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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미소사 대웅전, 소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 국은정
겨울을 보낼 때가 온 것이다. 봄꽃의 개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아직도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디론가 봄을 마중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그 마음을 몸으로 옮기는 일에는 늘 서툴다. 그런 나의 근황이 서글프다고 느끼고 있을 무렵, 지인에게서 '고창 미소사의 매화가 수줍은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이거다! 이렇게라도 잠시 일상을 벗어나 보자. 이름만 들어도 두 입술 끝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게 하는 '미소사'로 떠나는 아침(2월 27일), 세상에서 쌓인 묵은 상념들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전북 고창 터미널에 도착했다. 방장산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절이기 때문일까, 미소사로 가는 버스노선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굳이 가려고 마음먹지 않으면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에 미소사가 있는 것이다.

다시 택시를 타고 굽이굽이 꼬부랑 산길을 올라 마침내 목적지에 닿았다. 저만치 털북숭이 강아지 한 마리가 컹컹거리며 뛰쳐나온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를 금방 반가움으로 바꿔 꼬리를 흔들 줄 아는 절집의 강아지가 왠지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절 안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꽃나무와 야생화 천지인 '미소사'

▲ 미소사에 피어난 노란 복수초, 깊은 산속에서 만날 수 있는 복수초를 이렇게 절의 뜰에서 볼 수 있다니! 이 꽃의 순우리말은 '얼음새꽃'이다.
ⓒ 국은정
이름에서 느껴지는 소박한 절의 이미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아담해 보이는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청아하다. 경내를 가득 메운 꽃나무들이 그 풍경소리에, 이른 봄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듯했다.

목련나무 가지 끝에는 봉긋하게 부풀어 가는 꽃눈들이 숨 가쁘고, 동백나무에는 어느덧 빨간 동백꽃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이 숭고한 생명이 기지개를 펴는 미소사를 한 바퀴 휘둘러보니 온통 꽃나무와 야생화 천지다. 먼 걸음에 달려온 여행자의 마음에도 한 가득 꽃송이가 벌어진다.

어떤 꽃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할까? 마음은 아이가 되어 버렸다. 봄을 닮아 들뜬 마음을 다잡고 점심 공양을 마쳤다. 마음 푸근한 공양주 보살님은 봄꽃에 정신 팔려 있는 나를 채근하며 차 마시기를 권한다.

통나무로 지은, 조금은 모던해 보이는 요사채 2층에 오르니 열린 창문으로 소나무 향이 달려 나왔다. 선운사에서 보내왔다는 발효차의 차맛이 소나무향 만큼이나 진하다. 차를 마시면서도 연신 절집 마당 가득 부푸는 봄꽃의 표정에 자꾸 마음이 넘실거렸다.

▲ 통나무로 지은 요사채에서 차를 마시고 (도의 스님과 성각 스님, 그리고 박경희 시인)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참 따뜻한 봄날이었다.
ⓒ 국은정
이 절의 꽃들은 모두 주지 스님이 직접 사다가 심고, 가꾼 것이라고 한다. "설법은 이 꽃들이 다 한다"고 말하는 주지 스님의 미소에는 그 어떤 욕심도 보이지 않았다. '말하는 입보다 들어주는 귀가 더 귀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이 시대에, 스님은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어리석은 여행자의 마음에 심어주셨다.

그래도 철없는 여행자는 이 절과 관련된 이야기는 무엇이든 듣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게 말을 아끼는 스님은 얼마 전까지 '생명 탁발 순례단'에 참여하셨다고 들었다.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물으니 "도법 스님에게 순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누군가는 시작해야 하는 일이고, 당장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꼭 씨앗을 심어야 한다"며 3월부터 다시 순례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애틋함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믿는 스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미소사 대웅전 벽화, 상봉 스님께서 그리신 '심우도'이다.
ⓒ 국은정
성각 스님에게 이 절에 얽힌 일화를 전해 들었다. 몇 해 전 대웅전 벽화인 '심우도'가 KBS에 방영이 되고, 이 조그만 절에 낯선 사내 하나가 찾아왔단다. 여자처럼 살살거리는 말투와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던 이 사내는 자청해서 이 절의 살림을 도맡으려 했다는 것.

자신의 신분에 대해 밝히기를 꺼려하는 이 사내가 그다지 미덥지 않았으나 그의 살림 솜씨만은 지금도 감탄할 정도였단다. 그가 절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 스님 두 분이 서울에 일이 있어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사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내와 함께 불전함 속의 돈, 300만원을 호가하는 카메라가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스님들은 아직도 그때의 아찔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스님들은 자신들의 순진함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서 사내의 악행을 욕하기보다 도리어 자신들을 탓했고, 잠시나마 '절의 살림을 도맡았던 사내에게 지나친 보수가 나간 것'이라며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은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회상했다. 가난한 절집을 노린 도둑에게조차 측은지심을 느끼며 껄껄 웃음 짓는 스님들이라니!

스님에게 들은 절에 관련한 또 하나의 이야기는 '한 밥 그릇의 인연'에 관한 것이다. 그 때는 주지 스님 혼자 그야말로 작은 암자 하나 덩그러니 지키며 공양도 직접 해결을 했었단다. 우연히 등산객 하나가 와서 밥 한 그릇을 얻어먹을 수 있냐고 물었고, 초라한 행색이 마음에 걸렸던 스님은 기꺼이 찬밥 한 그릇을 대접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친 행인은 자신의 연락처 하나를 적어주고 자신이 수리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혹시라도 차가 고장 나거든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고 하며 산을 내려가더란다.

스님이 들려준 인연들

▲ 미소사라는 이름을 직접 지으셨다는 이 절의 주지스님( 법명 '도의')은 그 웃음 역시 아름다운 분이었다.
ⓒ 국은정
시간이 지나 그 행인의 일이 잊혀질 무렵, 스님은 접촉 사고로 인해 우연히 다시 그 연락처로 전화를 걸게 되었고, 그 때 알게 된 것이 그 초라해 보이던 사내는 커다란 택시 회사의 사장이면서 1급 정비공장을 무려 4개나 가지고 있던 재력가였던 것. 스님은 그의 도움으로 차를 수리할 수 있었고 이후로도 종종 연락을 하며 지냈다고 했다.

얼마 후, 미소사의 원래 땅주인이 찾아와 당시 무허가였던 절을 모두 헐어버리겠다고 법정 소송을 걸어와 결국 땅주인의 바람대로 절이 사라지게 될 위기가 찾아왔다. 그 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자신의 동생(판사)에게 조언을 받아 '화해신청'이라는 것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결국 그를 통해 무허가였던 절터를 사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인해 지금의 미소사가 지켜질 수 있었다는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스님은 그 때 '인연'의 소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절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지어진 지금의 통나무 요사채 역시 인연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 주셨다. 어느 날 간암 말기의 환자가 찾아와 자신이 묵을 곳이 필요하다고 생떼를 부렸고, 요사채를 지을 여력이 없던 스님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때 마침 통나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찾아와 자재비만 받고 자신들이 직접 집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해온 것이다. 인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통나무로 된 요사채를 짓게 된 스님은 미소사는 '저절로'로 지어진 집이라며, 다시 한 번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하셨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누군가 이런 미소사에 '웃음절로'라는 별칭을 붙여준 것 역시 인연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붉은 매화꽃 송이에 마음 한 가득 웃음을 선물 받았다.
ⓒ 국은정
▲ 찬찬히 둘러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어여쁜 할미꽃, 그 앞에서 말을 잊었다.
ⓒ 국은정
스님들의 이야기와 깊은 차의 향을 음미하고 나서 나의 걸음은 다시 때 이른 야생화가 피어있는 절집 마당으로 향했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꽃과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라는 노란 영춘화의 올망졸망한 꽃송이들이 찌들었던 내 눈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느낌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숲 깊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는 얼음새꽃(복수초)과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할미꽃,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까지 미소사에서 만난 꽃들은 모두 여행자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선물했다.

▲ 절의 뜰안 가득 숨가쁘게 새순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 국은정
▲ 뜰안, 여기저기에서 쉽게 천리향을 볼 수 있었다.
ⓒ 국은정
어째서 미소사에 있는 스님들의 웃음이 그렇게 잔잔하고 아름다웠는지 자연스레 수긍이 간다.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작은 야생화에 눈을 맞추는 스님들은 '연꽃을 보며 살며시 웃음을 보였다'는 부처님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꽃들이 미소사에 피어날지 알 수 없지만, 미소사에서 보낸 하루를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후로도 나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는 그 이유만은 어렴풋이 알 수가 있다.

▲ 절집을 지키는 귀염둥이 반달이.
ⓒ 국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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