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처가 필요했다. 밀양은 그저 핑계였다. 죽은 남편의 고향이라는 설명은 애초부터 변명거리에 불과했다. 고장난 차와 지친 모자를 밀양으로 인도해 준 카센터 김사장(송강호 분)에게 신애(전도연 분)는 “밀양(密陽))은 비밀스런 햇볕이라는 뜻이에요”라고 조잘댄다. 평생 밀양에서 살아온 토박이 앞에서 말이다. 그렇게 막연한 희망으로 밀양에 들어와 피아노 학원과 살림집을 얻고 신애는 아들 준이와 ‘정착’한다. 남편이 외도 중인 채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비밀’과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밀양이 좋다는 고백이 이 작은 여인을 약간 연민의 눈으로 보게 할 무렵,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닥친다. 아들이 유괴됐다. 믿고 맡겼던 웅변학원 원장에게 살해된 아들은 외곽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낯선 도시에서 행여 누가 무시할까봐 돈푼깨나 있는 척한 죄의 대가로는 너무 컸다. 땅 몇 번 보고 다닌 죄로 결국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소도시에서 표적이 된 그녀는, 돈 870만원 때문에 아들을 잃는다. 남편 잃고, 아이를 유괴 살해로 잃고, 눈물조차 못 흘리는 이 아픈 여자는 결국 저도 모르게 개척교회에서 하는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에 간다. 아들이 살아있을 때부터 피아노 학원 앞 약사에게 누누이 들었던 소리, 그토록 부인하고 싶었던 복음 말씀이 그 순간 자석처럼 신애를 끌어당긴다. “원장님처럼 불행한 분에게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그러나 신애의 안수 기도 장면이야말로 현재 한국 개신교에 대한 조롱처럼 보인다. 교회는, 지금 한국에서 교회라는 장소는 그저 목 놓아 실컷 울 수 있는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는 급격히 코미디로 선회한다. 한 가련한 여인을 점점 더 불행하게 만들어 마침내 신자 수 한 명 더 늘리고 몸집을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교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괴기스런 ‘전도’였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일부러 내려와 살았던 용감하고도 무모했던 그녀는 낯선 도시에서 점점 신앙에 ‘미쳐간다’. 교회는 정말이지 사람을 외롭게 놔두지 않는 곳이었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활기찬 이벤트의 집합체인가를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혼자라는 실존이 진절머리 나게 싫은 상처받은 영혼이 교회에서 ‘형제·자매’를 만들어 위로받는 과정을 영화는 질리도록 길고 상세히 따라간다. 감독은 심지어 한국 교회에 대한 세밀한 ‘리얼리티’를 위해 작품의 완성도를 일정 정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가정 기도회를 통해 위안 받으며 밤낮으로 ‘사랑과 은총’으로 바쁜 그녀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싱크대에 서서 혼자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다. 밥은 어지간해서는 넘어가지 않는다. 여전히 잠을 못 자고 여전히 아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주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꼭 연애하는 기분이라고 전도하고 다니면서도, 길에서 우연히 살인자의 딸과 마주쳤을 때는 매 맞는 그 아이를 모른 척 한다. 그쯤에서 만족했다면 그나마 교회라는 지푸라기라도 건졌을 것을, 신애는 받기만 하는 데서 만족 못하고 드디어 이벤트의 주체가 되기로 한다. 교도소에 수감된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한 면회를 감행한 것이다. 다들 말렸다. 용서는 마음으로 했으면 됐지 굳이 겉으로 증명하려 들지 말라는 주변의 염려에도, 신애는 보이는 믿음을 고집했다. 그녀는 아들의 살인자인 자신의 원수를 만난다. 고통으로 몸부림칠 줄 알았던 죄인은 의외로 평온했다. 얼굴이 좋았다. 신애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하려 들자, ‘원수’가 청산유수 같은 신앙고백으로 말을 채갔다. 원수는 이미 하나님께 엎드려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됐노라고 기쁨에 넘쳐 말했다. 점점 커져가던 신애의 퀭한 눈빛은 삶의 참혹한 진실을 전한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일 때만 존재 의미가 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거늘, 감히 하나님이 나보다 먼저 용서했다니! 내 원수가 나의 하나님 때문에 눈물로 용서받고 속이 편해졌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실신하고 만다. 아들의 시체 앞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았던 그녀가 쓰러진 것이다. 나의 하나님일 때는 행복이지만, 너의 하나님이 된 순간 삶은 비극이 된다. 인간에게 죄 지은 자는 먼저 인간에게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그게 순리다. 아무나 용서해주는 ‘하나님’이라는 말랑말랑한 상대에게 먼저 용서받았기에, 그래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고서도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오만한 자들의 집단이 바로 ‘교회’였다. 이제 영화는 딴판으로 변한 그녀의 폐허 같은 삶을 날 것으로 보여준다. 적어도 신애에게 교회가 약속하는 구원은 김추자의 노래보다 더 가벼운 ‘거짓말’이었고, 신앙의 마취가 풀려갈수록 감당 못할 슬픔에 짓눌린다. 진통제도 없이 고통의 한가운데를 건너가는 신애,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이 과장이 아님을 입증하는 전도연의 연기를 지켜보기란 그래서 고통스럽고도 짜릿하다. 용서란 신의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인간의 몫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이 작품의 빛나는 ‘시크릿 선샤인’이다.

덧붙이는 글 <데일리 서프라이즈>와 <경향 잡지>에도 실린 글입니다.
밀양 신애 교회 기독교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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