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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성벽에서 고성의 중심까지 당나귀 마차가 달린다. 저 멀리 화염산이 보인다.
ⓒ 조수영
오아시스 마을로 들어선다. 화염산 주변의 막막한 자갈과는 달리 가로수도 있고 작은 개울도 흐른다. 더운 날씨 탓에 밖에서 잠을 자서 집집마다 침대를 밖으로 꺼내놓았다.

흙더미 성벽이 이어진다. 고창고성(高昌故城·가오창구청)이다. 고대 고창왕국의 성터이다. 성벽의 둘레는 5.4㎞에 이르고 그 면적은 2.32㎢로 상암 월드컵경기장의 40배 정도 크기이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꺼운 성벽은 아랫부분이 12m 정도이며 현존하는 최고 높이는 11.5m이다.

예전에는 훨씬 높았을 것이다. 또한 원래는 사각형의 화려한 성곽도시였다고 하나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파손이 심해 지금은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 있을 뿐 거의 폐허가 된 도시유적이다.

▲ 대불사터. 불공을 드렸던 사각의 방형탑과 강의실인 복발탑이 있다.
ⓒ 조수영
▲ 지금은 흙벽만이 남은 고성의 흔적
ⓒ 조수영
입구에 서니 흙으로 지었다가 황폐화된 도시의 흔적이 눈앞에 넓게 펼쳐졌다. 그 뒤로 붉은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는 화염산과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 천산이 보인다. 입구에는 고성의 중심까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잠시나마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차를 타야했다.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당나귀가 달린다.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집터와 내벽의 흔적이 보인다. 생각보다 넓어 마차로도 한참을 달려 대불사 터에 도착했다. 사원의 중심에는 사각의 방형탑이 있고, 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복발탑이 있다. 모두 인도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불공을 드렸던 사각의 방형탑
ⓒ 조수영
▲ 정상부가 떨어져 나간 복발탑. 현장이 설법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 조수영
현장이 설법을 했던 방형탑

사원의 정면에 있는 사각의 방형탑은 작은 감실이 뚫려 있는데 불상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벽화는 흔적만이 있었다. 탑 주변을 돌면서 불공을 드렸을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복발탑은 천정에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현장법사가 400명을 모아두고 설법하던 강의실로 유명하다.

이 좁은 공간에 어찌 400명이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강의실은 흙을 말려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천정은 원형으로, 바닥은 사각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소리의 울림을 조절했다고 한다.

627년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는 이 곳을 지날 때 국왕의 부탁으로 두 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을 때 고창국은 이미 멸망하고 없었다.

▲ 복발탑의 둥근 천정으로 보이는 투루판의 하늘
ⓒ 조수영
이에 혹시 현장이 당나라의 스파이가 아니었나 하는 설도 있다. 우연히도 현장이 여행 중에 들렀던 나라와 그 직후 당이 정복했던 나라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당시 당나라는 불교를 이데올로기로 삼기 위해 힘썼고 현장은 왕조의 입장에서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을 해석했다. 이렇듯 박식한 현장은 당시 서역 소국들은 대부분 불교를 신봉했기에 훌륭한 스파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혹시 황제가 은밀하게 밀지를 내렸다면 모르지만 황제가 직접 서역으로 떠나는 승려에게 여행을 허가했다는 '현장법사전'의 기록은 믿기가 힘들다.

게다가 그가 황제의 명령으로 쓰게 된 <대당서역기>에는 그가 다녀간 각국의 상황과, 기후, 관습과 국왕의 성격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현장이 꼼꼼하게 관찰하여 정리한 서역 여러 나라의 정보는 중국의 상인에 의해 본국으로 전달되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이것이 위대한 <대당서역기>로 변모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

▲ 복발탑의 바닥은 사각으로 만들어 소리의 울림을 조절했다고 한다.
ⓒ 조수영
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群)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이 500년간 사용한 공동묘지인 셈이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다.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보지 않고, 잠시 쉬는 휴식으로 보는 것이다.

입구에는 12지신과 함께 사람 얼굴에 뱀의 꼬리를 달고 있는 남녀 2인이 손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복희여와상이 있다. 란주의 복희사당에서 보았듯이 복희와 여와는 중국의 신화전설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로서 이들의 남매혼인에 의해 인류가 탄생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길이 2m, 폭 1m의 유명한 복희여와도가 출토되었다.

10㎢의 면적의 공동묘지에는 수천 개의 무덤이 있다. 그 양식은 대부분 비슷한데 땅 표면에서 지하로 45도 방향으로 길을 만들고 묘실 입구에 문을 만들었다. 묘실은 사방 3~4m, 높이 3m 정도이며 높이 50㎝정도의 단을 만들어 시신을 놓았다.

▲ 아스타나 고분군.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이 5백년간 사용했던 공동묘지다.
ⓒ 조수영
초기에는 관을 만들었지만 후기에는 관이 없다. 입구와 묘실 사이의 벽에는 또 다른 방, 이실을 만들었는데 그림이나 각종 문서를 보관했다. 묘실 안에는 이 지역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아도 자연 상태로 만들어진 미라가 있다.

뼈에 살가죽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삭아서 찢어진 옷이 그리 오래된 것 같이 보이지 않아서 어쩐지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조차 민망하다. 우리는 천 년이 넘은 미라의 '휴식'을 방해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간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그중 4첩은 왼쪽부터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막은 금인은 언행에 신중함을, 금인과 마주보고 있는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이 올바른 무위정직을 뜻한다.

엄청난 유물이 발견되다

▲ 묘실은 땅 표면에서 지하로 45도 방향으로 길을 만들고 입구에 문을 만들었다.
ⓒ 조수영
▲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지금 사진에서 보니 촬영이 금지된 곳이었다.
ⓒ 조수영
두 번째 묘는 상인의 묘다. 고향을 떠나 멀리 이곳 아스타나에 묻히면서 고향의 그리운 풍경을 벽에 그렸다.

또 하나의 묘는 부부 합장묘인데, 미라가 유리관 속에 전시되고 있다. 남자는 베개를 베고 있고, 여자는 베개가 없다. 부부합장이 당시의 풍습인지 알 길은 없으나 부부의 인연이 사후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스타나 고분군에는 고창국과 당나라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대량의 유물, 벽화, 미라가 출토되었다. 특히 216호에서 나온 풍만하고 화려한 당대 미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채색한 여인의 목상, 종이로 만든 관, 관을 덮을 때 쓰던 수십 점의 복희여와도가 대량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통행증이나 관용문서, 고소장 등도 출토되었다. 사불나의 아들 금아와 조설창의 딸 강실분이 우차에 치여 배상해달라는 내용의 고소장이다.

관용문서가 아닌 사문서도 있다. 적강녀라는 여인이 명주 20필을 주고 목관을 산다는 매매계약서다. 그런가 하면 탄원서도 있다. 장식현이라는 병사가 징집되어 간 뒤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그의 누이동생인 아모가 관청에 올린 탄원서이다. 오빠가 군역에 들어가 교하거방에 배속되었으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집안 일이 곤란하니 대신 자신을 데려가 대신 일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유물이 투루판시 박물관이나 우루무치 박물관으로 이전되고 무덤과 3개의 미라만 공개하고 있을 뿐이다.

투루판에서 한낮에 어디를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늘만 벗어나면 마치 화재 현장 곁에 있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확확 끼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식사 후 1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오후 일과는 3시부터 시작해 6시에 끝난다.

그러고 보면 8시간 근무라 하지만 낮잠시간을 빼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다. 이곳에 왔으니 이곳의 법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겠거니와 한낮의 더위는 더 이상 관광을 할 수 없게 했다. 숙소로 들어와 한숨 자고 오후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태그:#고창고성, #현장, #아스타나, #복희, #고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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