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성북역 근처 가내 편물공장에서 일을 할 때였습니다. 일을 마치고 단짝 친구인 태남이와 단골 아줌마의 포장마차에 들러 핫도그를 사 먹고 옷 구경이나 하자며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데 누가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돌아보았더니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 아저씨는, 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저만치 가다 돌아왔다며 혹시 순천에 있는 애양원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했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자기 말을 잘 들어보라며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분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순천에 가면 나환자 촌 바로 옆에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가 운영하는 애양원이라는 병원이 있는데, 저 같이 아픈 다리를 잘 고치는 병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동생은 저보다 더 심했는데 수술을 받고 난 후 아주 좋아졌다며 어떻게 운영되는 병원이며, 수술은 어떻게 하고, 회복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선교사들이 봉사를 위해 만든 병원이라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며 꼭 가보라고 가는 방법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소아마비는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알고 있었기에, 쉽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라는 말이 자꾸 귓전에서 맴돌았습니다. '미국에서 오셨다니 기술이 더 발달했겠지'하며 그분의 구체적인 설명에 자꾸 마음이 끌리고 있었던 거지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 여섯이었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나 누가 나 같은 장애인을 아내로 삼으랴 하며, 결혼도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수술을 하여 다리가 좋아지면 내 이상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제 말을 반도 안 믿었지만 원이나 없게 해주자는 심정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전화 예약을 하고 언니와 함께 애양원으로 가서 그날은 접수만 하였습니다. 대기자가 많아 접수 후 1년쯤 기다려야 검사를 할 수 있고 수술날짜도 그때 정해 준다고 그 아저씨가 미리 말씀해 주셨지요. 먼 길을 와서 달랑 접수만 하고 돌아오려니 많이 아쉬웠지만 어쨌거나 접수는 해 놓았으니 희망을 가득 안고 올라왔지요.

그리고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다리 수술을 할 거라며 그러면 많이 좋아질 거라고 자랑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두 달, 손꼽아 기다리는데 딱 1년쯤 후 연락이 왔습니다. '아! 드디어 수술을 하는구나? 어느 정도 좋아질까? 계단을 한걸음에 뛰어 내려올 정도? 아니면 지팡이를 안 짚고 다닐 수 있을 정도?' 구름처럼 둥실거리는 부푼 가슴을 안고 또 언니와 함께 순천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한여름이었지요. 진찰이 아침에 있다기에 전날 오후에 도착해 병원 근처에 있는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습니다. 민박집에는 수술한 환자들이 회복을 기다리며 장기투숙 하는 사람도 있었고, 저처럼 진찰을 받으려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 줄로 쭉 늘어선 방 앞 쪽마루에는 환자들이 더위를 피해 나와 앉아 있었는데 저를 보더니 검사받으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였더니 제 다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아가씨는 다리 길이가 많이 차이 나지 않으니 조금만 잘라내도 되겠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언니가 얼른 그 말을 받아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수술의 첫 단계가 절룩거리지 않게 다리 길이를 맞추는 것인데 긴 다리를 짧은 다리에 맞추어 자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속으로 '헉'하며 안 그래도 다리 때문에 키가 작은데 내 키가 얼마나 더 작아질 것인가 하고 걱정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다리가 좋아진다면야 하며 마음으로 다잡고 있는데, 그 환자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수술은 대부분 3차까지 하는데 기다리는 환자가 많아 한 번 수술 하고 나면 다음 수술까지는 1년 가량을 기다려야 하고 모든 수술을 마치고 회복이 되려면 최소한 3년은 걸릴 거라고 하는 그 환자는 이미 반 의사가 다 된 것 같았습니다.

그 환자에게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듣고 해질 무렵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마루에 잠시 걸터앉았는데 뭐가 눈앞으로 휙휙 날아다니며 동공을 흐리게 했습니다. "이게 뭐고?"하며 손을 허공에 저어 쫓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모기였습니다. 여기저기가 따끔거리며 가렵기 시작하는데, 언니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에 보던 모기보다는 두 배쯤은 더 크고 방문에 하얀 종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왜 여기 앉아 있느냐고 이러고 있다간 모기에게 다 뜯긴다며 모기를 쫓아내듯 우리를 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방문을 여니 일제히 날아오른 모기들이 와~~ 하고 따라 들어왔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며 뿌리는 모기약을 잔뜩 뿌려주고 갔습니다.

이건 모기를 잡으려다 사람까지 잡게 생겼습니다. 독한 모기약 냄새로 캑캑거리며 떨어지는 모기를 쓸어 담는데 방바닥이 까맣습니다. 바닷가 모기를 처음 보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많은 모기는 생전에 처음 보았습니다. 화장실을 가려고 방문만 열면 100미터 달리기의 출발점에 서 있던 아이들처럼 와~ 하고 날아 들어왔습니다. 게다가 제 동작이 민첩하지 못하니 더 많은 모기가 방으로 날아 들어왔지요.

딱 한 번 모기약을 뿌려 준 아주머니는 다시는 오지 않았고, 그 무더운 여름밤에 선풍기도 없는 방문을 꼭꼭 닫아걸고 땀을 줄줄 흘리며 모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모기를 언제 다 잡을 수 있겠습니까? 땀 냄새를 맡은 모기들만 더욱 신나고,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와 사정없이 쏘아대는 모기와의 사투를 벌인 그 밤은 바로 악몽의 밤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닷가의 모기라 하지만 그렇게 크고, 많고, 독한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벌겋게 충혈된 눈과 온몸에 툭툭 붉어진 대추씨만한 혹을 매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선생님은 다리를 앞으로도, 뒤로도 올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힘없는 다리는 어느 방향으로도 올리지 못했고, 꾹꾹 눌러도 보고, 구부려도 보더니 이 다리에서 쓰는 힘이 하나도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겨우 엄지발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다며 그 유일한 엄지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였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시던 선생님은 다리가 곧게 뻗어 있어 걸을 수는 있지만 이 다리에서 쓰는 힘은 하나도 없다며 수술을 하더라도 힘이 더 주지는 못해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렵겠다고 하셨습니다. 소아마비라고 해도 천차만별이라 다리가 굽고 돌아간 것은 펴고 돌릴 수 있지만 다리 자체에 힘이 없는 것은 힘줄 이식술이 개발될 때까지 어쩔 방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릎 쪽에 한 가닥의 힘줄이라도 살아 있으면 그 힘줄을 이용해 더 많은 힘을 쓸 수 있도록 할 수 있는데 라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발을 디딜 때 발 안쪽으로 쏠리는 발목은 바로 잡아 줄 수 있다며 그 수술이라도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어차피 다리에 힘을 더 가할 수 없다면 그깟 발목수술은 해서 뭐하랴 싶어 그냥 병원 문을 나서고 말았습니다.

수술을 하면 예쁜 치마에 예쁜 구두를 신고 한껏 멋을 부리고 싶었는데, 뛰지는 못할망정 지팡이는 내버리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는데 1년 동안 꾸어 온 내 모든 꿈은 환상 속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실망이 큰 언니도 마땅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어젯밤 모기에게 물린 자국만 애꿎게 벅벅 긁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둥둥 떠다니던 내 꿈은 어디로 갔는지 무심한 하늘엔 흰 구름만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습니다

내 꿈을 도둑맞은 그날, 저는 무시무시한 바다 모기에게 뜯긴 훈장만 가득 달고 힘없는 발걸음을 터덜거리며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생각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수술을 하였더라면 지금의 남편도 또 예쁜 두 딸도 만나지 못했겠지요.

지금도 순천 애양원 옆 민박집에는 그 무시무시한 모기와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여름의 불청객 '모기'를 말한다>에 응모


태그:#모기, #애양원, #순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