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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의 중정에 남아있는 옛 모스크의 대욕장 흔적
ⓒ 이은비
이글레시아 델 살바도르(구세교회)는 검박한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직전, 작은 부속실에서 유물을 구경할 수 있으며 회랑을 따라 나가면 작고 소박한 중정(파티오: 스페인식 건축물의 안뜰)이 나옵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기독교도들에 의해 구세교회로 바뀌었지만, 본래 이곳은 그라나다에서 가장 큰 모스크(이슬람 사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정에는 모스크의 일부였던 대욕장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조그마한 중정은 그대로 알바이신의 역사를 이야기해줍니다. 이슬람 전성기 때 알바이신에는 30개가 넘는 회교사원이 있었지만 모두 철저한 종교탄압의 속에서 같은 길을 걸어, 오늘날에는 모두 기독교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수백 년 전의 역사 속 이야기일까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무슬림을 향한 기독교인들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라나다가 기독교의 손에 함락된 지 510여년이 지난 2003년에서야 알바이신에는 새로운 모스크가 개원했습니다. 그러나 새 모스크가 알바이신에 세워지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시 당국이 종교적 이유와 건물의 설계를 구실로 사원 건축계획을 거듭 반대해왔기 때문이지요. 아직까지도 스페인 내에는 무슬림과 안달루시안을 향한 사회적 장벽이 공고히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는 잠시 중정에 앉아 멍하니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반목과 대립을 선동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던 당시 모스크 사원 대변인의 말을 떠올려봤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지요. 자아, 이제 성 니콜라스 성당 앞 미라도르(Mirador de San Nicolas: '미라도르'는 전망대라는 뜻)로 어떻게 간다? 시간을 보니 슬슬 날이 저물 때가 되고 있습니다. 석양이 비출 무렵에 딱 맞춰 도시를 감상하려면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시점에서, 저 검은 옷 청년에게 동행을 요청해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옷 청년이 아까부터 제게 상당한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 청년이 구세교회를 다 구경하고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걸기로 결심했습니다.

SOS! 도와줘요, 흑기사!

아니나 다를까, 제가 교회를 나오자마자 청년도 저를 따라 나오다가 입구에서 마주쳤습니다.

"올라! 또 만났네요. 이제 '우리' 어디로 가면 되는 건가요?"

제가 손을 흔들며 능청스럽게 인사하자 이 친구, 놀라긴커녕 소탈한 웃음을 터트립니다.

"음. 맞아요. 사실은 당신이 제대로 갈까 걱정됐어요. 마침 나도 하릴없이 알바이신을 둘러보던 참이었기 때문에 방향을 바꿔서 이 위로 가보면 어떨까 싶어졌죠. 하지만 이렇게 결정하게 된 동기는 당신이 길을 물어보았기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청년은 이렇게 순순히 실토하더니 "그럼,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 알바이신을 마저 봐야겠죠?"라고 말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알바이신 지구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동행인이 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친구는 독일에서 온 '토마스'라는 이름의 청년으로, 알고 보니 독일판 <파이낸셜 투데이> 신문기자였습니다. 지난 몇 년간 쉴 틈 없이 일했는데, 올해 3월까지 휴가를 쓰지 않으면 휴가가 사라질 참이었기 때문에 한 달간 휴가를 내고 스페인으로 여행 왔다고 합니다. 영어가 굉장히 유창합니다. 저는 신문기자라는 말에 폭소를 터트리곤, "이봐요. 내 직업도 맞춰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학생? 아니면 투어리스트 가이드? 도저히 모르겠어요."
"정말 쉬워요. 나도 당신이랑 같은 직업이거든요"이라고 말하니 놀라워합니다. 성 니콜라스 성당을 돌아 뒤로 가니 이제는 제법 관광객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길을 찾아왔군요. 동행인 토마스는 이 길을 한두 번 다녀본 게 아닌지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정확히 찾아갑니다.

▲ 평화로운 알바이신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 이은비
그라나다의 장엄한 일몰은 시작되고…

마침내 미라도르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아름다운 핑크빛으로 변한 도시 풍경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첨탑과 돔과 기와올린 지붕들이, 그라나다라는 거대한 바다 위의 작은 물결처럼 잔잔하게 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저런 곳까지 가 볼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지만 그것은 공연한 욕심이겠지요.

바야흐로 석양이 저물고 있습니다.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아 알바이신의 하얀 외벽이 핑크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알함브라가, 그라나다 전체가 불에 타듯 석양에 물들고 있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꼭 올라와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알함브라는 옛 무어인들이 말하던 대로 과연 '칼랏 알-하르마(Qal'at al-Harma: 붉은 요새)' 그 자체였으니까요. 등 뒤로 버티고 선 알바이신이, 발아래 펼쳐진 도시 전체가, 저 너머로 보이는 알함브라가 모두 붉게 타오르는 순간. 마치 그라나다는 이 순간만을 위해서 하루를 기다려 온 것 같습니다.

▲ 알바이신 지구의 꼭대기 부근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
ⓒ 이은비

▲ 저물어가는 석양을 받아 하얀 외벽이 핑크색으로 물든 알바이신의 집들
ⓒ 이은비
일몰이 끝나갈 때 즈음 길을 따라 내려오니, 흙벽을 쌓아 만든 거대한 문과 그 주변을 둘러싼 트라이엄프 광장(Plaza del Triunfo)이 보입니다. 이곳을 통과해 나가면, 바로 그랑비아 데 콜론 대로와 마주치면서 조금 전까지 저 위에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다시 범속하고 바쁜 21세기 대도시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우와. 정말 너무 멋진 곳이었어"라고 말하며 길거리에 조성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주무르니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응. 이제 슬슬 배가 고픈데?"

"나는 다리도 너무 아프고 씻어야 할 것 같아서 이만 숙소에 들어가 봐야겠다"라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닌 제가 말하니 토마스가 묻습니다. "그래? 저녁은 어쩌고?"

"글쎄…."
"난 저녁에 멋진 레스토랑을 가볼까 생각 중이야. 플라자 누에바 근처에서 재즈공연을 하면서 식사나 술을 파는 레스토랑들이 있는데 진짜 괜찮대."

"누가 그래?" 제가 구미가 당기는 표정으로 물어보니 토마스가 어깨를 으쓱합니다.
"내 독일어판 가이드북이."

흐음. 토마스를 위해 마음 속으로 독일어판 가이드북이 제발 나의 여행책자가 아니라 북미판 <론리플래닛>만큼만 제 값을 하는 녀석이길 빌어주었습니다. 제가 별 다른 말이 없자 토마스가 덧붙입니다. "각자 숙소에서 좀 쉬다가 한 세 시간쯤 후에 다시 만나 밥 먹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나도 내일 이 도시를 떠나려면 내 숙소에 가서 짐을 좀 챙겨놔야 하거든."

"지금이 6시니까 9시를 말하는 거야?"
"응. 9시 반이 좋겠다. 스페인 음식점들은 10시부터 저녁식사를 내놓으니까."

알바이신을 실컷 헤맨 탓인지 정말 배가 출출해서 도저히 오늘 저녁은 안 먹고 잘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괜찮은 식당을 물색해서 저녁을 먹고 싶었는데, 누군가 아는 곳으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저는 "좋아"라고 한 뒤, 모든 여행객들과 현지인들의 랜드 마크가 되고 있으며 저 자신조차 오늘 하루 동안 약 5번은 가봤던 것 같은 새 광장(Plaza Nueva)의 산타아나 교회(Iglesia de Santa Ana) 앞에서 9시 반에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거참, 이렇게도 약속을 잡을 수 있는 거군요.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기는 처음이어서 신기합니다.

▲ 숙소가 위치한 알바이신 지구의 칼데레리아 누에바 거리는 저녁에 더 흥겹습니다. 아랍식 찻집과 상점마다 관광객이 북적거립니다.
ⓒ 이은비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이 펼쳐지는 그라나다의 뒷골목

토마스와 그랑비아 데 콜론 대로에서 헤어진 뒤, 호스텔로 가기 위해 칼데레리아 누에바 거리를 따라 올라오던 저는 대낮과는 사뭇 다른 북적북적한 분위기에 놀랐습니다. 이 부근은 저녁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활발해지는군요. 아까까지는 문을 열지 않았던 상점들도 가게 문을 활짝 열며 영업을 하고 있고, 페이퍼 랜턴이 앞에 내걸린 아랍식 찻집 안에는 사람들이 반쯤 누운 자세로 물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골목골목마다 관광객이며 현지인들이 가득 차서 바쁘게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대로 호스텔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호스텔이 위치한 칼데렐리아 누에바 거리를 조금만 더 구경할 참으로 골목 끝까지 올라가봤습니다. 철물점과 작은 바르가 있는 골목 끝에는 조그마하고 아담한 성당이 있었습니다.

아랍구역으로 유명한 이 골목에조차 성당이 있는 것도 그라나다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어인들 거주지로 유명한 알바이신이지만, 기독교 세력의 철저한 개종강요로 이제는 진정한 무어인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집시나 무어인 혈통의 안달루시안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아랍식 물건들을 팔지만, 그들은 저녁 7시가 되면 가게 문을 닫은 뒤 동네의 작은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올립니다.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 2층 난간에, 귀여운 개 두 마리가 유머러스하게 앉은 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찌나 의젓하게 앉아 있던지 절로 웃음이 나더군요.

▲ 검은개와 흰개가 의젓하게 2층 발코니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은 직후 큰 곤란에 처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 이은비
일촉즉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이다

몇 장을 찰칵 찰칵 찍는데, 옆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사진 찍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소리 무시하고 몇 장 더 찍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개 두 마리가 앉아있는 발코니 안에서 집주인이 나오더니, 저를 쏘아보고는 발코니 문을 쾅 닫아버렸습니다. 놀란 눈으로 카메라를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야 저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이해됐습니다. 건물이나 가게 안에 있던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까 웅성웅성했던 것은, 제가 카메라를 꺼내드는 순간 이들이 '찍지 말라'고 제게 경고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못 알아들었던 것이죠.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몸집 큰 아저씨들이 가게에서 나와 험상궂은 눈길로 계속 노려보고 있습니다. 술집에서 술 마시며 가게 한 구석을 죽치고 있던 동네사람도 하나 둘 나와서 저를 쳐다 봅니다. 겨우, 제가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숙소로 가는 길을 그 아저씨들이 가로막고 있더군요. 어쩌면 사진 때문에 시비를 걸어올지도 모르고, 사진기를 뺏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어쩌지'라는 생각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성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때는 7시. 저녁미사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성당이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하느님이 무신론자에게도 관대한 분이시길 빌며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래된 성당은 아닌 것 같은데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내부가 인상적인 성당입니다. 노란색 바탕에 천장에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돼 있습니다. 제가 들어간 순간, 미사가 시작됐는지 안쪽 철창 안에서 문이 열리며 하얀 너울을 쓰고 하얀 옷을 입은 수녀님들이 7명 정도 나와 미사를 시작합니다.

작은 성당에서 지역민들의 신실한 신앙심을 엿보다

30분 넘게 진행된 미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경건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어떤 교파인지 모르겠지만 미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성가로 진행했거든요. 머나먼 이국 땅 그라나다에서 듣는 성가는 신비롭고 아름다웠습니다. 막 성가를 동영상으로 저장하려는 순간, 뒤에서 문이 열리고 아까 그 험상궂은 아저씨 2명이 들어옵니다.

▲ 관광지도, 명소도 아니지만 소박하고 신실한 지역 교구민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었던 칼데레리아 누에바 거리 끝의 성당
ⓒ 이은비
'날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건가?'라고 생각하며 얼른 눈치를 살펴보니, 떡대 아저씨들은 들어오자마자 눈으로 저를 찾더니, 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강렬하게 한번 째려봤습니다.

마치 '문제 일으키지 마라, 동양인!'이라는 듯 한 무언의 경고를 들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순간 진심으로 저 사람들이 저를 잡으러 들어 왔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두 떡대 아저씨는 모자를 벗어들더니 성호를 긋고는 성당 한 구석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알고 보니 굉장히 신실한 교인들이셨군요.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해서 죄송해요, 아저씨.

우연한 사고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인연을 감사해 하며, 저는 살짝 교회를 빠져나왔습니다. 거리로 나오니 이제는 아무도 저를 쳐다보고 있지 않네요. 천천히 골목길을 내려가 겨우, 오아시스 호스텔로 들어섰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스페인, #배낭여행, #그라나다, #알바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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