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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1일이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강원도는 얼마나 더 추우랴 싶어 안 입던 내복까지 꺼내 입었다. 공기가 한껏 부풀린 오리털 잠바까지 입었더니 모양새가 완전히 뒤뚱거리는 펭귄이다.

희뿌연 새벽을 털어내고 청량리 역으로 갔다. 역 대기실 안은 이미 울긋불긋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갑자기 내 옷차림이 너무 두툼하고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등산과 낚시, 골프 등 그 운동에 맞는 기능복들이 너무나 다양하게 잘 나와 있어 예전처럼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잠바에 운동화를 신으면 등산이든 여행이든 다 갈 수 있었던 간편복 차림이 이제는 촌스러운 의상이 된 지 오래다.

'저 사람들은 늘 저렇게 잘 차려입고 여행을 할까? 그런데 우리는 19년 만에 처음으로 떠나는 부부여행이라니….' 그동안 여행은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고 생활에 찌들어 살아온 자신이 괜히 서글퍼지려고 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함께 갈 사촌 아주버님과 형님이 도착했다. 언제나 날씬하고 예쁜 형님은 까만 쫄쫄이 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부추를 신고 잠자리 날개 같은 레이스가 달린 티셔츠와 허리가 잘록 들어간 까만 코트를 입었다. 눈꽃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옷차림으로서는 완전 이방인이다.

"형님 오늘 날씨도 추운데 옷차림이 너무 얇지 않아요? 난 내복까지 꺼내 입고 완전 무장을 했는데."
"아니야 동서 나도 속에 내복 다 입었어. 옷을 몇 겹이나 입었는데."


형님은 주섬주섬 입은 옷들을 꺼내 보여준다.

"세상은 참 불공평해. 형님은 옷을 그렇게 껴입고도 날씬한데, 난 겨우 내복 하나 더 입었다고 데굴데굴 구르는 곰 같으니…."

내 한탄스런 농담에 네 사람은 한바탕 웃었다.

아주버님이 미리 예약한 차표를 받아오겠다며 가시더니 동그란 여행사 배지도 함께 받아와서 각자 가슴에 달라고 했다. 그것은 여행사에서 자기 식구들을 쉽게 알아보기 위한 표시라고 하면서. 처음 타보는 관광열차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곧 여행사 직원이 나와서 안내해 줄 테니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하면 된다고 했다.

잠시 후 우리가 예약한 여행사의 직원이 나와 깃발을 흔들며 "홍익관광 이쪽으로 모이세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와 같은 뺏지를 단 사람들이 모두 그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파란색 뺏지를 단 사람들은 또 파란 깃발 아래로 몰려들고 있었다. 같은 관광 기차에서도 여행사가 여러 곳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들처럼 선봉에 선 주홍 깃발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개찰을 하고 기차에 올랐다. 형님과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두 남자는 통로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 여행은 무조건 두 여자 분을 위해서 준비한 것이니 모든 것은 제수씨와 집사람이 즐거울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자고 아우와 약속을 했다며 아주버님이 말씀하셨다. 사실 이번 여행을 준비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안 가겠다고 했다.

19년 만에 처음 떠나는 부부여행인데 왜 하필이면 길 미끄러운 '눈꽃열차'냐고 했다. 그동안 지하철역 벽에 큰 현수막으로 걸려있는 눈꽃열차의 광고를 보면서도, 저곳은 길이 미끄러워 다리가 아픈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자 남편은 아주버님과 함께 서울 역까지 나가 여행사 직원에게 자세하게 알아보았다고 했다.

눈꽃열차라 해서 다 눈이 덮인 것이 아니라 당신 같은 사람도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해서 예약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가스충전소에서 그동안 쌓아놓은 포인트로 예약해 놓은 것이니 돈 걱정도 말라고 했다.

어디를 가나 돈 걱정부터 앞세우는 마누라인 줄 뻔히 알기에 몇 년 동안 쌓아놓은 포인트로 점수 한 번 따 보겠다는 그 정성이 고마워, 설령 길이 미끄러워 기차 안에서만 있다가 오더라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약속할 것이 있었다. 술만 먹으면 두 옥타브는 족히 올라가는 남편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비틀거리는 술 취한 모습이 보기 싫다며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다. 그 버릇은 아주버님도 마찬가지여서 잘못하면 여행이 아니라 망신만 당하고 올지도 몰랐다.

남편은 이미 아주버님과 그 약속까지 다 해놓았다고 했다. 마누라를 여행 한 번 데리고 가기가 상전 모시기보다 더 어려운 우여곡절 끝에 기차는 출발을 하고, 우리는 사온 김밥과 내가 끓여 간 미역국을 먹었다. 기차에서 먹는 김밥과 따뜻한 미역국이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기차는 한강을 끼고 달리고 있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닿은 강물은 은빛 비늘로 주름치마를 접는 듯했고 겨울 밭에는 미처 뽑아내지 못한 배추 위로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말라버린 고춧대에서도 역시나 말라비틀어진 고추 두어 개가 대롱거리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영월을 지나자 기차는 점점 산악지대를 향해 느리게 가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웅장함을 자랑하는 산이요. 그 골을 따라 흐르는 계곡뿐이었다. 산을 왜 병풍에 비유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증산을 지나고 사북을 지나자 골짜기의 물이 주홍색이었다. 자갈도 바위도 모두가 주홍색 물이 들어 있었다.

"형님 저 물 좀 보세요? 물이 왜 주홍색이지요?"
"그러게 말이야 철분이 많은가보지."

"그럼 사람들이 저 물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인데 몸에 해롭지 않을까요?"
"아니야 동서. 왜 약수에도 철 냄새가 나는 거 있잖아. 철분이 많아서 좋다고 하던데."


우리는 '주홍색의 그 물은 철분이 많아서이다'라고 마음대로 정의를 내렸다. 기차는 이제 산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마을도, 계곡도, 신작로도 모두 저 아래에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산에 오르지 못하는 내가 바로 산에 올라온 듯한 느낌이었다. 산 중턱을 넘어가는 기차도 숨이 차는지 헉헉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고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태백 역에 닿았다. 태백이라 하면 사회교과서에서 줄기차게 외웠던 태백산맥밖에 모르는데, 이곳에 내가 왔다는 것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우리는 또 주홍 깃발을 따라 안내를 해준 버스를 탔다.

안내원이 앞으로의 일정을 알려 주었다. 안내원은 우선 눈이 오지 않아 설경을 구경하지 못했다며 영월에서 태백까지의 설경이 눈꽃열차의 묘미인데 아쉽다고 했다. 나는 설경을 구경 못 한 것은 아쉬웠지만 미끄러운 눈길이 아니라서 좋았다.

그리고 그 주홍 물에 대해 설명도 해 주었는데, 그 물은 우리가 생각했던 철분이 많아서가 아니라 폐광을 시킬 때 곡괭이와 삽 등 연장들을 모두 광속에 넣고 묻어 버려서 녹슨 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그 녹슨 물을 사람들이 먹고산단 말인가?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눈꽃축제 준비가 한창인 당골로 갔다.

3시간 30여 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애초 등산갈 생각은 없었으니 점심부터 먹자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든 식당이 너무나 북적거려 일단 석탄박물관이 있는 곳까지 가서 맛있는 음식점을 찾자고 했다.

가면서 나무에 물을 뿌려 만들어 놓은 얼음조각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아뿔싸, 그곳에는 변변한 식당이 없고 기념품과 특산물과 식당을 함께 하고 있는 딱 한 곳의 식당밖에 운영을 하지 않았다. 위에 올라가면 더 맛있는 음식이 있을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하고 온 우리는 크게 실망을 하였고, 어쩔 수 없이 시골 정류장 근처에나 있을 법한 그곳에 들어가 산나물 비빔밥을 먹었다.

석탄박물관으로 가서 석탄산업의 변천사와 세계 각국의 암석과 화석들을 신비롭게 관람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청량리 역으로 돌아왔다.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해 청량리 역 근처 감자탕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약속을 잘 지켜준 아주버님과 남편에게 상을 주듯이 소주 한 병도 시켰다. 얼큰하게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물었다.

"여보! 나 오늘 잘했지? 약속대로 술도 안 먹고."
"응 오늘 당신 백점이야!"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칭찬을 받은 남편도 하회탈 같은 웃음이 얼굴에 가득 번졌고, 늘 살기에만 바빠 여행다운 여행 한 번 못해 본 우리 부부가 19년 만에 처음으로 손잡고 떠난 '눈꽃열차' 여행이었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 응모합니다.


태그:#눈꽃열차, #부부여행, #태백, #19년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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