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시선 집중과 방향, 빛의 변화에 따른 효과를 고려한 설계로 이슬람 건축의 백미가 된 알람브라 궁전
ⓒ 이은비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새 다음날 새벽(2월 15일)이었습니다. 지난밤에는 얼굴도 볼 수 없었던 룸메이트들이 밤새 파티와 클럽을 전전하다 새벽에야 들어왔던 듯, 아침의 방안은 초만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로비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어제 친해진 미국인 친구 조쉬를 만나 함께 리셉션에 캐리어를 맡기고 호스텔 밖으로 나섰습니다.

알람브라에 도착하니 오전 9시30분입니다. 꽤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알람브라 왕궁 앞은 이미 초만원입니다. 요령 좋게 표를 구한 우리는 왕궁부터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람브라와 알바이신 사이로 이념의 괴리가 흐른다

▲ 알람브라 내 나스리드 왕궁의 대리석 창 너머로 보이는 알바이신 지구. 대리석을 레이스처럼 투각한 솜씨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 이은비
아라야네스 안뜰을 따라 건너편으로 나가보니 어제 갔던 알바이신 지구가 새하얗게 햇볕을 받으며 서 있습니다. 알바이신에서 알람브라가, 알람브라에서 알바이신이 보이는 광경은 마치 정다운 오누이같이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낮과 밤을, 이들은 이렇게 몇백 년 동안 한자리에 서서 서로 바라보았겠지요.

하지만 이 사이에 흐른 이념과 사상의 괴리를 생각해보면 처연하기 짝이 없습니다. 알바이신으로 쫓겨간 무어인들은 그들의 찬란한 왕궁에 꽂힌 정복자의 깃발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기가 내가 간 알바이신이야"라고 말하니 "저기엔 뭐가 있는데?"라고 조쉬가 묻습니다.

"그냥… 거리야. 오래된. 저긴 무슬림 거주지였대. 지금은 모두 개종했지만. 저녁에 저기 올라가면 알람브라를 볼 수 있는데 정말 멋있어."

이 정도가 저의 조악한 설명입니다. 덧붙여, 무척이나 가고 싶었지만 결국 못 갔던 사크로몬테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저기 뒤에는 사크로몬테라는 집시촌이 있어. 보여? 산 위에 구멍이 뚫려 있잖아. 저긴 밤에 가면 정말 위험하대. 도둑이랑 집시 점쟁이들이 많거든. 정말 근사할 것 같지 않니?"

이렇게 말하니까 그제야 흥미가 생겼는지 조쉬가 "와우, 그래? 나 거기 가보고 싶어졌어"라고 눈을 빛내는군요.

이슬람 정원건축의 백미, 헤네랄리페 정원

▲ 헤네랄리페 입구의 아세키아 정원. 15세기 이슬람 시인은 알람브라를 두고 "그라나다라는 에메랄드에 박힌 진주"라고 격찬했습니다.
ⓒ 이은비
알람브라에서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곳은 안쪽에 숨어 있는 헤네랄리페 정원이었습니다. 무어인들이 지은 이 정원은 서양보다는 우리네 정서에 더 맞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헤네랄리페는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매우 동양적인 사상 위에 설계됐습니다.

표현방식 또한 동양적입니다. 서양인들은 극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기교에 기교를 더합니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극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기교를 제거해 나가지요.

이 건축물의 설계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궁을 만들기 위해 인공미를 더하거나 보석을 달아서 건물을 치장한 게 아니라, 건물에 하늘과 땅과 나무와 산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래서 알람브라의 건축물은 무한한 확장성을 갖게 됐습니다. 아마도 이 건축물의 설계자는 예술의 위대함, 즉 '예술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만약, 사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영혼이 고양될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 참 굉장한 일 아닙니까? 모두가 그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아마 세상은 곧 천국 같아질 겁니다. 나쁜 마음도, 사악한 마음도 그 집에 살다 보면 사라지고, 사람들은 예술과 선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갖게 되겠지요.

헤네랄리페 설계자는 모두가 그런 집에서 살 수는 없을지언정 만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라도 그런 집에서 산다면 명군이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정원을 보는 사람의 가슴 속에서 미(美)와 자연을 사랑하는 기질이 깨어나도록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지요.

알람브라를 거닐면서 연인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그 연인과 밀어를 속삭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문득, 조쉬가 옆에서 중얼거리는군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 곳이 보이는 저 알바이신 중턱의 하얀 집 중 하나를 사서, 이렇게 정원을 가꾸고 살고 싶어…. 평화롭게, 그냥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해하면서 말이야."

그래요. 아마도 이 정원을 거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평화로운 생각을 하겠지요. 정말 마법 같은 건축의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법같은 궁전 여행... "근데 여기가 어디야?"

발이 부르트도록 궁전을 구경하던 저는 문득, 지금 여기가 왕궁의 어디쯤인지 몰라서 조쉬에게 물어봅니다.

"근데, 우리 이제 어디까지 구경한 거야?"

그러자 조쉬 왈, 자기도 모르겠답니다. 둘 다 알람브라 지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는 순간, 이게 웬일입니까! 길 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검은 옷의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어제 알바이신에서 제가 길을 잃었을 때 도와주었던 독일인 '흑기사', 토마스입니다.

우연히도 토마스를 이 곳에서 또 만난 것입니다. 토마스는 제가 길을 잃을 때마다 나타나서 길 알려주는 역할이라도 떠맡은 걸까요? 대체 어떻게 이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걸까요? 문득 저는 전날, 저와 헤어지기 전에 토마스가 제 다음날 일정을 물어본 것이 생각났습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요.

▲ 알람브라의 동행인이었던 미국인 조쉬. 축구선수도 아니건만 발군의 인터셉트 실력을 자랑했지요.
ⓒ 이은비
제가 반가워하며 손을 흔드니까 저편에서 오던 토마스도 두 팔을 활짝 펴며 손을 흔듭니다. 함께 안부 인사를 교환하는데, 뒤쪽에 서 있는 조쉬의 눈길이 느껴집니다. 뒤돌아보니 조쉬 혼자 무안한 표정으로 서 있군요. 좀 미안해져서 조쉬와 토마스를 서로 소개시켜줍니다.

토마스가 먼저 싹싹하게 조쉬에게 손을 내밉니다. "토마스라고 해요. 독일에서 왔어요. 만나서 반갑군요!" 그러자 조쉬, "오클라호마에서 온 조쉽니다"라고 짧게 인사하더니 그 뒤부터는 묵묵부답입니다.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현재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점이지요. "토마스. 나 또 길 잃어버렸어!"라고 내가 말했더니 토마스가 웃습니다.

"그쪽 분도 길 모르세요?"라고 토마스가 물어보니 조쉬가 "어… 음, 그런 것 같아요. 왕궁이랑 광장은 대충 구경한 것 같은데 다른 게 있나요?"라고 떠듬떠듬 말합니다. "엄청나게 많죠! 카를로스 5세 궁전, 박물관, 알카사바, 벨라탑…" 토마스가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일행을 끌고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조쉬가 "음음, 좋아요.,그렇군요"라고 끼어들더니, "근데, 출구 쪽으로 가는 건가요?"라고 묻습니다. 토마스가 "네, 다음 장소로 가야지요"라고 말하니 조쉬는 재빨리 "아, 그럼 우린 아직 볼거리가 남아있어서 반대로 가야겠군요. 반가웠어요!"라고 후다닥 인사해버리네요.

'대체 왜! 어차피 우리도 여기서 나갈 참이었잖아!'라는 제 마음속의 절규는 들리지도 않는지 조쉬는 상큼한 표정으로 토마스에게 손을 흔듭니다. 사실 제 마음 같아서는 틀림없이 알람브라 지리에도 빠삭할 토마스의 안내가 아쉽지만, 일단 동행인의 자리를 차지한 조쉬를 위해 양보하기로 하고 토마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미안, 토마스. 남은 여행 잘해.

그렇게 해서 다시 둘만 남게 된 조쉬와 저는 오후 2시가 넘도록 여기저기를 세세히 구경하며 생각보다 더 느긋하게 왕궁을 돌아다녔습니다. 마침내 오후가 넘어서서 뜨거워지는 햇볕과 몰려드는 관광객도 지겨워질 즈음에서야, 우리는 알람브라를 나왔습니다.

타파스 한 접시에 맥주 한잔이 무조건 공짜!

그라나다 시가지로 내려오니 조쉬가 "내가 점심 살테니 먹고 가라"라고 제안합니다. 누에바 광장에 근처의 가게들은 점심에 할인메뉴를 팝니다. 타파스 한 접시에 맥주 한 잔을 무조건 갖다주지요. 은근히 더운 낮에, 기포가 올라오며 잔 밖으로는 촉촉하게 이슬까지 맺힌 맥주는 엄청나게 입에 착착 달라붙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들어간 가게는 선곡이 끝내줬습니다! 맥주를 비우는 동안 건즈 앤 로지스의 '노킹 온 헤븐즈 도어'와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 웨이 투 헤븐', 스웨이드의 '뷰티풀 원'이 콤보로 나오는데, 듣다 보니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낮술과 잘 어울려서 금방 취해버렸습니다.

'세상만사 뭐 있나, 이대로 최고인데'라는 생각이 뇌수를 잠식합니다.

▲ 알람브라 벨라탑에서 내려다본 그라나다 시가지 풍경
ⓒ 이은비
큰일입니다. 비틀즈의 '어 데이 인 더 라이프'가 나올 즈음 "와우, 이 가게 정말 노래 끝내주네"라며 건배하니 조쉬도 "끝내주지! 저 노래 아는구나!"라고 탁자를 두드리며 좋아라 합니다. 그러더니 이 친구, 급기야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꺼냅니다.

"이 노래 정말 멋지게 듣는 나만의 방법이 뭔 줄 알아? 마리화나를 태우면서 하늘의 별을 보며 노래를 듣는 거야! 아, 네가 오늘 하루 더 호스텔에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호스텔 옥상으로 올라가서 이 곡을 들으면서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마리화나를 태울 텐데. 그럼 진짜 이 곡이 뜻하는 바를 느끼게 될 거야."

아이고. 호스텔 옥상에서 그런 짓도 하는군요. 스페인은 강력한 마약 단속국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이 해방감에 곧잘 마리화나를 피우는 모양입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마리화나가 불법이야"라고 말하자, 이 친구가 본격적으로 마리화나의 무해함을 설명하려 합니다. 손을 들어 저지하며 "알아, 알아, 담배보다 마리화나가 무해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지? 어쨌든 난 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라고 못을 박으니 조쉬가 피식 웃습니다.

"내 생각엔, 너도 한번쯤 해봐야 할 것 같아."

내가 "글쎄"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다음 일정을 물었습니다. 조쉬는 오늘 저녁 사크로몬테를 가보겠다고 합니다. 제가 말한 것을 들으니 구미가 당긴 모양입니다. 그리고 20일까지 스페인을 구경하다가 이후 남미로 날아가 중남미를 여행하고 아프리카까지 갈 거라고 합니다.

짐작건대 과연 헤밍웨이 팬답게, 헤밍웨이가 갔던 나라들에 다녀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헤밍웨이는 이후 신문 특파원이 돼 그리스·터키·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주유했고 그중에서도 <해는 다시 떠오른다>를 통해 스페인 젊은 남녀 풍속도를 묘사했지요.

헤밍웨이가 스페인의 향락적 젊은이들을 그렸던 것처럼, 이 녀석도 동시대 젊은이들의 일탈과 해방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나름대로 멋진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아직 인생을 아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당장은, 같은 여행자의 입장에서 오래도록 무전여행을 다니는 이 젊은이가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세비야로 떠날까, 말까?

우리는 '서로 남은 여행 잘하자!'라는 의미로 심기일전해 건배를 했습니다. 정말 이것으로 막잔. 더 이상 마시면 완전히 취할 것 같습니다. 제 혀가 약간 꼬였는지 조쉬가 걱정합니다.

"너 제대로 갈 수 있겠어? 세비야 간다며. 정말 괜찮아? 오늘 꼭 세비야 가야하는 거야?"

이것 참. 일정 정도는 하루 이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혼자 여행할 때의 묘미이긴 합니다만, 어쩐지 취기가 오르니 만사 귀찮고 숙소에 돌아가 한숨 자고만 싶은 것이, 꽤 절묘한 타이밍의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애초에 여행 떠나기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세비야만큼은 꼭 가겠다고 마음먹어 왔으니까요. 저는 힘주어 "절대 걱정하지 마, 아무 문제없어"라고 말하며 자리를 일어났습니다.

비틀즈의 '어 데이 인 어 라이프'의 후렴구 "당신을 취하게 하고 싶어"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가게를 나서니 조쉬가 버스 역까지 배웅해 주겠답니다. 덕분에 저는 제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들어주는 친절한 조쉬군의 배웅을 받으며, 적당히 술에 취한 채로 세비야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자, 드디어, 상태는 조금 안 좋지만…. 세비야로 출발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스페인, #안달루시아, #배낭여행, #그라나다, #알함브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