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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공격으로 선미 마을이 불타는 장면을 담은 항공사진.
ⓒ 저작권 미상

2005년 11월 이라크의 어느 조용한 마을 하디타에서 미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 동료의 죽음에 격분한 미 해병들이 이성을 잃고 주변 마을의 무고한 주민 24명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이 40년 전, 베트남 땅에서 미군이 저지른 최악의 민간인 학살을 떠올렸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하는 물음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미라이 학살'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베트남전 최악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베트남에서는 '선미 학살'로 불리고 있다.

베트남에서 이라크로 이어진 '민간인 학살'

1968년 3월 16일에 발생한 이 사건은 504명의 무고한 사망자를 낳았고, 그중에는 어린이·노인·임산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한 용기있는 헬리콥터 조종사가 학살을 제지해 소수의 주민이 살아남았지만, 이후 사건은 계획적으로 은폐되었다.

진실은 1년 후에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베트남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찰리중대 1소대의 켈리 중위는 109명을 학살한 혐의로 무기징역과 강제노동 판결을 받았지만, 지속적인 감형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74년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21세기에도 정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난 선미 학살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학살과 은폐, 양심 있는 사람들의 고백과 진실을 찾기 위한 언론의 노력,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반전 여론의 확산. 이 모든 것들은 학살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잘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진실을 향한 양심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인에게 선미 학살에 대한 미국인의 반성은 큰 교훈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 선미 박물관은 꽝응아이시에서 13km 떨어진 선미 마을에 있다.
ⓒ 김효성
최악의 학살 현장에 들어선 웅장한 박물관

지난 6월 10일 오후 선미 마을을 찾아갔다.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 시에서 13㎞ 떨어진 선미 마을은 오토바이 택시로 외진 길을 20분 동안 달려야 찾아갈 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선 미(Son My)'라는 표지판을 지나자 오른편에 웅장한 크기의 박물관이 눈에 띄었다. 선미 학살 현장 바로 옆에 세워진 '선미 박물관'이었다. 여느 시골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규모의 건물에서 주제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외국인에게는 1만동(약 600원), 내국인에게는 4000동을 받는 '차별'이 조금은 불편했지만, 베트남인에게 생채기를 안긴 사람이 마치 나인 것만 같아 평소에 가져왔던 불만도 이내 사그라지고 말았다. 박물관 밖에는 학살 현장을 보기 위해 돌아다니느라 분주한 서양인들과 현지 대학생들 수십 명이 눈에 띄었다.

박물관은 총 2층 구조로 1층에는 회의실이, 2층에는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곧장 전시실에 들어서자 희생자 504명의 명단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대리석판이 눈에 띄었다.

희생자의 이름 옆에는 나이·성별이 새겨져 있는데 20세에서 40세 사이의 청년 남자는 거의 없었다. 희생자 중 400명 이상이 노인·어린이·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학살의 야만성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전시실 왼편에는 베트남전쟁의 양상에 관련된 사진과 미국·남베트남의 주요 인물들 사진이 걸려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국군 맹호부대의 사진으로 빈딘성 박물관(옛 한월문화회관)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1965년 10월 22일 당시, 한국군 맹호부대가 일주일간의 항해 끝에 뀌년 만에 도착한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이었다. 맹호부대는 선미 학살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지만, 베트남전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 미군 다음으로 많은 수가 파견된 한국군의 영향력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 선미 박물관에는 1965년 10월 22일 한국군 맹호부대가 뀌년만에 도착한 장면을 담은 사진도 있었다.
ⓒ 김효성
은폐된 진실을 세상에 알린 사람들

전시실 중앙에는 희생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종군기자 론 해벌이 촬영한 이 사진들은 미라이 학살의 은폐된 진실을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군이 불태우고 있는 마을들, 길거리에 쌓인 시체들,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희생자의 사진 등에서 섬뜩함과 더불어 학살의 광기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 사진을 바탕으로 <라이프>지에 학살에 관해 최초로 보도했던 시모어 허시 기자는 1970년에 퓰리쳐상을 받았다.

▲ 론 해벌 기자가 찍은 선미 학살 당시 희생자의 모습
ⓒ 김효성
희생자 사진 맞은편에는 미군에 의한 진상조사 및 남베트남 대학생들의 항의 시위 등이 담긴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선미 학살 사건은 당시 남베트남 내에서도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국민의 여론에 가려 정작 피해국 베트남 내의 여론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많은 베트남 시민들이 미군의 학살에 반발했고 유족들의 슬픔을 함께했다.

남베트남 주민들은 비록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명목으로 자국의 무고한 주민을 살해하는 미군의 만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전시실 한구석에는 조잡하게나마 학살 당시 급박한 상황을 연출해 놓은 모형이 눈에 띄었다. 주민들을 그러모아 근접 사격으로 살해하는 미군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학살의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무분별함을 일깨워주었다.

전시실의 오른편에는 선미 마을의 현재 모습과 전후 재건 상황들을 사진과 함께 잘 전시해놓았다. 학살 이후 40년 동안 세계의 주목을 받아온 선미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슬픔을 잊으려는 노력, 정부차원의 지원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 전시실 한 구석에는 모형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 김효성
"학살한 이도 미군, 제지한 이도 미군"

베트남인들은 선미 학살을 어떻게 생각할까? 1층 회의실에서 판 티 번 키에우(31)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박물관에서 외국인에게 영어로 선미 학살을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선미 학살 사건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저는 이 마을 근처 출신인데,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이 일을 듣고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네 할아버지, 어머니들이 무고하게 죽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거기에 분노했고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사건 이후, 미국 정부 차원에서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가해자가 가려지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증오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도덕성을 탓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베트남인들은 누구의 탓도 할 것 없이 끔찍한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습니다.

현재 우리 베트남인들은 미국에 대해서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과 베트남은 전후 수교를 맺었고 이제 친구이자 동반자로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학살을 자행한 사람도 미군이었지만, 학살을 제지한 사람도 미군이었습니다. 소수의 사람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 점이 학살에 대한 베트남인의 생각을 좀 더 유연하게 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꽝응아이성에서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몇 차례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거기에 대한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과 한국에 대해서 특별히 미운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음 세대를 위해서 이 슬픈 역사를 반성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녀의 사려 깊은 의견을 듣고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그녀의 도움으로 방문객들이 남긴 글들을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방명록의 가장 첫 페이지에는 한국인이 쓴 글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에 지속적인 노력을 해오고 있는 우리 시민단체 '나와우리' 평화캠프 참가자가 남긴 글이었다.

▲ 선미 학살 희생자 504명의 이름이 대리석판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 김효성
"반성하는 한국인들 모습에 깊은 감명 받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슬픔과 미래를 위한 노력에 대해서 적고 있는 그 글을 내가 유심히 쳐다보자, 끼에우씨가 한마디 덧붙였다.

"매년 많은 한국인이 이 곳을 찾아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학살을 관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반성하기 위해서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나와우리'라는 시민단체에서는 이곳을 매년 찾아와 슬픔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또 몇 년 전에는 우리 꽝응아이성에 한국 의사들이 찾아와서 무료 진료를 하고 갔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들에 깊이 감명받고 있습니다."

실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에서는 베트남 중부에 지속적으로 진료단을 파견해 왔다. 지난 2000년 꽝응아이성 선띤현(선미 마을이 있는 지역)에 치과의사, 치위생사 43명을 파견한 것을 기점으로, 2001년에는 진료단 50명을 같은 지역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2007년 현재까지 총 8차례에 걸쳐 베트남 중부 지역에 진료단을 파견하는 등 반성과 화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오고 있다.

또한 나와우리에서는 매년 여름 한-베 평화캠프를 열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역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빠짐없이 베트남 중부를 찾아 학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올 7월에도 2007 한-베 평화캠프를 준비하고 있다. 베트남과 한국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참가자들은 학살 장소를 방문하여 서로 함께 고민하고 힘을 모아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 이를테면 길 닦기, 마을 일손 돕기, 집짓기 등 봉사 활동을 통해 학살의 상처를 씻으려 노력하고 있다.

'슬픈 과거는 밝은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 박물관 본관 뒤편에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 김효성
"선미학살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얘기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사람들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전쟁이든 간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은 민간인입니다. 따라서 베트남전쟁만의 특별한 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야만성이 드러난 민간인 학살은 언젠가는 그 진실이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만난 프랑스인 필립(55)씨의 말이다.

선미 박물관은 이곳을 찾는 모두에게 슬픈 과거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학살의 그 자리에 세워졌다. 베트남인들은 슬픈 역사를 짊어지고 있지만, 슬픈 과거는 밝은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방문객들 모두는 선미 박물관을 통해 전쟁의 광기와 비인간성을 실감하며 세상 어디에서도 이 같은 끔찍한 일은 벌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선미 학살의 진실은 다행히 세상에 널리 알려져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진행되었다. 아마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504명의 넋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때 일어난 미군, 한국군, 남베트남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대다수는 아직 제대로 된 진상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이 되고 선미 마을은 아름다운 미케 해변이 펼쳐진 조용한 마을로 되돌아 왔지만,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은 여전히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베트남의 제2, 3의 선미 마을도 겉으로는 평온함을 되찾았지만 유족들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야만적인 민간인 학살이 더는 비밀에 부쳐지지 않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철저한 반성을 통해,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태그:#미라이학살, #선미학살, #미라이, #고자이,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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