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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박종철 하나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었고, 그렇게 다시 하나로 되는 과정이 곧 민주화의 길이었다.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가 되는 과정, 곧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으로부터 그해 6월말까지의 장엄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요, 목적이다."

▲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 이정환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서문 중 일부다.

이 책을 쓴 사람은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그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6월의 이름' 하나를 책을 통해 세상에 공개했다. 한재동.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는 이부영 전 의원의 편지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숨은 조력자'다.

"세상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에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많았어요. 위험한 일들을 참 많이 했죠. 필기도구와 종이를 제공한다든지, 신문도 몰래 갖다 줬고, 심지어 외부에 비둘기(비밀 편지를 뜻하는 은어)를 날려주기도 했어요. 그러다 옷 벗은 경우 많습니다.

사실 그런 분들께 민주화의 영광도 드려야 하고, 감사 표시도 해야 하는 거죠. 전병용씨나 한재동씨가 그중 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김 전 수석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6월의 숨겨진 이야기'를 전하려 애썼다. 숨은 조력자가 많았다는 것, 그리고 우연 같은 필연이 작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민주화 운동의 의미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현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65세), 하지만 인터뷰는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기사에 나오는 박종철 사건 관련 인물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원. 당시 민주화 운동으로 영등포교도소에 복역 중 박종철 사건 범인으로 수감된 고문 경관들의 '진범은 우리가 아니다'는 내용의 호소를 교도관들에게 전해 듣고, 경찰의 은폐·조작 사실을 폭로하는 편지를 작성한다.

한재동 당시 교도관. 이부영 전 의원에게 의혹을 전하고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필기구를 제공한다. 또한 전병용씨에게 '비둘기 편지'를 전달한다.

전병용 전 교도관. 1975년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 위기에 처한 김지하씨의 양심 선언을 김정남씨에게 전달하는 등 일찍부터 김정남 전 수석을 도왔다. 박종철 사건 당시에도 이부영 전 의원의 편지를 김 전 수석에게 전달한다.

김승훈 신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구실을 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기념 미사에서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2003년 6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황적준 박사.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과장으로 박종철의 죽음을 '심장 쇼크사'로 처리하라는 치안본부의 압박을 받지만, 소신대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가능성이 높다'는 부검 소견서를 작성해 진실을 밝히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또한 박종철 사망 1주기에는 부검 당시 일기장을 공개해 경찰이 소견서를 조작한 사실을 증언한다. / 이정환

"이부영씨가 영등포교도소에 있을 때, 마침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수감됐어요. 헌데 이 사람들이 가족과 면회하는 장면을 본 교도관들이 수군거리더라는 거예요. '진범은 자신들이 아니라고 억울해하더라, 3명이 더 있다더라.' 강진규는 '내가 언제 너 사람 죽이라고 가르쳤느냐, 내 아들 아니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무릎꿇고 빌면서 '사실 제가 안 죽였습니다'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해요.

이런 얘기들을 한재동 교도관이 듣고 그 때마다 이부영씨에게 알려준 거죠. 그래서 사건 전모를 파악하게 된 이부영씨가 한재동씨에게 사건 진실을 써서 전해줬고, 한재동씨가 전병용씨한테, 그리고 다시 전병용씨가 나한테 편지를 전해줬는데 이 과정이 참 오묘합니다.

한재동씨가 원래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부터 이부영씨와 안면이 있었어요. 이부영씨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는데, 마침 또 그때 거기 근무하고 있었던 거예요. 누구는 역사의 힘이라고 그럽디다만, 참 어떤 오묘한 섭리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병용씨에게 제가 편지를 받게 된 과정도 그래요. 그때 우리 두 사람 모두 도피 중이었어요. 연락이 끊겨 있었죠. 문득 전씨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전화를 했더니 '꼭 뵙고 싶었다, 어디에 계시느냐'고 해서 편지를 받게 된 거죠. 바로 이틀 뒤에 전병용씨가 체포됩니다. 만약 그때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그냥 사장되는 거였죠."

- 교도관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군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그동안 한재동이란 사람의 이름을 공개할 수 없었던 것은 2년 전까지 그 사람이 현직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이름을 공개했을 때, 혹시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20년 동안 공개하지 않은 겁니다."



'박종철' 진실 드러나게 한 숨은 조력자, 교도관들

ⓒ 6월항쟁기념관
김 전 수석은 이부영 전 의원의 편지와 관련 보도 내용을 종합해 세상에 진실을 알릴 준비를 했다. 문제는 '전파 방법'이었다. "하늘이 전두환 정권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할 정도의 진실. 국회의원도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정의구현사제단에 부탁하게 되는데, 김 전 수석은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보이지 않는 손'을 느꼈다고 한다.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미사에서 발표하기로 했어요. 문제는 '누가 발표하느냐'였죠. 결국 그동안 힘든 일, 궂은 일을 맡았던 김승훈 신부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하기로 했어요.

헌데 함세웅 신부가 성명서를 갖고 찾아갈 때마다, 김 신부 어머니가 곁을 떠나지 않는 거예요. 이걸 발표하면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일인데, 도저히 함 신부가 얘기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갔다 돌아오고, 돌아오고 했어요.

그런데 (기념미사 하루 전인) 1987년 5월 17일에도 어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나가시면서 '내가 어제 좋은 꿈을 꿔서 비켜주는 거야'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함정에 빠진 김 신부를 어머니가 어떻게 꺼내줄까 걱정하고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서 손을 잡아 올려주는 꿈이었다고 해요. 참….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양반(김승훈 신부) 돌아가시고 나니까 참 마음이 애련합디다."

- 선생님도 두려웠을 텐데요.
"물론 두려웠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랬어요.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반공 경찰'이란 큰 흐름이 완전히 꺾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뭐, 빨갱이 잡고 하는 걸 자기 사명으로 생각하는 아주 전투적인 극우주의자들도 있지 않겠어요? 테러나 납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죠."

당시 독재 정권에서 이른바 '반공 경찰'과 맞선 사람들은 검사'들'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형사부 검사로 박종철 고문 타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이란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 전 수석은 다른 의견을 내놨다.

▲ 김 전 수석이 당시 팩스 내용을 옮겨 적은 노트를 보여주고 있다.
ⓒ 이정환
"'안상수씨가 부검을 결정하고 지휘했으며, 부검에 입회했던 황적준 박사가 진실을 얘기해 박종철 고문 치사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 이렇게 돼 있죠. 그런데 2005년이었어요. 박종철 사건 당시 부장검사였던 최환씨가 장문의 팩스를 보내왔어요.

내용인즉 1월 14일 저녁에 남영동 대공분실 형사들이 서울지검 공안부에 찾아와요. '시체를 가족들에게 인계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말이죠. 가족을 설득해서 빠른 시일 안에 화장하고 종결 처리하려고요. 뭐, '우리 다 한 통속 아니냐'는 생각이었겠죠. 그때가 저녁 7시 40분이었는데 학원 담당 검사가 퇴근한 뒤였어요. 공안부에는 최환 부장검사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갔더니, 글쎄 이 사람(최환씨)이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신병을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퇴근해 버린단 말이죠.

남영동 형사들로선 복병을 만난 거죠. 항의해도 안 되니까 치안본부에 보고해요. 당장 최환씨한테 밤중에 '왜 네가 그러느냐, 해달라면 해주지'하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고위 당국자는 물론 중앙정보부 당직자, 그리고 나중에는 청와대 같은 곳에서까지. 그래도 최환씨가 버틴 겁니다.

다음날,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 (갑론을박했고), 헌데 서로 안 맡으려고 하고. 결국 타협안이 형사부 당직검사였던 안상수씨가 실무를 맡고 최환씨 지휘를 따르라, 이렇게 된 거예요. 부검 결정도 최환씨가 했고요. 안상수씨에게 '나중에 책임 문제가 따를지 모르니 철저하게 입회해라, 부검 소견을 문서로 받아놔야 한다'는 지시를 내려요. 그래서 안상수씨가 소견서를 받아놓게 된 겁니다."

- 적어도 부검에 이르는 과정에서 최환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그런데 안상수씨, 자기가 아주…."

"북한 민주화가 박종철 열사 뜻 있는 길? 신중해졌으면..."

오랜 이야기에 목이 답답해졌는지 김 전 수석이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잠깐 쉬었다, 계속하자'는 말에 그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박종운씨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박종운씨는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보호하고자 했던 학교 운동권 선배.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박씨는 지난 1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시장 경제를 지키고 북한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 1987년 2월 7일, 박종철 고문 살해 항의 시위.
ⓒ 박용수[6월항쟁기념관]
"박종철이란 후배가 죽어서 온 세상이 떠들썩한데, 당시 얼마나 죽을 죄를 졌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엄청난 혁명 과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때 박종운이 나타나는 게 인간적으로 옳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 솔직하고 경건하게 나타났다면, 국민 여론 때문에 맘대로 구속도 못 시켰을 것이고, 재판 가더라도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섰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죠.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북한 민주주의를 이루고 시장 경제를 이룩하는 것이 박종철 역사의 뜻을 잇는 길이다? 아니죠. 그 전에 먼저 메시지가 있어야죠. '나는 어떻게 보면 박종철을 죽인 사람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고인의 뜻에 맞게 사는 건지 생각하며 하루하루 조심스럽게 살고 있다'는. 그런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설사 자기 심정이 그렇다고 해도 처신을 신중하게, 또 신중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하라고 얘기하고 싶은 심정이죠.

박종철의 죽음이 어땠습니까? 그 사람은 민주화를 위해 태어났고 민주화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 꺼풀씩 한 꺼풀씩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있었고, 마치 민주화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처럼, (박종철은) 일정 간격으로 그때마다 부활해서 국민의 분노를 폭발케 했어요. 그렇게 해서 자기의 진실도 밝히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도 이룩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김정남 전 청와대 수석은 누구?

ⓒ이정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30년 동안 민주화 운동이란 '외길'을 걸어왔다.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운동 배후 인물로 구속됐다. 이후에도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 민주화 운동 단체 결성에 참여했다.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담은 성명서 발표, 김지하의 양심 선언, 최종길 교수 고문 치사 사건과 인혁당 사건 진상 폭로 등 막후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구속 인사 구명 운동, 구속자 가족 지원, 수배자 은신처 마련 등 활동으로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했고, 6·29선언 이후에는 <평화신문>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잠깐 '외도'도 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대통령 교육문화사회수석에 임명됐으나, <조선일보>등 신문의 사상 검증 대상으로 찍혀 얼마 지나지 않아 물러나야 했다. 이후 자신의 호를 딴 '우촌누실(又村陋室)'에 칩거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민주화운동 역정 30년을 담은 <진실, 광장에 서다>가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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