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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열림원
사람이 살해당한 후에 겪는 고통은 실로 처참하다. 살해당한 당사자의 부모는 이루 말 할 수 없고, 친인척들과 세상 사람들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살해당한 당사자가 순진무구한 어린이라면 그 감정은 더욱 극에 달할 것이다.

그 고통의 자리에 있는 부모에게 과연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게 가능할까? 더욱이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는 것일까? 인간은 단순히 하나님의 용서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모든 게 봉합될까?

우리 시대 영상예술인의 달인으로 꼽히는 이창동 감독의 신작 영화 <밀양>의 원작 소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바로 그와 같은 내용의 실화를 소설로 엮어 냈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작가 서문)

실로 그렇다. 초등학교 4학년에 지나지 않는 순진무구한 알암이를 살해한 주산학원 원장을 누가 용서할 수 있겠는가? 자식의 존엄성을 한갓 벌레처럼 짓밟은 그 살인마를 어떤 부모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알암이의 부모, 특히 그 어머니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하려 했다.

알암이가 집을 나간 뒤 몇 달 동안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히고 정신적인 불안에 휩싸인 어머니는 이웃집 집사님의 권유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이른바 아이를 찾고 싶은 기복적인 마음이었다. 누구나 어려움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도와는 달리 아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그로 인해 극심한 갈등을 겪었지만, 그 집사님의 권유로 다시금 마음에 안정을 찾았고, 급기야 하나님의 용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알암이의 참사가 있는 지 꼬박 7개월 만의 일이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는 2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내의 마지막 비극을 불렀다. 다름 아니라 아내는 당돌스럽게도 자기용서의 증거를 원했다. 더욱이 그것을 지금까지의 원망과 복수심의 표적이던 범인을 상대로 구하려 한 것이었다."(74쪽)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하려는 어머니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그 학원장을 만난 후에는 이전과는 달리 돌이킬 수 없는 배신과 증오심으로 돌아서버렸다. 급기야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지닌 채 약을 마시고 생을 끝맺어버렸다.

이유가 뭔가? 그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살인마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것 같았지만 정작 용서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며, 더욱이 자살하고 만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뿐더러 그는 참회의 증표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후의 신장과 두 눈알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약속까지 해 놓고 있었다 하였다."(84쪽)

이유는 그것이었다.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살인자가 자신이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도 성인 같은 모습으로 자신보다 먼저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했던 까닭이었다. 더욱이 그가 사형직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이야기들이 그녀를 배신감과 자살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말한다. 하지만 용서가 그리 쉬웠다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렸겠는가? 용서는 그리 짧은 시간 동안에 이뤄질 수 있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부추겼던 게 문제요, 과정을 잃은 채 결과지상주의에 초점을 맞춘 용서였지 않나 싶다.

더욱이 살인자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다할지라도 그 가족들에게만큼은 참회하는 진정성이 묻어나야 옳다. 하나님의 용서가 살인자에게까지 가능하다하더라도 그 가족들의 동의가 없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학원장은 그것을 간과한 채 하나님의 용서에만 도취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벌레 이야기 (반양장)

이청준 지음, 문학과지성사(2013)


태그:#벌레 이야기, #이청준,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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