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먹을 듯한 얼굴'. 아마도 분노 혹은 투지로 폭발하기 직전의 포효하는 얼굴을 가리키는 표현이리라. 그러나 어느 동물학자의 관찰에 따르자면, 사슴 따위를 사냥하는 순간 흔히 사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분노와 투지가 아니라 환희와 즐거움의 표정이라고 한다. 몇 날 며칠간의 굶주림 끝에 푸짐한 밥상을 앞에 둔 희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잡아먹을 듯한 얼굴'이란, '이게 얼마 만에 만나는 먹이냐' 하는 듯 지레 감격해 소름끼치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살기등등한 얼굴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떠올랐던 야구선수의 얼굴이 둘 있었다. LG트윈스의 3루수 '송구홍', 그리고 쌍방울 레이더스의 2루수 '최태원'. 타석에서 공을 기다릴 때나 수비위치에서 타구를 기다릴 때나 즐겁고 신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 살기등등한 미소를 철철 흘리던 그 오싹한 얼굴. 내가 만일 투수였다면, 가장 상대해서 공을 던지기 싫었을 타자로서 장효조나 이종범 대신 골랐을 그 두 사람. 특히 최태원은 그랬다. 원체 다부진 턱선에다가 눈초리 입꼬리가 독하게 말려올라간 야무진 얼굴의 그는 일부러 지어보려고 해도 어려울 미소를 날카롭게 흘려대다가, 타이밍을 읽어낸 마지막 한순간 싸늘한 무아지경에서 방망이를 휘두르고 몸을 날렸다. 투구건 타구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이 반가워 죽겠다는 듯 꿈틀거리는 그의 몸놀림을 보자면, 객석에서나마 기가 눌리는 느낌에 묘한 불쾌감마저 느끼곤 했던 것이다. 약체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희망
 최태원 선수의 수비동작.
ⓒ 쌍방울 레이더스 팬북

관련사진보기


1991년, 가장 늦게 출범한 없는 살림에다가 1992년과 1993년에 1차 지명으로 뽑은 투수 방극천과 타자 박상수가 각기 통산 3.2이닝과 4타수만을 기록한 채 사라져버리고, 1992년 2차 지명에서 잡은 양준혁마저 지명을 거부하고 상무로 내빼버리는 재난을 겪은 쌍방울 레이더스가 1993년에 2차 지명에서 간신히 건진 두 개의 재목이 성영재와 최태원이었다. 성남고와 경희대를 거치면서, 선수보다는 '군기반장'으로 더 이름을 날렸던 최태원도 출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그가 프로무대에 등장했던 1993년, 쌍방울은 간신히 꼴찌는 면했지만 승률 3할 5푼대로 바닥을 기고 있었고, 최태원 역시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2년차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야 할 1994년에는 롯데에서 이적해와 생각지도 못했던 15홈런의 깜짝 활약을 보여준 송태일, 그리고 역시 2할 8푼대 타격에 8개의 홈런으로 기대 이상을 해준 백인호가 교대로 2루를 지키고 있었기에 최태원은 간혹 경기에 나서더라도 대타나 외야수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태원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5년이었다. 그 해, 다시 1할대로 주저앉은 송태일과 2할 4푼대로 내려간 백인호 대신 매섭게 방망이를 휘두르며 주전 자리를 꿰찬 최태원은 시즌 타율 .296에 147개의 안타로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하며 역시 꼴찌로 내려앉은 쌍방울 타선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해, 대타로 출전했던 4월 16일 해태와의 광주 원정경기를 시작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길고 긴 연속출장기록의 출발점을 떠나기 시작했다. 수영을 즐기려면 우선 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야 하고, 야구를 즐기려면 먼저 공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야 한다. 최태원은 크지 않은 체구에, 특별히 동작이 빠르거나 힘이 좋은 선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공을 코 앞에서 다루는 듯한 수비동작이 시원시원했다. 어떤 이들은 불덩이라도 만지는 듯 움찔대는 야구공을 그는 마치 고무공이라도 다루듯 거리낌없이 주물렀고, 혹시 그라운드에 잘못 솟은 돌조각을 맞고 튀어 오른 타구가 얼굴로 급히 날아올라도 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겁 없는' 글러브질 덕에 엉성하기 짝이 없던 레이더스의 내야가 조금씩 단단해져 갔고, 2루 수비만큼은 어느 팀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다는 소리도 조금씩 듣게 되었다.
 최태원 선수의 타격동작.
ⓒ 쌍방울 레이더스 팬북

관련사진보기

공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만큼 끝까지 공을 보면서 몸에 '붙여놓고' 때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특별한 반사 신경을 가지지 못했던 그였지만, 남달리 오래 보고 가까이서 공략하는 공은 그만큼 정확히 뻗어나갈 수 있었다. 1997년에는 3할을 채우며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따냈고, 1995년에서 2001년까지 여섯 시즌 동안 거르지 않고 해마다 100개 이상의 안타를 때려냈다. 물론 공 앞에서 과감한 만큼 자잘한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연속경기출장기간의 25%쯤은 부상을 달고 이어갔노라고 스스로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 공이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잡거나 때려내야 하는 것이었던 것과 꼭 같이, 부상이란 것도 불운을 탓하며 눌려 지내야 할 것이 아니라 이겨내면 되는 것이었다. 항상 그의 기도제목은 '부상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부상을 이겨낼 힘을 달라'는 것이었고, 또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고 운동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둔해진 근육의 힘만큼을 채우기 위해 몸을 던지고 구름으로써 그 한계를 채웠다. 대기록, 1014경기 연속출장 그가 기록한 연속경기 출장기록은 1014경기까지 이어졌다. 한 시즌에 126경기가 치러지던 시절에 시작해 133경기가 치러지던 시절에 맺어진 그 기록이 세워지는 사이 온전히 여덟 번 해가 바뀌었다.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선수에게도, 야구 한 경기를 치러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구나 일주일에 여섯번씩 1년 내내 경기에 나서는 것은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천하장사라도 입에서 단내가 나는 하루하루며, 또 자기 자리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주지 못하면 냉큼 2군이나 길바닥으로 내쳐지는 게 프로선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껏 해마다 한 시즌을 개근하는 이들은 8개 팀을 통틀어 적으면 네 명, 많아야 아홉 명을 넘지 못했으며, 평균적으로는 6명에 불과했다. 세계를 모두 통틀어도 최태원보다 더 오랜 기간 쉬지 않고 경기에 나선 야구선수는 미국과 일본에 각각 6명씩이 있을 뿐이다. 그 기록이 네 번째 시즌을 경과 하던 1998년과 1999년, 그의 팀 레이더스는 모기업 쌍방울의 부도사태 속에서 공중분해의 위기를 맞았다. 동료 선수들이 하나 둘 다른 팀으로 팔려가기 시작했고, 선수들은 숙식조차 온전히 보장하지 못하는 팀에서 거친 밥을 씹으며 불안감 속에서 경기를 치러나가야 했다.
 1000경기 연속출장 기념식에서의 최태원 선수와 강병철 감독.
ⓒ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우여곡절 끝에 레이더스 선수들은 SK 와이번스라는 새 구단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마음 편한 세월은 아니었다. 첫해인 2000년 시즌이 끝나자 박정현·김성래·심성보·박재용 등 수십 명의 동료들이 비정한 정리해고의 칼날에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 해 초, 뚜렷하게 제 목소리를 낼 스타선수도 드물었던 팀 동료들을 대신하느라 '구르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처지를 망각하고 1기 선수협의회 부회장으로 나선 탓에 단단히 미운털이 박혀버린 최태원 또한 FA로 영입한 김민재의 보상선수 보호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안전치 못한 처지를 자각해야 했다. 마침, 용병들이 들어오면서 구단들이 선수 한둘에 목맬 필요가 없어지고 있었고, 이미 서른 줄을 넘어선 최태원의 방망이에서도 조금씩 힘이 빠져가고 있을 때였다. 모든 조건이 좋지 않았다. 2001년에는 타율도 .242로 추락했고, 갖은 부상을 달고 지내며 대타나 대수비 요원으로 경기 중반에 투입되며 연속경기 행진을 이어가야 했다. 게다가 2002년에는 삼성에서 데려온 젊은 2루수 정경배가 최태원의 공백을 말끔히 메워가기도 했다. 가장 괴로운 건, 매 시합 때마다 스스로 '중단'을 선언해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열두 번도 더 쥐고 놓았던 최태원 자신이었다. 2002년 8월 23일, 드디어 1000경기 연속출장기록이 세워졌다. 목에 화환이 걸리고, 메이저리그 2632경기 연속출장의 전설 칼 립켄 주니어의 축하 메시지가 전해졌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이어주기 위한 짧았던 팀의 배려도 그것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바로 이틀 뒤 그의 1002번째 경기에서는 팀이 한 점 앞선 9회 초까지도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했다가, 경기를 뒤집어준 상대팀 두산 덕분에 9회 말에 간신히 대타로 출전해 기록행진을 이어가는 곡예를 연출해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10일, 잠실. 홈팀 두산에 6대 5로 앞서있던 9회 말. 원정팀 응원석에서 터져 나온 '최태원을 내보내라'는 아우성 속에서 두산의 마지막 공격은 허무하게 마무리되어버렸고, 연속경기 출장기록도 이틀 전 인천에서 작성된 1014에서 멈추어 섰다. 대기록, 무심한 세월 속에 새겨진 헌신의 증거물
 문학경기장에 세워진 1000경기 연속출장기록 기념 동판 앞에서.
ⓒ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도 어려웠던 상황, 시즌 막판 열 경기 남짓 남겨놓은 상황에서 기록 연장의 가능성을 이듬해로 넘겨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배려를 베풀지 못한 강병철 SK 감독에게 항의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 몇 해 전 미국의 칼 립켄 주니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을 선언할 순간을 놓친 최태원에게 아쉬움을 두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어쨌든 마지막 기록의 종착점에서 따스한 박수와 답례도, 혹은 조촐한 기념식이나 인터뷰라도 나눌 경황과 여유가 우리에게 없었다는 점이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이듬해 최태원은 고작 33경기에서만 나서며 선수생활을 서둘러 마무리했고, 8년 동안이나 당연한 듯 그라운드 한 구석을 지켜오던 그는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1000경기 연속출장에 성공하던 날, 38세까지 선수생활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은 허탈하게 지워졌고, 그래서 오늘날 1014경기라는 피땀어린 세월은 그저, 유별나게 기록 챙겨보기를 즐기는 몇몇 야구팬들의 머릿속에 숫자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기록이 플레이의 흔적이어야지, 기록을 위해 플레이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땀과 의지와 노력만으로 쌓아올린 선수의 대기록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그렇게나마 무심한 세월 속에 새겨 넣어진 조그만 증거물들이 아니라면, 한 시대 수많은 소시민들의 꿈과 열정 앞에서 오직 몸뚱이의 단순한 논리로 헌신한 수많은 선수들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철인이라 불리는 사나이. 형편없는 약체팀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그 강철 같은 의지와 정신의 전설을 떠올리며, 문득 이를 꼭 물어보게 만드는 사람. 잡아먹을 듯, 야구공을 노렸던 맹수의 눈빛으로 불멸의 대기록을 다져 올렸던 이름. 그것이 바로 최태원이다.

덧붙이는 글 쌍방울 레이더스 팬북 사진은 다음카페 쌍방울 레이더스 팬클럽( http://cafe.daum.net/sbwraiders) 여러분이 제공해주셨습니다.
최태원 1000경기 연속출장 쌍방울 레이더스 철인 1014경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