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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향하는 버스 안. 애초 예상보다 3시간이나 늦게 출발해 저녁에서야 도착했습니다. 그라나다에서 세비야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걸립니다.
ⓒ 이은비
세비야! 안달루시아의 주도(主都).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 비제의 <카르멘>, 슈트라우스의 <돈 주앙>을 비롯해 무려 100여편이 넘는 오페라의 무대가 되었던 고장! 유럽의 예술가 치고 이국적인 배경이 필요할 때 스페인의 세비야를 떠올리지 않은 작가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애초에 이곳을 가기 위해 혼자서 남부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행 3일 만에 완전히 '아스타 마나냐(원래는 '내일 다시 봐요'라는 인사말인데 중남미에서는 '내일 일하지 뭐'라는 뜻으로도 통용된다고 하는군요)' 정신과 혼연일체 된 저는 낮술에 취해 정신조차 혼미한 상태로 세비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여행의 백미가 될 세비야를 구경하기 위한 사전지식 따위는 아예 없었고, 버스는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도 3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탔으며, 그 때까지도 세비야에서 묵을 숙소조차 예약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계획이 없어도 배짱은 있었지요. 가이드북을 뒤져봐도 제가 원하는 싼 숙소가 나와 있을 리 없으므로, 저는 또다시 사람들에게 물어서 숙소를 구할 심산이었습니다. 마침 옆 좌석에 예쁜 아가씨가 앉아있었기 때문에, 저는 앉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 다갈색 머리 아가씨는 세비야의 친척집으로 놀러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오우, 그럼 너 몇 번 세비야 가봤겠구나?"라고 물으니 그렇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그럼 혹시 세비야에 괜찮은 백 팩커스 호스텔 있는 곳 알아?" 모른답니다.

아, 이것으로 숙소를 찾기 위한 첫 번째 교섭은 결렬됐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세비야에 도착하자마자 역 안에 있는 여행자 안내 센터에 가서 숙소를 물어보지요, 뭐.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하지만 배짱이 있다!

▲ 세비야에 도착하니 벌써 날이 저물었네요.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는 무척 넓고 복잡했습니다.
ⓒ 이은비
약 3시간을 달려 세비야에 도착하니 저녁 8시. 이미 밖은 완전히 저물었습니다. 저는 버스터미널 안의 안내 센터로 직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요. 센터에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앉아서 '나 영어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볼 뿐.

바로 그때서야 비로소, 저는 제가 안달루시아의 심장에 와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동안 '남부 스페인에서는 영어가 안 통한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지만, 말라가며 그라나다에서는 어느 정도 영어가 통했거든요. 이 할아버지, 퇴근 시간이 급했는지 심지어 심드렁하기까지 합니다.

여행자와 이야기하기 귀찮아하는 안내센터 할아버지의 몸짓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니 "당신이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면 시내 중심가 관광객용 안내센터를 가보든지 말든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여기서는 더 이상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일단 그곳에서 얻은 안내센터 약도를 들고 비굴하게 "그라치아스(감사합니다)"라고 외친 뒤 캐리어를 딸딸 끌고 나왔습니다.

시간은 저녁 8시. 갑자기 낯선 이국땅에서 애상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밥도 못 먹고, 안내센터에서는 오로지 퇴근 생각에 골똘한 직원에게 문전박대나 당하고, 아직까지 잘 곳도 못 정했고.

저는 같은 배낭여행객 행색을 한 사람에게 접근해 숙소를 물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역시, 숙소는 같은 여행자들이 가장 잘 아는 법 아닙니까? 커다란 등짐을 진 한 여행객에게 접근해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는데 숙소를 정하지 못했다, 괜찮다면 아는 숙소를 추천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쪽에서는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저는 제 친구 집이 이곳에 있어서 친구 집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군요. 하지만 역 안에 안내센터가 있었으니, 그곳에서 정보를 얻어 보세요."

친절하게 웃는 여행객에게, '저 이미 그곳에 다녀 왔어요'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그래요. 이제는 진짜로 시내 중심가에 있다는 관광객용 안내센터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 가면 여행자용 숙소정보가 있겠지요. 그런데 지도가 너무 조악해서 대체 안내센터가 어디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길옆에서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지긋한 중년 아저씨께 그간 귀동냥해온 스페인어로 길을 물었습니다.

"도…돈데 플라자 돈 후안 아우스트리아?(돈 후안 아우스트리아 광장은 어디?)"

중년 아저씨는 "학생, 나는 길을 모르겠응께. 기다려봐. 내 물어보고 올게"라는 듯 한 말투로 스페인어를 하시더니,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친히 길을 물어보십니다. 그러자 행인들이 모두 지나가다가 말고 저마다 방향을 설명하는데, 사람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모두 다릅니다.

장소를 찾을 때까지! 친절한 스페인 사람들

지켜보는 저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대체 제가 가려는 장소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지만 이 스페인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동안 그런 일을 겪어 오셨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매우 침착하십니다.

할아버지는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광장 한복판에서 토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제가 질문한 장소가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한 그 지점에 있는지 미심쩍지만, 저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결론을 내리고, 무엇인가를 물어보십니다.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물어보신 것 같습니다. 광장에서 토론하던 사람들 중 한 중년 아저씨가 손을 들자, 그 사람 팔을 이끌고 다시 제 앞으로 다가오십니다. 할아버지가 중년 아저씨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아저씨가 영어로 길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좌우지간에, 이쪽으로 주욱 나가서 무리요 정원이 나오면 좌회전을 했다가 길을 건너서 우회전을 해서 다시 알카사르 정원을 끼고 내려가면 그 광장이 나올 텐데, 인포메이션 센터는 다시 거기서…."

몹시 친절하고 장황한 길 안내가 끝났을 때, 저는 처음보다 더 혼란스러운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더 이상 물어보았다가는 다시 토론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에 저는 손을 흔들며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맙긴"이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줍니다. 여행 잘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뒤로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오더니 다 같이 손을 흔들어줍니다. 모두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했습니다.

사람이 아주 죽으란 법은 없나봅니다. 낯선 사람에게 이토록 친절한 세비야 사람들의 인심을 보니, 갑자기 안심이 되면서 이 도시에 대한 기대가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토론한 결과 대로 좌회전하고 길을 건너가서 우회전을 하고 다시…, 아무튼 길을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물론, 인포메이션 센터는 못 찾았습니다. 대신 엉뚱하게도 세비야 대학을 발견했습니다. 오페라 <카르멘>에서 카르멘이 일하던 담배공장은 바로 이 세비야 대학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위풍당당한 세비야 대학 교문 앞에 주저앉아서 잠시 작금의 사태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저녁 8시가 지났으니까 관광객용 안내센터도 문을 닫았을 거야. 지금 찾아봤자 소용없어. 그냥 이 도시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몰리는 거리로 가보자. 그러면 여행자들을 위한 싼 숙소도 있을 거야.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산타크루즈 지구(Barrio de Santa Cruz)에 있는 크루세스 광장(Plaza Cruces)이었습니다. 세비야의 산타크루즈 거리는 구시가 중에서도 매우 오래된 구역입니다. 이곳은 원래 유대인 거주지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의 끊임없는 탄압으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개종했고, 산타크루즈 지구에 있던 많은 시나고그들도 성당으로 개조됐습니다. 그라나다 알바이신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택시를 타고 산타크루즈 지구로 가니, 호텔과 예쁘장한 레스토랑들이 즐비한 길에 저를 내려주었습니다. 빌라와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예쁜 거리인데, 벽이 모두 하얀색이고 창마다 꽃을 가꿔놓은 작은 집들이 인상적입니다.

세비야의 유대인 거리, 산타크루즈 지구

▲ 산타크루즈 지구 크루세스 광장으로 향하는 골목길. 산타크루즈 지구의 길은 모두 이렇게 좁고 작습니다.
ⓒ 이은비
제가 "어디가 산타크루즈 지구예요?"라고 물어보니 택시기사는 별 멍청한 질문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그러더니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건물들 사이의 조그만 틈새를 가리킵니다. "저 뒤에 있다고요? 산타크루즈 지구가?"라고 물으니 "씨(Si)"라고 다시 끄덕거립니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건물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어랍쇼, 이것도 골목이랍시고 바닥이 예쁜 타일로 포장돼있습니다. 건물 벽에는 램프 모양의 가로등까지 붙어있습니다. 타일바닥은 건물 틈으로 난 골목에서부터 뒤편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수많은 거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비좁은 건물 틈새로 거미줄 같은 길이 뻗어 있었고, 중간 중간 조그만 광장이 있습니다. 광장 주변으로 펼쳐진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흥겹게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수다 떠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저는 술집과 관광객들과 관광객 사이를 돌아다니는 날랜 웨이터 사이를 지나쳐 저렴한 숙소를 물색했습니다. 하지만 대개 너무 비싸거나, 너무 더럽거나, 혹은 너무 허술한 숙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여자 혼자 묵는 것이다보니 아무래도 안전을 생각해야 했기에, 너무 허술한 숙소에서는 묵을 수 없었습니다.

숙소를 물색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찰나였습니다. 누군가가 제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습니다.

"숙소를 찾고 계시오? 여기 싸고 좋은 숙소가 있소."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스페인, #안달루시아, #배낭여행, #이베리아, #세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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