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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영화가 기술을 다루는 측면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이별, 경험의 기억들에 관한 뇌의 회로, 라는 영화의 컨셉트는 상당히 디지털적인 요소로 접근할 수도 있었을 주제를 오히려 가장 아날로그적이게 접근함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효과를 이루었다.

티끌 하나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 알렉산더 포프의 서간체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에 나오는 구절의 일부인 영화의 제목은 영화의 내용과 구성만큼이나 모호하다.

또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 역시 제목이 주는 의미를 영화의 내용만큼이나 그리 쉽게 파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호함은 이 영화의 소재인 사랑, 그리고 기억이 가지는 속성과 닮아 있다.

영화는 어느 평일 아침 자신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눈을 뜨는 조엘 배리쉬(짐 캐리 분)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하여 미묘한 화면의 흔들림을 의도한 첫 쇼트에서 조엘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카메라의 흔들림과 유사한 미풍이 창에 걸려진 발을 조금씩 흔드는 것을 본다.

<이터널 선샤인>의 주제음악까지 흐르면 이 아침의 풍경은 참으로 고요하고 정적인 것이다. 하지만 책을 다 덮고 나서 앞부분을 다시 한 번 뒤척여야 하는 추리소설처럼, 이 아침의 고요한 풍경은 특히 창에 걸린 발이 미풍의 살랑거림에 흔들리는 장면은 뒷부분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일종의 복선이라 할 수 있다.

힘겹게 일어나서 출근을 하러 밖에 나간 조엘은 이유 없이 자신의 차가 찌그러진 것을 보고, 통근 기차를 기다리다 충동적으로 몬타크행 열차를 타게 된다. 이때 파란 머리를 한 클레멘타인 크루친스키(케이트 윈슬렛 분)를 우연히 알게 되어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없음과 우연의 반복은 결코 문자 그대로의 우연이 아닌, 다만 당사자만 알지 못할 뿐 이미 올라타 있는 궤도의 어느 한 위상과도 같은 것이다. 본인의 의지라고 믿어지지 않는 감정의 충동성, 조엘이 조우하게 되는 이러저러한 우연성들은 사실 까닭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원래 연인이었고 헤어졌고 그 헤어짐이 야기한 상처를 견딜 수 없어서 ‘라쿠나’라는 이름의 회사에서 서로에 관련된 기억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도입부의 이러한 ‘충동적인’ 장면들은 역설적으로 기억이 대뇌의 주관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기억을 다 삭제한 다음에 다시 이 사람을 만나도 그때도 또 한 번의 이끌림을 경험하게 될까, 라는 질문에 영화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라기보다는 몸에 좀 더 밀접한 경험이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그 순간은 몇 억만 분의 일만큼이나 매우 희귀한 경험이라는 것, 그래서 머리가 기억하지 않아도 몸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엘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장면들에서 음악은 정적이고 쓸쓸하여 조엘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한편, 클레멘타인이 말을 걸어오면서부터는 빠른 템포로 바뀌면서 클레멘타인의 활발한 성격을 부가시키고 상대적으로 과묵한 편인 조엘이 어떻게 이렇듯 에너지가 왕성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클레멘타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점프샷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시간적 비약은 그의 소란스럽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반영한다. 서로에게 ‘우연히’ 이끌려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이 둘의 관계는 칫솔을 가지러 집에 들어간 클레멘타인을 기다리던 조엘에게 낯선 남자(엘리야 우드)가 이상한 말을 건네면서 균열을 겪게 된다.

이어지는 것은 조엘이 운전하며 혼자 울고 있는 장면으로 타이틀 시퀀스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쇼트와 쇼트 사이의 엄청난 비약으로 인해 혼란을 겪게 하는 장치로서, 실제적으로 영화는 매우 갑작스러운 플래시백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에는 기시감이라는 기억의 작용과 플래시백이라는 영화적 장치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방식 또한 기시감이 인간에게 닥치는 것만큼이나 매우 갑작스러운 성격을 띤다. 플래시백을 예고하는 관습적인 영화적 규칙들, 이를테면 오버랩이나 디졸브, 음악의 사용 없이 우리는 주인공의 매우 다양한 기억체계를 여행하게 된다.

미셀 공드리를 매우 뛰어난 아티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일 것 같다. 특수효과와 같은 디지털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셀 공드리가 채택한 방법은 단지 카메라 렌즈의 심도를 달리하여 아웃포커싱을 강하게 줘서 전경의 인물을 부각시킨다거나 실제로 뿌연 간유리를 스태프들이 직접 들고 있어서 카메라의 사각프레임 안에서는 마치 명확하지는 않지만 기억의 어느 편린일 것 같은 흐릿하고 희뿌연 배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미셀 공드리는, 블루스크린 앞에서 마치 대상과 배경이 실재하는 듯 배우가 거짓 연기를 하고, 차후 편집 과정에서 실제로는 없는 실재를 만들어내어 덧붙이는 것을 결코 선호하지 않는다. 그는 보다 즉물적인 것을 믿고 있는 것 같다. 블루스크린 앞에서 가상의 연기를 하는 것보다 가능한 한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미지와 가장 근접한 상황을 촬영장에서부터 재현하여 배우가 ‘거짓 연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한참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유령처럼 사라진 클레멘타인이 거짓말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장면의 비밀은 특수효과가 아니라 실제로 세트장에 만들어 놓은 비밀문에 있다. 마치 연극에서 1인 2역을 하는 사람이 무대 뒤편에서 옷을 서둘러 갈아 입고 다시 무대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이터널 선샤인>의 배우들은 이러한 연극놀이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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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카메라라는 시각적인 장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즉 카메라의 사각프레임 안에 보여지는 것만이 그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영화는 매번 우리를 속이지만, 속임수이자 영화적 기지가 발현될 수 있는 이 부분을 미셀 공드리는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정도라면 속고 있는 관객 또한 즐거울 것이다.

관객은 러닝타임이 지속되는 동안만큼은 영화 안에서 구성된 시간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계의 발명 이후 근대적 시간이 마치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따라서 시간의 선형적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 않은 이 영화는 그만큼 단번에 의미를 해독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에게 인터뷰에서도 언급한 적 있듯, 공드리는 “볼 때마다 이전에 못 본 장면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늘 구상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보다 이러한 산만한 구조의 내러티브가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역설적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기억이 그리도 산만하고 비선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시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명확하게 규명해낼 수 없듯, 우리가 가진 기억체계란 것 또한 그만큼 혼란스럽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발생하는 수많은 균열들이 오히려 우리를 살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해주는 라쿠나사(社)는 고객들이 가지고 오는 매우 아날로그적인 물건들을 통해 기억 회로를 만든다.

그러나 그때 그 기억들은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재구성된 뇌의 어떤 작용으로서, 그만큼 불안정한 체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많은 물건들-일기장, 그림수첩, 감자인형, 사진이 프린트된 머그잔 등-을 라쿠나에 들고 가서 기억회로를 만들고 이내 클레멘타인을 삭제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기억이 삭제되는 과정에서 조엘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잊고 싶지 않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과 마주하게 되고 불현듯 깨닫게 된다. 지울 수는 없다고. 그리하여 기억이 영구히 삭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함께 숨을 곳을 찾으러 황급히 달린다.

물론 이는 모두 조엘의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삭제기계는 계속해서 조엘의 기억을 지우고 있고 주위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져간다. 어두운 통로와도 같은 이 기억회로는 조엘과 클레멘타인만 비추는 집중조명의 사용으로 시각화된다.

라쿠나의 기계가 발견해내지 못하는 곳을 찾고 또 찾아 그들이 발견한 곳은 마치 달의 이면과도 같이 조엘의 기억 이면에 있던 망각의 순간, 정말로 묻어둔 곳‘somewhere really buried’이다. 기억을 지키기 위해 망각의 장소에 숨으려는 과정에서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숨겨두었던 것을 본다.

평소에 클레멘타인은 조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고, 자신의 치부까지 보이는 것을 ‘친밀함intimacy’라고 생각하지만 조엘은 정작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왔다. 그러나 결국 영화가 이 둘의 사랑을 되살리는 방법은 조엘의 부끄러운 기억을 클레멘타인에게 보여주면서 그 안에 숨는 것이다.

이는 클레멘타인이 가장 원하는 방식의 사랑이었지만 정작 조엘은 응해주지 않았던 방식의 사랑이었고, 조엘이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그 부분을 드러내는 순간 이것이 그 둘의 관계를 풀어주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망각은 기억의 대립이 아니며,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이 인용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인의 그들이 조엘의 어린 시절로 이행해가는 순간을 영화는 말 그대로 직설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비가 내리고 있던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같이 있던 방 안에 비가 쏟아지며, 그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자연스럽게 조엘의 어린 시절로 이행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쇼트와 쇼트 사이의 연결에 관한 방식이다.

전혀 다른 시공간의 일들을 세트장 구성의 변화를 통해 하나의 롱테이크 안에 담아냄으로써, 결코 양립 불가능할 것 같은 것들이 이루어내는 ‘불가사의하고 미묘한 격동’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서점 반스앤노블과 조엘의 친구 집으로 이어지는 시퀀스에서도 드러난다.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클레멘타인을 뒤로 하고 조엘은 허망한 채 서점을 빠져 나오는데 조엘 뒤의 조명들은 하나씩 꺼지고 문을 나선 조엘은 어느 샌가 친구의 집에 들어서 있다.

결국 뒤늦게 후회해도 그들의 기억은 조엘의 머리 속에서 삭제된다.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이 최종적으로 삭제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은 참으로 애틋하다. 처음 만난 몬타크 바닷가에서 이들 연인은 기억 속에서 안녕을 고하고,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달리는 차창 밖으로 둘의 추억들이 풍경이 되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조엘은 그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목소리가 배경이 되어 이미지들 위에 중첩되면서 조엘의 기억을 삭제하는 기계적인 작업은 종료한다.

영화의 러닝타임을 15분 가량 남겨두고 영화의 첫 장면, 조엘이 힘겹게 눈을 뜨는 장면이 다시 한 번 반복되면서 관객은 같은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정보량의 차이에 따라 이미지가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어, 조엘의 차는 찌그러져 있고 조엘은 충동적으로 결근하여 몬타크로 향한다.

한편 액자식으로 삽입된 라쿠나사의 직원들의 내러티브, 즉 매리와 하워드 박사 등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영화 전반적으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다가 영화의 후반부에 와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워드 박사의 이러한 일들이 인류적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항상 이야기해오던 자신이 바로 그 일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매리는 라쿠나에서 기억을 삭제한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와 관련 자료를 보내어 진실을 폭로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던 낯선 조엘과 낯선 클레멘타인은 혼란스러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라쿠나사에서 자신의 기억을 삭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사랑과 망각의 문제는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당면한 문제다.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이 시간을 선형적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닌 복잡한 얽힘의 무엇으로 만들어내어 기억과 망각에 대한 다양한 표층을 보여주었다면, 미셀 공드리는 이것을 매우 창의적인 방법을 통해 시각화하고 영화화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짐 캐리를 소심하고 과묵한 조엘로 캐스팅한 것이나 현실적으로 이루어내기 어려울 것 같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실현하려는 시도와 같이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불안정함, 미묘한 균열에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것은 곧 사랑, 그리고 삶의 매력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이터널 선샤인 미셀 공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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