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슬 락 엔터테인먼트
한 달 전쯤부터 난 지독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다. 어디 바람 쐬고 오는 차원이 아닌 떠난다는 느낌으로. 그래서 혼자 낯선 곳을 걸어 다니고 싶었고 그리고 낯선 곳에서 혼자 잠들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막연하게 바라던 바람이지만 지인들은 그렇게 하나 둘 여행 가방을 가득 채운 채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그래서 믿지 않는다.

그런 나를 먼 나라로 여행하는 기분으로 만들어 준 영화가 있다.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 아쉽지만 스크린은 나를 보듬어, 떠나는 그들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게 해 주었다.

기차. 내게 여행의 설렘은 기차에서 부터다. 내 계획 안에 모든 교통편이 기차로 예정되는 이유는 덜커덩 덜커덩 소리를 내며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주위의 경관을 둘러보게 하는 경춘선의 낭만이 기억되서인지도 모르겠다. 꼭 삶은 계란을 사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곤 했었다.

영화 속 그들도 기차 안에서 마주친다. 미국 청년 제시(에단 호크)는 마드리드에 유학 간 여자 친구에게 실연당한 상처를 안고. 셀린느(줄리 델피)는 방학을 이용해 부다페스트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고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다.

첫 만남은 유레일패스 옆 좌석에서 싸우는 독일 부부 덕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남녀가 오래 함께 살면 여자는 잔소리가 많아지고 남자는 침묵하는 이치가 유럽의 부부들 간에도 통하는 것일까. 제시와 셀린느는 그들을 피해 자리를 옮기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지난 2주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는 제시는 셀린느와 말이 통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곤 낯선 곳 비엔나에서 내리기를 권한다.

정말이지 멋진 건 여행은 계획되지 않은 일들이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 미지의 곳에서 경험하는 비일상적인 것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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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대화를 나누며 여행을 하는 것이다. 여행이 먼저이든 대화가 먼저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녀가 처음 만나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마음에 다가가고 이해한다.

항상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되지 못하는 13살 소년 같다고 하는 제시와 자신의 인생은 침대에 누워 젊은 시절을 반추하는 노파의 추억 같다고 하는 셀린느. 그들의 감성은 잔잔한 듯 하지만 신선하고 거침이 없고 결코 지루하거나 가볍지 않다.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순수한 생각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비엔나 도보 여행은 마냥 즐겁다. 도로 위를 누비는 버스, 열세 살에 죽음을 맞게 된 소녀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서부터, 놀이공원, 술집에 이르기까지. 웬 모르는 현지인에게서 연극 초대권도 받게 되고 새벽녘 어딘가에서 울리는 음악소리에 조용히 춤을 추기도 한다.

그들에겐 자유와 젊음 그리고 진심 어린 소통과 교감이 함께한다. 그들의 막힘없는 얘기에 집중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헤어져야하는 시간 그들의 만남은 기차에서 시작해 기차에서 끝이 난다. 마지막 화면이 그들이 함께 한 빈 거리를 비출 때 우리는 그와 함께 추억하게 될 것이다.

여행. 여행이 주는 매력은 이렇게 얘기치 못한 순간에 마주치는 상황들에 대한 막연한 로망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때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동경한다.

이전의 나를 모르는 새로운 나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기차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낯선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턱이 땅에 닿을 듯이 일상의 무게에 지치고 지친 당신이라면 한 번쯤 가방을 싸보길 권하고 싶다. 누군가 내게 그랬다. 여행이 너무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가방을 싸세요”라고.

셀린느와 제시. 그들은 또다시 막연한 날을 기약하며 헤어지지만 추억은 어쩌면 추억할 때만이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 캐슬 락 엔터테인먼트
2007-06-25 13:5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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