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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개막전, 함부르크 번화가에 내걸린 만국기 중 태극기
ⓒ 강병구
노르웨이 오슬로를 마지막으로, 북유럽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내려온 2006년 6월의 첫째 주. 아직 월드컵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독일은 이미 월드컵 분위기였다. 학교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브레멘에 며칠을 묶으며 본 독일의 분위기는 2002년의 우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2002년의 우리보다는 좀 차분한 분위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약간은 들뜨고 뭔가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것만은 동일했다. 다만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며칠 전까지도 예년의 기온을 회복하지 못하는 날씨는 문제가 있었다. 아직도 영상 십 몇도 정도의 날씨가 계속되는 통에 아프리카 선수들이 감기에 걸렸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아직 쌀쌀한 독일 날씨가 걱정되었지만, 그보다는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갈수록 독일까지 와서 월드컵 경기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현실화 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표는 이미 전부 매진되었다고 하고, 백방으로 알아봐도 표를 살 길도 막막했다.

그저 경기 당일 줄을 서서 얼마 남지 않은 티켓을 구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100% 사전 예매제라 경기장에서 표를 팔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난감했다. 표를 알아봐 주겠다는 후배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점점 더 막막해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브레멘에서 1주일 정도를 보내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월드컵 경기 못 보면 어쩔 수 없지, 뭐', '남들 월드컵 볼 때 그냥 여행이나 하자', '다들 월드컵에 신경 쓰느라, 오히려 한가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었다.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무슨 이유에서인지 '혹시 또 모르지' 하는 한 가닥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월드컵 개막이 3일 남은 6월 6일 저녁 그런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파리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왠지 한숨 푹 자고 나면 모든 일이 해결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말이었다.

구세주, 동갑친구를 만나다

▲ 파리의 상징, 샹제리제 거리 끝에 있는 개선문
ⓒ 강병구
6월 7일 오전, 파리 북역에 내려 막막한 여행이 또 시작되었다. 뭘 할지 어디로 갈지도 정해지지 않은 오전 11시, 처음 와보는 도시의 기차역에서의 분주함은 사람을 급격히 막막하게 만들었다.

'결정했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3일 날은 프랑크푸르트로 가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13일 도착하는 프랑크푸르트 행 기차표를 예매하고, 다음으론 숙소를 찾아보았다. 파리에 그 많다는 한인민박집 중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곳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방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파리 지하철을 이용해 그곳으로 향했다.

민박집에 도착해서도 월드컵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표를 구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하느라, 파리 여행은 뒤로 미뤄두고 인터넷 검색이 여념이 없었다. 파리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보다는 월드컵 표를 구할 방법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어정쩡한 파리에서의 이틀을 보내고 이젠 그냥 포기하기로 할 때쯤 구세주가 나타났다. 월드컵 개막날인 6월 9일 저녁, 민박집으로 한 명의 여행객이 찾아들었다. 아직 여행 시즌이 아니라 한가한 민박집에 온 그는 대번에 월드컵을 보러 왔다고 이야기를 했다.

▲ 두번째 경기가 있었던 라이프치히 경기장 앞에서 입장권을 든 현기와 나
ⓒ 김현기
속으로, '자식, 진짜로 좋겠네. 표를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부러움이 가득해지던 순간, 깜짝 놀랄 이야기를 더했다.

"제가 표를 우리나라 조 예선 경기당 3장씩 가지고 있어요."

나는 단 한 장도 갖지 못한 표를 3장씩 가지고 있다니. 우선 급히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반가워요. 그런데 표를 3장씩 가지고 계신다고요?"

알고 보니 부모님과 함께 월드컵 경기를 보려고 큰 마음 먹고 구입한 표였는데, 부모님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혼자 왔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하지 못한 그 친구의 부모님에겐 정말 죄송하지만, 월드컵 표를 학수고대하던 나에겐 갑자기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준 것 같았다.

"저는 여행한 지 한 달 좀 넘은 강병구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염치없는 자기소개였다. 표가 3장 있는지를 확인하고, 표를 팔 의향이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야 이름을 말했으니 말이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고, 막 파리에 도착해 어안이 벙벙한 상태라고 했다. 마침 여행을 같이하겠다는 나를 만나 무척 반갑다는 그 친구가, 사실은 내가 더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만난 동갑내기 구세주 김현기가 앞으로 나와 유럽을 함께하며 정말 많은 경험을 하게 될지는 아직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월드컵 관람 가능성을 열어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만 보였다.

월드컵 삼총사 완성되다

▲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찍은 동구형, 현기, 나
ⓒ 박동구
현기를 만난 후 나의 파리 여행은 급격히 즐거워졌다. 비록 당시 월드컵 티켓이 사전에 예매된 사람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한다는 엄포가 있던 터라, 현기 부모님 앞으로 되어있는 티켓으론 못 들어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했지만 우선은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현기와 파리 시내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온 10일 날 저녁, 또 한 사람의 월드컵 동행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나와 마찬가지로 월드컵을 구경할 생각에 몸만 유럽으로 왔다는 박동구 형님이 민박집을 찾아왔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민박집 손님으로 생각한 그 형님을 특별하게 보게 된 것은, 저녁을 먹고 민박집 사람들과 술 한 잔을 하면서였다. 워낙 달변에 유쾌한 영혼을 가진 동구 형과 그에 못지않게 유쾌한 현기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민박집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다 나온 한 마디.

"내가 월드컵을 꼭 봐야하는데 아직도 표를 못 구했네."

나와 현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표 한 장 더 있는데, 같이 가실래요?"란 말을 당연한 듯 꺼냈다. 무척이나 흥분된 응답의 동구 형은, 당연히 반드시 같이 가겠다는 다짐을 하며 거짓이 아니냐는 확인도 했다.

유쾌하고 사진 전문인 두 사람의 동행과 그토록 고대하던 월드컵 티켓이 한꺼번에 생긴 그 몇 일간의 일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짜여 있던 각본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군가 내게 꼭 월드컵을 보여주려고 계획해주고 있었고, 그동안 외로이 고군분투 여행을 했으니 이제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허락해주는 듯 한 일들이었다.

이렇게 파리에서 만난 월드컵 삼총사는 정말 황당하고 어렵기도 했지만, 후회 없을 즐거운 동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총사와 함께,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의 설렘이 째깍째깍 지나가는 시간 단위로 점점 더 증폭되고 있었다.

▲ 현기와 동구형 덕분에 함께할 수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의 토고전
ⓒ 박동구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연재한 러시아, 북유럽 여행기와는 달리, 앞으로의 중동부 유럽과 월드컵이야기는 인상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연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중동부 유럽에 대한 정보는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많이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앞으로의 여행기는 제가 경험한 특별한 이야기와 흔히 잘 소개되지 않는 여행지를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지난 2006년 4월 21일부터 7월 28일까지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유럽 여러 국가를 여행했습니다. 약 3개월간의 즐거운 여행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다음 기사는 7월 3일(화요일)에 이어집니다.

사진을 제공해주신 김현기, 박동구님께 감사드립니다.


태그:#유럽, #독일 월드컵, #파리, #삼총사,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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