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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쪽팔리게…. 아, 쪽팔려."
[봄] "쪽팔리게가 아니라 부끄럽게, 창피하게."


대개의 경우 이것이 엄마와 딸의 대화라면, 딸이 '쪽팔리다'는 속어를 쓸 때 엄마가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는 바른말을 가르쳐주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신(공효진)과 봄이(서신애)는 그렇지 않다. 딸인 봄이와 엄마인 영신의 관계는 이러한 모녀 관계의 전형성을 보이지 않는다. 엄마라고 하기에는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고, 아이라고 하기에는 발칙하게 조숙하다.

사실 모녀 관계의 전형성이란 습관적으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온 것에 불과한 상투성인지도 모른다. 상투적인 생각이었을 뿐이지 일반적이거나 대표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말이다(사실 영신은 어리지만 철없지 않고 봄이는 천사를 믿는 천진한 아이다).

가족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상투적인 재현 방식 속에서, 영신과 봄이가 보여주는 새로움은 아빠가 없는 모녀 관계라는 점에서 더 특별하게 드러난다. 영신은 어린 나이의 미혼모('미혼'이라는 용어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독신모'라는 용어가 주장되고 있으나 그리 확산되어 있는 인식은 아니다)이고 봄이는 애비 없이 자라는 불쌍한 아이다. 상투적으로 보면 둘 다 불행을 겹겹이 지고 사는 처지다.

그런데 둘이 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남편 없는 여자와 아빠 없는 아이가, 아니 어쩜, 명랑 발랄 유쾌 상쾌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가정 내에 남편 혹은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 혹은 아빠가 없음으로 해서 미혼모 가정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져야 할 것 같은 불행의 그림자는 (비록 나중에 봄이가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고통을 받기는 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모녀 가정을 보여주는 방식의 새로운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맙습니다>에는 모자 가정도 나온다. 영신의 첫사랑이자 봄이의 생물학적 아빠인 석현(신성록)과 석현의 어머니(강부자)가 그들인데, 이 가정은 부유하기는 하지만 행복한 가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 봄이의 생부 확인을 둘러싼 석현과 석현 모의 갈등 와중에 석현은 "전 어머니한테 뭐예요? 아버지 대용품이에요?"라며 대든다.

석현의 어머니는 석현의 아버지로부터 오래전 버림받고 청상과부처럼 살아왔으며 남편의 부재와 사회적 시선에 대한 원망을 아들인 석현의 성공으로 보상받고 싶어한 것이다. 이 가정은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의 아들이 사회적인 성공을 통해 가장의 자리를 메우고,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전형적인 스토리를 반영하고 있다.

그 전형성은 이성애자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 가족의 형태에 어긋나는 가족들이 결함을 보상받는 방식에서 비롯되는데, 주로 아들의 입신양명으로 성취된다. 그래서 석현의 성공적인 삶에 흠이 될 수 있는 영신과 봄이의 존재를 석현의 어머니는 부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 없는 석현 모자 관계는, 영신과 봄이의 아버지 없는 모녀 관계와 달리, 부재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한 여자를 불행한 스토리의 인물로 만들고자 할 때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쓰인 방법은 그녀를 미혼모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는 불행의 시작이면서 부도덕한 여자로 내몰려 경멸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바로 영신의 경우이다. 혹은 짧은 결혼 생활 끝에 남편은 죽고 자신은 임신했음을 깨닫는 것이었다.

아비 없는 아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든 일이 도사리고 있을 것인가는 어렵지 않은 상상이다. 남편이 있었을 때의 짧은 행복은 그녀의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는 남편이 도망갔거나 멀리 떠났고 그녀가 남편 역할까지 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지만 자식들은 그녀의 요구에 저항한다. 바로 석현 어머니의 경우이다. 몇 번인가 보았음직하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스토리이다. 얼마나 흔해 빠졌는지 지겨울 정도다. 행복한 가족의 조건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몇 달 전 SBS에서 방송한 <눈꽃>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 의지하던 딸이 나에게 전쟁을 선포했다"와 "눈꽃 같은 엄마와 불꽃 같은 딸의 핏빛 이야기"라는 홍보 문구는 드라마의 정조를 한번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엄마와 딸의 전쟁 이야기라는 이 드라마에서 딸 다미는 어느 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후 마치 강애를 괴롭히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돌변한다. 그 후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장면은 딸 다미가 엄마 강애를 눈이 찢어져라 째려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정하던 엄마와 딸을 적으로 만든 것은 '아버지의 부재'였음이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영신이와 봄이가 이전의 수많은 스토리와 다른 것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전혀 없지는 않다. 아버지의 존재와 부재의 차이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석현과 석현 모의 개입이 있을 때 영신은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모녀관계 내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의 문제이다).

영신과 봄이의 가정에는 남자가 없다. 미스터리는 남자가 아니라 봄이의 동생이며 영신의 아이이다. 영신은 미스터리가 할아버지로서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자기 혼자 안팎의 살림을 도맡아야 하는 것에 불평하지 않는다. 영신은 어른으로서 자식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친구처럼 봄이와 대화를 하고 있다.

쪽팔린다는 표현을 썼다고 봄이가 타박을 해도 어린 게 까분다며 야단치지 않는다. 영신은 부도덕해서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덜컥 아기를 낳아버리는 대책 없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불편한 인식에는, 아무리 그것이 사회에서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해도, 구애받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인 것이다.

나중에 민기서(장혁)에게 "내가 미혼모인 게 잘못되었거나 이상한 게 아니고 다른 거죠?"라고 물어보지만 자기 확인을 위해 반복하는 것이고, 이미 처음부터 영신의 몸과 마음에 내재된 생각이었던 것이다. 영신과 봄이의 친구 같은 유대감이 이후 에이즈 때문에 벌어지는 고통스런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즐겨 보던 미국 드라마에 <길모어 걸즈>가 있다. 한국에서는 케이블 방송 On-Style에서 시즌 6까지 방송했다. 길모어 걸즈(girls)는 엄마인 로렐라이 길모어와 딸인 로리 길모어를 가리킨다. 로렐라이는 16살에 로리를 낳았고 결혼은 하지 않았다. 로렐라이가 겨우 32살이 되었을 때 로리는 벌써 16살이 되었다. 그 둘의 사는 이야기가 <길모어 걸즈>의 뼈대이다.

<길모어 걸즈>가 흥미로웠던 이유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갓 소녀가 된 여자와 다소 오랫동안 소녀였던 여자가 친구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나이를 먹으면 엄마와 친구가 된다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많은 딸들에게는 엄마와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너무 늦게 찾아오곤 한다. 그래선지 대중문화 속의 모녀 관계가 어떤지 더욱 관심 있게 보게 된다. 나에게 16살 딸과 32살 엄마가 서로 원망도 하지 않고 친구로 지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서로 "저 사람 때문에 불행하다"라고 생각한다면 둘은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생각이 결국 불행을 만든다. 남편이 없는 엄마와 아버지가 없는 아이가 불행할 것이라는 것도 에이즈가 나쁜 병이며 에이즈 걸린 사람과는 같은 공기 아래 살 수 없다는 편견만큼이나 잘못된 편견이다.

그들은 부도덕한 여자와 애비 없는 불쌍한 아이라고 보는 시선 때문에 힘든 것이지 진짜 부도덕해서 혹은 애비 없어서 힘든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서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다. 명백해진다, 아빠 없는 모녀의 불행은 그녀들과는 상관없이 다 밖에서 만들어진 것임이.

영신이 더 이상 "나는 무생물이에요. 책상이나 걸상처럼, 감정이 없는 무생물이에요"라고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봄이의 아버지 자리를 뒤늦게 찾으려는 석현에게 "내 인생에서 그만 사라져 줄래?"라고 미련 없이 요구하고, 에이즈 보균자인 봄이를 푸른도 주민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준 것처럼 영신을 더 이상 미혼모라는 편견적인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영신이와 봄이 가정을 부족함 없는 행복한 가정의 한 형태로 인정해 줄 때, 영신과 봄의 친구 같은 모녀 관계는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영신과 봄이를 지켜보는 동안 뿌듯했고 <고맙습니다>에 고맙다.

덧붙이는 글 | 티뷰기자단


태그:#방송 프로그램, #드라마, #고맙습니다, #모녀 관계, #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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