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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석 수원시민신문 대표
ⓒ 유혜준
<수원시민신문>(대표 김삼석)이 창간 1주년을 맞이했다. 창간 1주년 기념식은 16일(금요일) 저녁 경기민언련 강당인 시루봉에서 할 예정이다. 말이 창간 1주년이지 실제로 <수원시민신문>이 창간된 지는 만 2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제야 창간 1주년 기념식을 하는 건 준비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한달에 한두 번씩 창간 준비호를 12호까지 내고서야 '진짜' 창간을 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돈' 때문이다.

지역신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려운 재정이다. 김삼석(43) 대표 역시 취재보다도 인쇄비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뛸 수밖에 없는 여건에서 2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신문을 발행해 왔다.

실제 창간일은 2월 16일이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창간기념일을 한달 넘겨서 창간기념식을 하는 김삼석 대표의 감회가 어떨지 궁금했다. 그래서 햇빛 좋은 지난 13일, 수원의 화성 아래 누런 잔디밭에서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햇볕은 따뜻했으나 이른 봄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어 나중에는 둘 다 덜덜 떨었다.

하루에 몇 번씩 천당·지옥 오가며 창간 준비

"2004년 12월에 술집에서 시작했지요. 다섯 명이서 맥주를 마셨는데 취중진담이라고 거기서 의기투합해서 한 사람은 돈을 모으고, 한 사람은 실무를 맡아서 하고, 한 사람은 시민단체를 챙기자고 했지요. 이래서 시작은 했는데 실무를 맡겠다고 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서 결국은 내가 혼자 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창간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김 대표의 대답이다. '말은 꺼냈지, 책임은 져야겠지, 에이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죽기 살기로 해보자'하는 생각에 그냥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2002년에 1년가량 수원의 지역신문에서 기자활동을 한 적이 있다. 김 대표 말로는 '믿거나 말거나' 당시에 매주 특종을 터뜨렸단다. 그 때부터 풀뿌리 지역신문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2005년 2월 16일 김 대표는 창간준비위원장으로 모실 분을 만나 설득했고, 곧장 컴퓨터대리점으로 가서 노트북과 프린터를 샀고, 창간기금 계좌를 트러 은행에 갔다.

"노트북 한 대 얻고 은행계좌 트니까 벌써 신문을 다 만든 것 같더라구. 그런데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서 자려고 누웠는데 지옥인 거라. 내일 아침부터 뭐하지? 야, 이거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지옥이 따로 없더라구요."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창간준비를 시작했다는 김 대표. 그래도 신문 창간을 위한 작업에 매진했다. 수원지역의 이름 있는 사람은 무조건 만나서 창간준비위원으로 영입을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들에게 '창간준비 실무소식'을 날마다 이메일로 발송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고, 누구한테 창간기금을 얼마를 받았고, 누가 창간위원 후보인가 하는 소식을 거의 일지를 쓰다시피 하면서 제가 움직인 일거수일투족을 숨소리만 빼놓고 다 전했어요."

일년 반을 그렇게 했단다. 노트북 사고, 계좌를 튼 두 달 뒤인 4월에 온라인 사이트를 열었고, 5월에 종이신문 준비호를 발행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창간준비호만 내다가 2006년 2월에 드디어 정식으로 창간호를 발행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신문을 3만부나 찍어냈단다.

▲ 인터넷 수원시민신문
"처음에 종이신문 찍을 때 욕심을 내서 3만부를 찍었어요, 무식하게. 신문으로 홍보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지. 인쇄소에 이야기하니까 아이고, 메이저급이네요 하더라구. 이게 메이저급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찍어대니 인쇄비가 엄청 나간 거야. 완전히 돈 먹는 하마였지."

시행착오를 거친 뒤 현재는 1만2천부를 찍는다. 처음에는 1만5천부라고 해서 '뻥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니 김 대표는 3천부를 깎아서 불렀다. 믿어주기로 했다. 유료독자가 몇 명인지도 물었지만 그건 신문사의 품위유지를 위해 안 밝히기로 했다.

여러가지 프로젝트로 신문사 운영비 마련

신문은 격주로 발행한다. 구독료가 한달에 만원 이상 하는 아주 비싼(?) 신문이다. 신문값은 후원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그 비싼 돈 내고 신문을 볼까. 지금까지 27호가 발행되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15명을 만나 창간위원을 권유하기도 하면서 자금을 끌어 모았지만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 결국은 돈을 버는 '프로젝트'를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처음에 한 '프로젝트'는 도자기전시회였다. 이천도자기협회와 협찬을 해서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일주일간 전시회를 열어 400~500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번 돈은 두 달 만에 바닥이 났고, 다음에는 책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따내서 그 정도를 벌었고, 그 돈 또한 죄다 신문 만드는 데 쏟아 부었다. 2005년 11월에는 후원주점을 열어 운영비를 마련했다.

한번은 금강산 가극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거 사업이 되겠다싶어 연락을 했더니 경기도권에는 표를 못 팔았다고 하더란다. "그래? 내가 팔아줄께"해서 입장권 판매를 대행했고, 250만원을 벌었다. 그런데 가극단 뒤풀이 하는데 150만원을 폼나게 썼다.

"이 양반들, 서울에서 공연하고 여기까지 내려오는데 내가 그냥 보낼 수가 있나. 따신 밥이라도 먹이자고 해서 내가 저녁 살께, 했지. 이 사람들 와서 엄청 먹었잖아. 막걸리, 삼계탕 좋다는 건 다 먹였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돈벌이(?)에 나선 덕에 신문사 앞으로 빚은 없단다. 목돈이 나갈 만한 일은 안하고, 무리를 안 하니까 그런대로 유지를 해내갈 수 있었다. 후원주점을 열어 운영비를 마련한 뒤 매달 조금이나마 활동비를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가계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 묻지 않았다.

현재 취재는 김 대표와 임이화 기자 이렇게 2명이 한다. 김 대표 말에 의하면 임 기자는 이것저것 다하는 '멀티플레이어'다. 취재, 편집, 회계, 총무, 신문발송 등등.

"시민기자로 80명이 등록되어 있는데 제대로 기사를 안 쓰지. 원고료를 안 주니까. 기사를 쓰는 사람은 10명 정도로 한 사람이 동영상을 올려주고, 두 사람이 사진기사 올리고, 고정칼럼을 7~8명이 써주고 있지요."

"그동안 해왔던 대로 무대포 정신으로 계속 가겠다"

수원에 연고가 없었던 김 대표가 수원에서 지역신문을 하게 된 건 처가가 수원에 있기 때문이다. 조작된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했던 김 대표 때문에 그의 아내는 수원의 친정에 내려와 있었고, 출소 뒤에 김 대표 역시 수원으로 와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 유혜준
김 대표는 오토바이를 타고 수원시내를 누빈다. 그가 오토바이를 선택한 건 '오로지 기동성' 때문이다. <수원시민신문>은 경기민언련의 사무실에서 곁방살이를 하는데, 오토바이를 사무실 앞에 세워놓으면 누가 슬며시 가져가 3번이나 잃어버렸다. 지난해에는 미끄러져 발등뼈에 금이 가는 사고도 당했다고. 완전히 낫지 않아서 지금도 날씨가 흐리면 신경통처럼 '반응'이 온단다.

김 대표는 2001년부터 띄엄띄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해왔다. 지금도 기사를 올리고 있는데 가끔 기사를 보면 너무 급하게 쓰거나 감정이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적을 했더니 "시간이 없어서 2002년에 '오연호의 기자만들기' 수업을 절반만 듣고 절반을 못 듣고 중퇴를 했기 때문"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취재의 대상이 문제가 있는 지역의 토호세력이거나 보수정당 세력이면 끝장을 내지. 그런 기사에는 당연히 감정을 실어요. 그런 세력들은 찍어내야 하니까."

김 대표의 '믿거나 말거나' 소신(?)이다.

김 대표의 지역신문 창간이 성공사례로 인식되었는지 여기저기서 '노하우'를 전수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몇 군데에 자료를 싸서 보내줬다고 한다. 김 대표의 노하우 덕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창간된 지역신문이 몇 군데 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지역신문을 만들려면 미쳐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하루 중 눈뜨고 있는 시간에는 신문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 떠 있는 시간에 고민하고, 아이디어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계획을 세우고 이러면 어떤 일이든 될 수밖에 없어요. 저도 사실은 <수원시민신문>이 1년을 넘길지 2년을 넘길지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어요. 준비호를 만들면서 과연 종이신문까지 찍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김 대표는 자칭 '국내에서 알아주지 않는 군사평론가'란다. 관련 기사를 여러 번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안 쓰고, 가끔 강연만 한다. 덕분에 신문을 만들면서도 군사적인 판단을 했다고 한다.

"적은 군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를 보게 하는 것을 나는 언론으로 본 거야. 여론을 주도하지는 못해도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으니까.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단체나 기관 열 군데가 하지 못하는 일을 지역신문사가 할 수 있다고 봐요."

지금도 여전히 신문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고 한다. 그래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그동안 해왔던 대로 무대포 정신으로 계속 가겠다"는 것이 김 대표가 <수원시민신문>을 꾸려나갈 앞으로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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