 당연하듯, 그리고 오늘 밤 너무나 즐겁게 함께 하자는 말로 헤어졌다.

이제 결전의 날이 밝았다. 드디어 오늘, 6월 13일, 2006 독일 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중동부 유럽 정보는 지역의 특성상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많이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여행기는 독일월드컵 이야기와 함께, 유럽 중에서 제가 경험한 특별한 이야기와 흔히 잘 소개되지 않는 여행지를 중심으로 소개 하겠습니다. 

지난 2006년 4월 21일부터 7월 28일까지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유럽 여러 국가를 여행했습니다. 약 3개월간의 즐거운 여행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다음 기사는 7월 10일(화요일)에 이어집니다. 

사진을 제공해주신 김현기, 박동구님께 감사드립니다.


태그:#유럽, #독일 월드컵, #프랑스,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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